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사홍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임사홍(任士洪, 1445년 ~ 1506년 음력 9월 2일)은 조선시대 전기의 문신이자 외척, 사상가, 성리학자이다. 본관은 풍천 초명은 임사의(任士毅), 자(字)는 이의(而毅)이다. 신수근 등과 함께 폐비 윤씨 사사 사건을 연산군에게 알려 갑자사화의 빌미를 제공한다. 음서로 출사한 뒤 사재감사정과 사직을 거쳐 1465년(세조 11년)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은 숭록대부 지중추부사(崇祿大夫 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작위는 풍성군(豊城君)이다.
임사홍 任士洪 | |
---|---|
前 조선국 병조판서 (前 朝鮮國 兵曹判書) | |
임기 | 1502년 ~ 1506년 |
군주 | 조선 연산군 이융 |
신상정보 | |
출생일 | 1445년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
사망일 | 1506년 음력 9월 2일 (향년 62세) |
사망지 | 조선 한성부에서 암살(살해)됨. |
국적 | 조선 |
학력 | 1465년(세조 11) 알성문과 급제 |
경력 | 문신, 작가, 외척, 정치인, 사상가 |
정당 | 훈구파 세력 |
부모 | 임원준(부) |
배우자 | 본부인 전주 이씨(보성군 합의 딸) 그 외 첩실 1명 |
자녀 | 슬하 4남 2녀(그 중 장남 임광재, 차남 임희재, 3남 임문재, 4남 임숭재) |
친인척 | 임견(조부) 보성군 이합(장인) 남치신(외숙부) |
종교 | 유교(성리학) |
조선 왕실의 인척이자 겹사돈으로 효령대군의 손녀이며 보성군의 딸인 전주 이씨와 결혼하여 왕실의 인척이 되었으며, 그 아들 임광재는 예종의 딸 현숙공주와 혼인하고, 다른 아들 임숭재는 성종의 딸 휘숙옹주와 혼인하여 두 임금의 사돈이기도 했다. 다른 아들 임희재는 사림파 정치인이었다. 관료생활 초반 한명회를 규탄하는 등 소신으로 활동하다가 1478년의 흙비 문제를 놓고 금주와 근신을 주장하는 대간에 대해 대단하지 않은 변고에 술을 금지할 필요가 있느냐고 비판했다가 언관들과 갈등하다 12년간 유배상활을 했다.
이후 사역원과 승문원에서 한어를 가르치다가 이조판서(吏曺判書), 병조판서, 숭정대부가 되었다가 1504년 풍성군에 봉해지고, 우참찬, 좌참찬을 거쳐 숭록대부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한 때 삼정승의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중종반정 직후 살해된 뒤 20일만에 부관참시당했다. 글재주에 능하여 많은 신도비와 묘비명을 썼고, 저서와 작품을 남겼으나 묘비명을 제외한 작품들은 대거 실전되었다.
그 뒤 아들 임숭재가 연산군의 총애를 얻어 정계에 복귀했다. 이후 폐비 윤씨 추숭 문제를 놓고 사림파(士林派)와 갈등하던 연산군에게 유자광, 신수근 등과 함께 장흥군부인 신씨와의 상봉을 주선한다. 사림파를 해치기 위해 갑자사화를 일으켰다는 설이 통설로 제기되어 왔으나 갑자사화 때는 그를 변호하던 훈구파 인사들이 대거 희생되었고, 직접적인 원한관계에 있는 인물은 처조카 이심원만이 유일했으므로 1970년대 이후 궁중파대 부중파의 갈등이라는 새로운 시각이 대두되었다. 셋째 아들 임희재는 김종직의 제자였고, 연산군과 중종 때의 사림파 정치인 남곤(南袞)은 그의 외사촌 동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