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익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1896-1960)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최창익(崔昌益, 1896년 2월 29일(1896-02-29) ~ 1957년 10월 6일(1957-10-06))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였으며 공산주의자였다.
최창익 崔昌益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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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제3대 부수상 | |
임기 | 1953년 3월 31일 ~ 1956년 9월 19일 |
주석 | 김두봉 |
수상 | 김일성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제3대 재정상 | |
임기 | 1954년 3월 23일 ~ 1954년 11월 22일 |
주석 | 김두봉 |
수상 | 김일성 |
이름 | |
별명 | 최창석(崔昌錫), 최창순(崔昌淳), 최동우(崔東宇), 이건우(李建宇), 최태현 |
신상정보 | |
출생일 | 1896년 2월 29일(1896-02-29) |
출생지 | 조선 함경도 온성 남양면 |
거주지 |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특별시 |
사망일 | 1957년 10월 6일(1957-10-06)(61세) |
사망지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에서 사형(옥사)이 집행됨. |
국적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학력 | 일본 와세다 대학교 정치경제학부 학사 소련 모스크바 대학교 대학원 철학 석사 수료 |
경력 | 독립운동가 사회주의 운동가 정치인 조선로동당 고문 겸 당무위원 |
정당 | 조선로동당 |
배우자 | 허정숙(재혼) |
자녀 | 최동국(아들) |
친인척 | 허헌(계취 장인) 최원도(친손) |
종교 | 무종교 |
군사 경력 | |
복무 | 인민군 지상군 준장 전역(1949년) |
변호사 허헌의 사위인 그의 이명은 최창석(崔昌錫)·최창순(崔昌淳)·최동우(崔東宇)·이건우(李健宇)이다. 일본 유학 중인 1923년부터 노동운동에 종사하다가 1925년 이후 공산주의단체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의 계속된 탄압, 검거를 견디지 못하고 1934년 망명하였다. 중국에서 김원봉 등과 함께 조선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 등에서 항일활동을 하다가 그의 노선에 반발하여 탈퇴, 1936년 6월 조선청년전위동맹을 조직하였다. 그 뒤 김원봉 일파와 협상을 시도하였으나 결렬, 화북으로 건너가 무정(武亭), 김두봉 등과 조선독립동맹에서 활동했다.
8·15 해방 이후 38선 이북으로 귀환하였으며, 1946년 1월 조선독립동맹을 개칭해 '조선신민당'을 창설하는 데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3당 합당에 참여하는 등 연안파의 중진으로 활동했다. 1948년 4월 남북협상에 참여했다가 그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에 참여하여 재정상, 부수상 겸 재정상, 1955년 국가검열상 등을 역임했다.
김두봉 시대 인민 정권이자 북한 인민 정부 시대의 제3대 재정상 시절이던 1954년 8월 3일, 김일성 총리의 독재화를 비판하다가 징처되어 같은 해 11월 22일, 북한 재정상 직에서 파면되었고 1년 후 1955년 8월 11일, 종파 사건에 연루되어 남로당과 박헌영의 공격에 동참했지만 1956년 9월 23일, 김일성에 의해 숙청되었다. 중공의 국방부장 펑더화이가 그를 변호하여 사형은 모면하였으나 그해 10월 재투옥 후 이듬해 옥사한다. 독립운동 시 가명은 최창석(崔昌錫), 최창순(崔昌淳), 최동우(崔東宇), 이건우(李建宇), 최태현 등을 사용하였다. 변호사 허헌의 딸 허정숙의 남편이다. 함경북도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