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봉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정치인(1898–1958)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김원봉(金元鳳, 1898년 9월 28일 ~ 1958년 11월)은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정치인이다. 일제강점기의 의열단장을 역임했다. 호는 약산(若山),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경남 밀양에 의열 기념관이 있다.
김원봉 金元鳳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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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의 제2대 로동상 | |
임기 | 1952년 5월 29일 ~ 1958년 9월 11일 |
주석 | 김두봉(북 국가수반) 김원봉(북 국가수반 권한대행 겸직) 최용건(북 국가수반) |
수상 | 김일성 |
신상정보 | |
출생일 | 1898년 9월 28일(1898-09-28) |
출생지 | 대한제국 경상남도 밀양군 부내면 내이리 (現 대한민국 경상남도 밀양시 내이동 901번지) |
거주지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 |
사망일 | 1958년 11월 13일(1958-11-13)(60세)? |
국적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학력 | 경성 중앙고등보통학교 졸업 신흥무관학교 자퇴 황푸 군관학교 졸업 |
경력 | 의열단장 조선민족혁명당 총서기 겸 당무위원 조선의용대장 광복군 부사령관 겸 제1지대장 임정 국무위원 및 군무부장 조선인민공화당 중앙위원장 겸 당무위원 조선로동당 고문 겸 당무위원 북조선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북조선 내각 국가검열성 국가검열상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북 국가부수반 겸 국가수반 권한대행 |
정당 | 조선인민공화당 |
본관 | 김해 |
부모 | 김주익(부) 이경념(모) 천연이(계모) 박순남(서모) |
형제자매 | 김경봉(동복 아우) 김익봉(이복 서제) 김구봉(이복 적제) |
배우자 | 최동선(삼혼) 박차정(재혼 및 사별) 최남선(초혼 및 이혼) |
자녀 | 2남 |
친인척 | 김철화(친조부) 김주오(친숙부) 황상규(고모부) |
군사 경력 | |
주요 참전 | 중일 전쟁, 한국 전쟁 |
상훈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로력훈장(1952년, 1958년) |
1919년 아나키즘 단체인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였고, 황푸 군관학교를 거쳐 조선의용대를 조직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하여 임시의정원(경상도 지역구)의원, 한국 광복군 부사령관 겸 제1지대장으로 활동하였고, 1944년 임시정부 군무부장에 선출됐다.
1946년 2월 민족주의민주전선 공동의장, 6월 인민공화당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48년 김구·김규식 등과 함께 남북협상에 참여한 뒤에 그대로 북한에 남았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수립 후 국가검열상, 조선인민공화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노동상,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군사위원회 평안북도 전권대표로서 후방에서 북한군의 군량미를 생산하는 일을 했다.[1] 이로 인해 김일성으로부터 로력훈장을 수여받았다. 남파활동을 벌이기도 했는데, 실제로 1954년 1월 25일 김원봉의 직접 지휘 하에 대한민국의 경제 혼란 및 선거 방해를 목적으로 남파된 간첩단 4명이 체포되었다.[2] 이후 김일성과의 정치 암투에서 패배하여 1958년 10월 '반국가적 및 반혁명적 책동의 죄'로 대의원 권한이 박탈되었고, 체포되었다고 한다.[3] 그의 사망에 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으나, 정치범수용소에서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4] 경상남도 밀양에 의열기념관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