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AI tools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완안 함보(完顏函普)는 복간수 완안부의 1대 추장으로 금나라 황실의 시조이다. 고려인 금행(今幸)의 아들 금준(今俊)이기도 하다. 1136년, 시조(始祖), 경원황제(景元皇帝)로 추존되었고, 1142년에, 함보의 묘를 광릉(光陵)이라 칭하였다. 이듬해인 1143년에, 시조(始祖) 의헌경원황제(懿憲景元皇帝)로 증시되었다.
서적별로 이름에 대한 표기가 다양하다. 함보(函普)라는 이름은 《금사》에 기재된 것이며, 그 외에도 《신록기(神麓記)》에서는 긍포(掯浦), 《흠정만주원류고》와 《어제개역금사》에서는 합부(哈富, 만주어: ᡥᠨᠸᡠ Hafu), 《삼조북맹회편(三朝北盟會編)》 사고전서 영인본에는 긍포를 감포(堪布)로 고쳤고, 《송막기문》·《금지(金誌)》·《대금국지(大金国志)》에서는 감복(龕福)로, 《건염이래야조잡기(建炎以來朝野雜記)》에서는 지포(指浦)라 기술했다.[1] 1636년, 숭덕제가 허셔리 히퍼(赫舍里希福, 만주어: ᡥᡝᠰᡝᡵᡳ
ᡥᡳᡶᡝHešeri Hife) 등에게 명하여 만주문자로써 《금사본기(金史本紀)》를 번역하도록 하였고, 4년 뒤에 탈고를 마쳤고, 1644년에 순치제 《금사(만주어: Aisin Gurun i Suduri)》에는 샨푸(만주어: ᠰᠸᠶᠠᠠ ᡦᡠ Siyan Pu)라 기술하였다.
《금사》,《고려사절요》,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고려인 금행(今幸)의 아들 극수(克守) 및 금준(今俊)이라고 하며, 《고려사》에서는 그의 이름을 김극수(金克守) 또는 금준(今俊)이라고 한다.
후삼국 때에 신라에서 고려로 교체되는 시기에 거했고, 남송대 모요가 기록한 《신록기》에서는 함보가 신라에서 완안부로 왔다고 한다.[2] 《금사》에 따르면, 함보가 고려에서 나왔을 때 60세였다.[3]
함보의 형 아고내는 불교에 심취해 동행하기를 불응하여, 고려에 남았고, 함보와 아우 보활리는 고려에서 각각 복간수와 야라로 완안부에 들어갔다.
보활리의 후손들은 야라로 완안부[4]의 추장을 세습하다 그 4세손 완안 직리해(直離海) 때 완안 오고내의 복간수 완안부와 통문하여 완안 핵리발 때에는 직리해의 아들 완안 석토문(石土門)이 아우 아사만(阿斯懣)과 함께 부족을 들어 복간수 완안부에 귀부하였다.
《신록기》에 따르면, 함보는 벽목(劈木)하여 문서와 같이 계약을 이루워냈다. 부민들로 하여금 빚을 내게하고, 이자가 늘어나게하여, 근면하게 밭에 종자를 뿌려 마침내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만약 만주족이 이 닭, 돼지, 개, 말을 훔치는 도적질을 하는 것을 본다면, 만주족들을 질곡(桎梏)으로써 형틀에 묶고, 버드나무 가지를 이용하여 채찍질하였고, 그 외에는 7배로 배상하는 법령을 엄준하고 과단하여 사사롭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근방 만주족들이 모두 복종하여 그를 신명(神明)이라 칭하였다. 《금사》에 따르면, 고려인 함보가 고려인들을 이끌고 완안부에 이르러 오래 거주하였는데, 그 고려인 부민들은 일찍부터 만주족 사람들을 죽였고 만주족 여성들을 탈취하여 이로 인해 양족은 원한으로 싸움이 그치질 않아 해결되지 않았다. 완안부민들이 함보에게 양족이 서로 죽이지 않게 해 준다면, 완안부에 만주족 여성들이 있으니 서로 결혼시켜 주고 정식 완안부민으로 받아줄 것을 제안하자 함보는 승락했다. 함보는 살인 사건에 대해서는 주모자 1명만 처벌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물건으로 보상토록 하면 싸움도 그치고 이득도 될 것이라 하면서 사람들과 함께 만일 살상할 경우, 살인자가 피살자 가족에게 자기가족 1명, 암말 10마리와 수말 10마리, 암소 10마리, 황금 6냥을 주면 즉시 양측은 화해하고 사적인 싸움을 하지 않기로 한다는 법을 규정했다. 완안부민들은 이 규정을 믿고 준수하였으며 이에 대한 사례로 함보에게 청우 1마리를 주고 귀한 만주족 여성들을 신부로 데려가는 것을 허용하였다.《신록기》에 따르면 그중에 가장 귀한 만주족 여성의 나이가 40세였고, 성은 결도고단(結徒姑丹)씨라고 한다. 함보는 마침내 청우를 이용하여, 결도고단씨 일가에 보낼 혼례 예물을 마련함과 동시에 그의 자산을 마련하였다. 결도고단씨는 우마로서 농작기구를 재물로 사용하여, 마침내 함보는 그녀와 혼인하였다.
장남 오로(烏魯), 차남 알로(斡魯), 장녀 주사판(注思板)을 출산하여, 마침내 완안부 사람이 되었고, 이후에 여진 추장 무리가 결맹하여 추대하여 고려인 함보를 수령으로 삼았다.《송막기문》에 따르면, 함보가 일을 잘 처리해 여진족들이 함보에게 수령직 양보하였고, 함보에게 복종하였다고 한다.[5]
대한민국 역사학계에서는 함보를 고려나 신라인으로 여기고 있지만 함보의 출자에 대해서 다양한 견해가 존재하는데,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가 함보가 생여진 사회의 신화(단군조선에 대하여 신화라고 비하하거나 깍아내리고 있지만 그보다 못한 일본서기 등은 엄청난 오류투성이와 거짓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야말로 아전인수격이다)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 카미 츠구오(三上次男)[6][7], 나이토우 코난[8], 이마이 히데 마코토[9] 등이 있는 것을 보면 일본은 역사에 대해서 자기들만의 방식에 의하여 연구나 근거가 빈약한데도 오류다.잘못이다. 거짓이라고 단정하는 경우가 많다
한편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초기 진위푸가 시조 함보는 신라인으로 그가 완안부로 들어간 시기가 거란 초로 아직 신라가 멸망하지 않았고 고려가 흥기했던 시기이므로 신라 혹은 고려라고 기술했다고 본 바[10]를 제외하고 장보췐, 쑨진지, 멍구퉈리 등 중국 사학계에서는 함보가 고려인 또는 말갈인이라는 것이 통설을 이루고 있다.[11][12]
이주전[13]과 김호동은 함보의 출자로 언급되는 '고려'가 고구려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14]
다만 김정배는 고려를 고구려로 보는 것은 시간적으로 전혀 맞지 않는 이야기라고 주장하였고 신라 말의 충지(忠至) 잡간(雜干)과 영규(英規) 아간(阿干)의 예를 들며 신라 말에도 성이 없던 호족들이 존재하였고 역사의 주류라고 볼 수 있는 왕건의 고려와 달리 한국의 문헌에는 나타나지 않는 비주류의 신라, 고려 호족들이 후에 성씨를 내세웠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15]
차드 D. 가르시아는 함보의 출자가 고려가 아니라고 주장했는데, 함보의 출자가 고려로 기록된 것은 한반도의 권력이 함보가 온 여진족을 지배한 것에 연원한다고 하면서 함보는 사실 고려에서 동여진이라 부른 장백산삼십부여진 출신이라고 추측했다.[16]
Seamless Wikipedia browsing. On steroids.
Every time you click a link to Wikipedia, Wiktionary or Wikiquote in your browser's search results, it will show the modern Wikiwand interface.
Wikiwand extension is a five stars, simple, with minimum permission required to keep your browsing private, safe and transpar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