미영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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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영 전쟁(美英戰爭) 또는 1812년 전쟁(영어: War of 1812)는 1812년 6월부터 1815년 2월까지 미국과 영국, 그리고 양국의 동맹국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이다. 영국의 역사학자들은 이 전쟁을 나폴레옹 전쟁의 일부로 간주하지만, 미국과 캐나다에서는 서로 구별하고 있으며, 나폴레옹 전쟁과 별개로 벌어진 전쟁으로 간주한다.
미영 전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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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전쟁의 일부 | |||||||
미영 전쟁 몽타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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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테쿰세 동맹[1] 스페인 (1814) | |||||||
지휘관 | |||||||
제임스 매디슨 |
조지 3세 |
프랑스 제1제국과의 전쟁의 발발로 인해 영국은 프랑스와의 중립적인 무역을 막기 위해 해상봉쇄를 감행했고, 미국은 이것이 국제법을 위반한 것임을 주장하며 미국과 영국과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해상봉쇄를 감행하기 위해 영국은 미국 상선 항해사들을 영국 해군에 복무하게 했다. 전쟁 발발 5년 전 발생한 체사피크 레오퍼드 사건을 비롯한 여러 사건들은 미국 내에 반영 감정을 증폭시켰다. 1811년에는 11명의 영국 해군이 사망한 리틀 벨트 사건으로 인해, 영국 역시 이에 분노하게 되었다.[2][3]
이때 영국은 국경지역에서 미국 정착자들을 공격하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지원하고 있었고, 이는 아메리카 대륙으로의 확장을 추진하던 미국 정부의 분노를 사게 되었다.[4] 역사학자들은 현재 캐나다인 영국령 북아메리카 일부 또는 전체를 병합하고자 하는 미국의 욕구가 미국이 전쟁을 하겠다고 결정한 것에 대해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논의 중이다.
1812년 6월 18일, 미국 대통령 제임스 매디슨은 매파의 압력으로 영국과의 전쟁을 선포했다.[5]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해 대부분의 군대가 유럽에 있었던 영국은 방어 전략을 채택했다. 미국의 전쟁 추진 능력은 국민들로부터의 반발로 인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특히 뉴잉글랜드 주에서 반발이 심했는데, 이들은 이 전쟁을 "매디슨 씨의 전쟁"이라고 경멸적으로 불렀다. 미국의 디트로이트 포위전 및 퀸스턴 하이츠 전투에서의 패배로 인해 어퍼 캐나다를 장악하겠다는 미국의 시도는 좌절되었으며 영국군의 사기를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미국은 로어 캐나다와 몬트리올을 장악하려고 했으나 이것도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1813년 미군은 이리 호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테쿰세 동맹을 테임즈 전투에서 패배시켜 전쟁의 우선 목표를 달성했다. 미국이 캐나다를 침공하려는 마지막 시도는 룬디즈레인 전투에서 미군이 패배하면서 실패로 끝났다. 해상에서는 강력한 영국 해군이 미국의 항구를 봉쇄해 미국의 무역을 차단하고 영국군이 해안을 급습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1814년 이러한 공습 중 하나로 워싱턴 방화가 있었으며, 미군은 이에 맞서 플래츠버그 전투와 발티모어 전투에서 영국군을 격퇴시켰다.
영국에서는 전쟁세와 미국과의 무역을 재개하자는 요구로 인해 전쟁에 대한 반대 목소리가 높아졌다. 퐁텐블로 조약을 통해 프랑스에 대한 해상봉쇄가 종료되었고, 영국은 압박을 중단했다. 영국은 이후 미국 항해사들에 대해 고려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다. 영국 정부는 이후 미국 해안에 대한 봉쇄를 강화해 미국의 해상 무역을 거의 중단시켰고, 미국 정부를 파산으로 몰고 갔다. 1814년 8월부터 평화 협상이 이뤄졌고, 1814년 12월 24일 헨트 조약이 체결되었다. 평화 조약은 몇몇 지역에 전달되지 못했고, 이에 따라 영국군은 루이지애나를 침공했지만 1815년 1월 뉴올리언스 전투에서 패배했다. 이 승리 덕분에 미국에 대한 반전 감정은 완전히 사라졌으며, 이는 미국 전체가 다시 통합되는데 기여했다.[6] 미국 정부는 1815년 2월 27일 종전을 공식적으로 발효했으며 전쟁은 이전 상태로 복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