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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도 대첩(閑山島大捷) 혹은 한산대첩은 1592년 8월 14일(선조 25년 음력 7월 8일) 통영 한산도 앞바다에서 조선군이 일본군을 크게 무찌른 해전으로, 이 전투에서 육전에서 사용하던 포위 섬멸 전술 형태인 학익진을 처음으로 해전에서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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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도 대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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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의 일부 | |||||||
1592년(선조 25년) 이순신 장군이 지휘하는 조선의 수군이 한산도 앞바다에서 일본군을 격퇴하고 있는 모습을 그린 기록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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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지휘관 | |||||||
이순신 원균 이억기 권준 무의공 이순신 정운 어영담 김완 배흥립 황세득 한백록 우치적 기효근 신호 이운룡 이영남 이언량 송희립 나대용 이기남 황옥현 ‡ ☠ 이회 | |||||||
군대 | |||||||
조선군 | 일본 | ||||||
병력 | |||||||
전선 55척 (거북선 3척, 판옥선 52척 포함) 수군 1만, 노꾼 1만 |
전선 73척 (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 | ||||||
피해 규모 | |||||||
전선 파손 없음 3명 전사, 10명 부상[1] |
지휘관 부상, 47척 침몰, 12척 나포 총 59척 전선 상실 마나베 사마노조 할복 (자살) |
조선 선조 25년(1592년) 음력 5월 29일(양력 7월 8일)에 2차 출동한 조선 수군의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함대는 음력 6월 10일(양력 7월 18일)까지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 등에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나, 육지에서는 패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일본 수군은 일본 육군에 호응하여 가덕도와 거제도 부근에서 10여 척에서 30여 척까지 함대를 이루어 서진하고 있었다.
일본은 해전의 패배를 만회하고 제해권을 재차 장악하고자 병력을 증강하였다.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제1진 70여 척은 웅천(熊川)에서, 구키 요시타카의 제2진은 40여 척을, 제3진의 가토 요시아키도 합세하였다.
이에 이순신은 음력 7월 5일(양력 8월 11일),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함께 전라 좌, 우도의 전선 48척을 본영이 있는 여수 앞바다에 집결시켜 합동훈련을 실시하였고, 다음 날인 6일에 이억기와 더불어 48척을 거느리고 출진하였고, 노량에서 경상우수사 원균의 함선 7척이 합세하여 조선 수군의 전력은 55척이 되었다. 음력 7월 7일(양력 8월 13일) 저녁, 조선 함대는 당포에 이르러 정박하였다. 이때 목동 김천손(金千孫)에게서 일본의 다이묘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함대 73척(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이 견내량(見乃梁: 거제시 사등면 덕호리)에 들어갔다는 정보를 접했다.
음력 7월 7일(양력 8월 13일), 이순신 휘하의 수졸 황옥현이 도주했다. 이순신은 황옥현을 잡아들여 군무이탈 혐의로 참수형에 처한 후 그 수급을 효시했다.
견내량은 거제도와 통영만 사이에 있는 긴 수로로 길이 약 4km에 넓은 곳도 600m를 넘지 않는 데다, 암초가 많아 판옥선이 운신하고 전투를 벌이기에 좁은 해협이었다. 반면 한산도는 거제도와 통영 사이에 있어 사방으로 헤엄쳐나갈 길도 없고, 한산도는 당시 무인도나 다름이 없는 섬이었기 때문에 궁지에 몰려 상륙한다 해도 굶어 죽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이리하여 먼저 판옥선 5~6척 만으로 한산도 앞바다로 일본 함대를 유인하여 격멸한다는 전략이 세워졌다.
6척의 조선 함대를 발견한 일본 수군은 그들을 뒤쫓아 한산도 앞바다에까지 이르렀고 그곳에서 대기하던 전 조선 함대가 배를 돌려 학익진을 펼쳤다. 여러 장수와 군사들은 지·현자총통(地玄字銃筒) 등 각종 총통을 쏘면서 돌진하였다. 싸움의 결과 중위장 권준(權俊)이 층각대선(層閣大船) 1척을 나포한 것을 비롯해 왜선 47척을 불살라 격침시켰고 12척을 나포하였다.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뒤에서 독전하다가 전세가 불리해지자, 패잔선 14척을 이끌고 김해 쪽으로 도주했다. 이 해전은 조선 수군의 큰 승리로 막을 내렸다. 격전 중 조선 수군의 사상자는 있었으나 전선의 손실은 전혀 없었다. 일본군 400여 명은 당황하여 한산도로 도주했다가 뒷날 겨우 탈출하였다.
일본의 전선들은 판옥선에 비해 급격한 회전이 어려웠고(따라서 후방은 비워져 있었지만, 쉽게 도망갈 수 없었다)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함대의 정면에 배치된 함선은 많은 피해가 우려되었지만, 조선 함대는 압도적인 화포의 화력으로 이 불리한 점을 극복하였다. 격침되거나 나포된 일본 함선은 모두 총 59척이었고, 한산도로 도망친 와키자카 휘하의 병력 400여 명(이순신이 조정에 올린 《견내량파왜병장》에는 400명, 《와키자카기》에는 200여 명)은 군량이 없어 13일간 미역을 먹으며 견내량과 무인도에서 머무르다가 뗏목으로 겨우 탈출하였다. 마나베 사마노조는 이때 자신의 배가 소각되자 섬에서 할복하였다.
이 해전을 진주대첩(晉州大捷, 1592년 10월 5일 ∼10월 10일)·행주대첩(幸州大捷, 1593년 2월 12일)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 대첩 중의 하나로 부른다. 한산도 대첩은 일본 수군의 주력을 거의 격파해 그들의 수륙병진계획을 좌절시켰다. 그리고 육지에서 잇단 패전으로 사기가 떨어진 조선군에게 승리의 용기를 주었다.
나아가 조선 수군이 남해안 일대의 제해권을 확보함으로써 이미 상륙한 적군에게도 위협을 주어 불리했던 전세를 유리하게 전환할 수 있었다. 구한말 고종 황제의 미국인 고문 호머 헐버트도 “이 해전은 조선의 살라미스 해전이라 할 수 있다. 이 해전이야말로 도요토미의 조선 침략에 사형 선고를 내린 것이다…….”라고 감탄하였다.
한산도 해전 다음 날 벌어진 안골포(安骨浦, 현 창원시 진해구 안골동)에서 벌어진 해전도 이순신은 승리로 이끌었다.
이순신은 왼쪽 어깨 상단에 조총을 맞았고 정헌대부(正憲大夫, 정2품), 이억기 · 원균은 가의대부(嘉義大夫, 종2품)의 관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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