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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십국시대(五代十國時代, 907년~979년)는 중국의 역사에서 주전충(朱全忠)이 건국한 후량에 의해 당나라가 멸망한 907년부터, 송나라가 십국을 통일한 979년까지, 황하 유역을 중심으로 화북을 통치했던 5개의 왕조(오대)와 화중·화남과 화북의 일부를 지배했던 여러 지방정권(십국)이 흥망을 거듭한 정치적 격변기를 가리킨다. 오대 십국의 오대는 후량(後梁, 907~923), 후당(後唐, 923~936), 후진(後晉, 936~946), 후한(後漢, 947~951), 후주(後周, 951~960)를 뜻하며, 십국은 오월(吳越, 907~978), 민(閩, 909~945), 형남(荊南, 924~963), 초(楚, 897~951), 오(吳, 902~937), 남당(南唐, 937~975), 남한(南漢, 917~971), 북한(北漢, 951~979), 전촉(前蜀, 903~925), 후촉(後蜀, 934~965)을 포함한다.
이 문서의 내용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2013년 6월) |
오대 십국 五代十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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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오대 | |||||
국가 | 후량 | 후당 | 후진 | 후한 | 후주 | |
수도 | 변주 카이펑 | 낙양 하남 | 변주 카이펑 | 변주 카이펑 | 변주 카이펑 | |
군주 *건국군주 *멸망군주 |
3황제 주전충 주우정 | 4황제 이존욱 이종가 | 2황제 석경당 석중귀 | 2황제 유지원 유승우 | 3황제 곽위 시종훈 | |
성립 | 907년 | 923년 | 936년 | 947년 | 951년 | |
멸망 | 923년 | 937년 | 947년 | 951년 | 960년 | |
처음 | 907년 주전충 당에게서 선양받음. | |||||
끝 | 960년 조광윤 후주에게서 선양받음. | |||||
시기 | 십국 | |||||
국가 | 오 | 남당 | 오월 | 민 | 북한 | |
수도 | 양주 강도 | 금릉 | 항주 서부 | 복주 장락부 | 태원 태원부 | |
군주 *건국군주 *멸망군주 |
4황제 양행밀 양부 | 3황제 이변 이욱 | 5황제 전류 전홍숙 | 6황제 왕심지 왕연정 | 4황제 유민 유계원 | |
성립 | 902년 | 937년 | 907년 | 909년 | 951년 | |
멸망 | 937년 | 975년 | 978년 | 945년 | 979년 | |
국가 | 전촉 | 후촉 | 형남 | 초 | 남한 | |
수도 | 성도 성도부 | 성도 성도부 | 강릉 강릉부 | 담주 장사부 | 광주 흥왕부 | |
군주 *건국군주 *멸망군주 |
2황제 왕건 왕연 | 2황제 맹지상 맹창 | 5황제 고계흥 고계충 | 6황제 마은 마희숭 | 4황제 유엄 유창 | |
성립 | 903년 | 934년 | 924년 | 897년 | 917년 | |
멸망 | 925년 | 965년 | 963년 | 951년 | 971년 | |
처음 | 907년 주전충이 당에게서 선양받음. | |||||
끝 | 979년 조광의가 북한을 멸하면서 중국 재통일. | |||||
후량 시대 오대십국 | ||||||
후당 시대 오대십국 | ||||||
후진 시대 오대십국 | ||||||
후한 시대 오대십국 | ||||||
후주 시대 오대십국 |
오대 십국 시대가 시작된 해는 거란족에 의해 당나라가 완전히 정복되어 멸망한 907년이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왕조로서의 당나라는 875년~884년에 걸쳐 일어난 황소의 난에 의해 멸망한 것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으며, 그 후 장안(長安)을 중심으로 관중 지역을 지배한 일개 지방정권으로 추락하였고 돌궐족 이극용(李克用)과 한족 주전충 등 절도사 세력이 함께 존재하는 난립 상태라고 말할 수 있었다. 여기서는 대략적인 내용을 황소의 난 시점부터 설명하겠다.
당나라의 중앙정부는 755년~763년에 일어난 안사의 난에 의해 약해졌다. 이를 틈타 각지의 절도사 세력은 자립성이 강해져 자신들의 입지를 스스로 다스리기 시작하였고, 먼 지방의 절도사중에는 중앙에 대한 납세마저도 거부한 자가 있었다. 이에 대해 억제책을 고안해 부분적으로 절도사를 누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절도사 세력을 억누르기 위해 이용했던 환관세력이 도리어 힘을 갖게 되어, 정치에 과도하게 참여하게 되어 황제의 폐립까지 결정하게 되었다. 이후 안사의 난을 막으려다 위구르군에 의해 장안이 유린되어 많은 귀족들이 위구르에 끌려가 황폐화되었고 절도사들은 더욱 더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런 폐단으로 중앙정부는 절도사 세력을 억누르던 힘이 사라졌다. 하지만 서쪽에선 위구르와 토번이 당나라 서쪽을 정복하여 절도사들을 죽여 한족들을 노예로 만들었고 당나라의 영토는 매우 축소되었다.
이러한 상태 속에서 황소의 난이 발발했다. 정부군은 추락할 때까지 추락하여 별로 강하지 않은 황소군에 대해 고전을 면치 못했고, 세간에는 황소군을 전멸시키면 자신들의 입장이 위험해진다는 것을 두려워해 힘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말도 있었다.
황소군은 장안을 함락했고, 황제 희종은 촉으로 도망쳤다. 당의 입장에서 다행스러운 것은 황소군이 장안에서 폭정을 일삼아, 장안 사람들의 실망과 분노를 샀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당나라 정부에서는 장안을 회복할 만한 실력이 없었다. 여기서 돌궐 사타족 출신의 이극용과 황소군의 간부였다가 당나라 조정에 투항한 주온(후에 당나라로부터 전충이란 이름을 하사받았다)이 장안으로 들어가 황소의 난을 막았으나 돌궐족들은 당나라 장안을 유린하여 황폐화시켰다.
그러나 이것으로 인해 당나라의 약소함이 만천하에 폭로되었고, 황제는 명목상 존재하는 것에 불과하게 되었다.
이 시기 중앙을 두고 다투었던 이들이 변주(汴州;현재의 카이펑)를 중심으로 산동, 하남을 지배한 주전충과 태원을 중심으로 산서를 지배하던 돌궐족 이극용, 하북을 지배한 유인공이나 섬서 일대를 지배한 이무정 등이다. 그외의 지역에서도 자립한 이들이 많아 후에 10국의 기원이 되었다.
돌궐족 이극용은 항상 당나라를 공격할 기회를 보고 있었고 이극용의 군대는 검은색 의복으로 통일하여 이들을 통칭 갈가마귀군(鴉軍)이라 불렸고 전투에 매우 강했지만 한족들을 자주 학살하고 당나라의 귀족과 당나라 황후 등을 무작위로 잡아 노비로 삼아 그 횡포함을 떨쳤다. 돌궐족 이극용이 날쌘 돌궐군을 보내 당나라 황제의 황후들을 모두 끌고가 첩으로 삼자 당나라 황제는 주전충에 붙게 되었고 주전충은 황제를 꼭두각시화하고 907년에 협박하여 선양을 받아 후량(국호는 단순히 양(梁)이었다. [후](後)의 글씨는 후세의 역사가들이 구별하기 위해 붙여진 것이다.)을 건국하였다. 이후 요나라의 야율아보기가 화북 전체를 정복하고 옛 당나라 수도였던 장안을 함락시켰다. 당 태종의 후손들은 거란족들에 의해 요나라의 수도로 끌려가 수치를 당하게 되었다. 이로써 당나라는 완전히 멸망했다.
주전충이 황제가 된 것을 인정하지 않고, 그를 따르려 하지 않았던 각지의 세력은 스스로도 황제를 자칭했다. 반면 후량과 대립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 화남의 여러 나라 중에는 후량에 대해 신하의 예를 갖춘 나라도 있었다.
주전충의 숙적이었던 돌궐족 이극용은 908년에 사망했고, 뒤를 계승한 돌궐족 이존욱(후당의 장종)은 후량에 맹렬한 공격을 시작했다. 후량측에서도 주전충의 실정과 추락이 심해 차례로 영토를 빼앗겼다. 거기에다 주전충이 후계자를 선택하는 것에도 실패해 내분을 초래했다. 이를 지켜본 이존욱은 연왕을 칭하던 유인공을 공격하여 그 나라를 병합했다. 자신감을 가진 돌궐족 이존욱은 923년 당 황제를 자칭하고 이후 후량의 수도를 함락시켜 당나라 황제 애재를 사로잡아 노비로 삼고 후량의 주우정을 자살시켜 후량을 멸망시켰다.
돌궐족 이극용은 돌궐족의 이름이 존재하나 기록에는 남아있지 않다. 이(李)씨 성은 공적에 의해 당나라로부터 국성(國姓)을 하사받은 것이었다. 이것을 이유로 장종은 당나라의 후계를 자칭하는 후량에 반대하여 후당을 건국하게 되었다. 후량을 멸망시킨 후, 뒤이어 기왕(冀王)을 자칭한 이무정, 사천을 지배한 전촉을 멸망시켜 영토를 확대했다. 그러나 장종은 장안의 한족들을 학살하고 낙양(洛陽)으로 천도, 주전충이 폐지했던 군대에 한족들을 거세하여 환관으로 만들어 감찰로서 파견하는 제도를 부활시켰다. 926년 돌궐 무장들이 돌궐족 이사원(후에 명종)을 옹립하였다. 이사원의 군이 낙양에 육박하자 금군(근위병)들에 의해 장종은 살해당했다.
새로 즉위한 명종은 한족 환관의 배제와 절약 등을 꾀하며 전국 토지의 검사를 실시하고 한족들을 노예로 삼아 돌궐인들에게 배분하는 등 돌궐족을 우대하는 노력하였고, 새로운 재무기관으로 삼사사를 창설했다. 또한 자신같은 유력군인에 의한 찬탈이 되풀이되지 않게 하기 위해 직속군인 시위친군을 창설해 금군의 강화를 꾀했다. 송나라에도 이어지게 된다. 명종은 오대의 나라들 중에 후주의 세종(시영)에 버금가는 명군이라 칭송받았다..
그러나 명종은 재위 6년(933년)만에 사망했다. 3남 이종후가 뒤를 이었으나 곧 양자인 이종가에 의해 찬탈되었다. 또한 이종가는 권력의 안정을 노려 명종의 사위이며, 실력자였던 돌궐족 석경당을 배제하기에 이른다. 석경당은 이에 대항했으나, 혼자 힘으로 대항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 북쪽의 거란에게 원조를 요청하고 그 대가로 연운십육주의 할양을 약속했다. 이에 응답해 거란의 태종 야율덕광은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여 후당군을 정복하였다.
936년 즉위하여 후진을 건국한 돌궐족 석경당(고조)은 요나라에게 신종하여 후진은 요나라의 위성국가였다. 중앙의 상황을 본 지방세력은 등을 돌려 남쪽의 오에게 넘어갔고, 반란을 일으키는 자들도 속출했다. 이 진압에 나섰던 고조는 942년에 병사했다. 후에 조카 석중귀가 제위를 이었는데 그의 즉위는 거란에 대한 강경파가 주도한 것이라 거란의 분노를 사게 되었다. 946년 거란(다음해 국호를 요나라라고 하였다)의 태종은 다시 친정에 나서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여 후진을 멸망시켰다. 요나라는 이때부터 중국을 지배하에 두려고 하였으나, 만족(蠻族)과 같은 이민족인 거란족에게 지배 당하는 것을 싫어한 개봉(開封,카이펑)의 한족들은 저항하였다.
이것을 방관했던 석경당의 예전 측근인 유지원은 자신의 임지였던 태원에서 947년에 즉위해 후한을 건국하고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여 947년 카이펑을 점령했다.
그러나 유지원은 다음해 사망하고, 차남 유승우가 뒤를 계승했다. 유제를 보필하게 된 측근들은 후한의 유력자들을 배제하는 데 노력하여 차례로 군인들을 주살했다. 반란 진압에 나섰기에 이를 모면한 추밀사의 곽위는 스스로도 숙청을 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느끼고 병사를 일으켜 카이펑을 점령하고, 자신을 주살하려던 측근들을 모두 없애버렸다. 그 후 한때 유승우의 사촌이었던 유빈을 옹립하였으나 생각을 고쳐 풍도를 시켜 유빈을 살해하고 스스로 즉위하여 후주를 건국했다. 유빈의 아버지 유숭은 북쪽에서 자립하여 북한을 건국하였다
10국중 가장 강력한 국가는 오라고 할 수 있다. 건국자인 양행밀은 양주(揚州)일대를 장악하고, 북쪽의 후량과 호각지세를 이룰 정도로 세력을 자랑했다. 그러나 오나라는 양행밀의 사후, 휘하의 서온(徐温)의 힘이 커지면서 최후엔 서온의 양자 서지고(徐知誥)에 의해 찬탈당한다. 서지고는 찬탈 후 이승이라고 이름을 바꿨고 남당을 세운다. 후세 역가사들에 의해 이 나라는 남당이라 불리게 되었다.
건국자인 전류(銭鏐)는 소금 밀매상의 신분에서 일어나 절강 일대를 장악했다. 북쪽의 강력한 오나라, 남당과 대치했기에 항상 화북의 오대의 나라들에게 신종하면서 오나라, 남당에게 대항했다.
오월의 남쪽 복건성지역에는 절도사 왕심지가 이 지역을 장악하고 민(閩)을 건국했다. 왕심지는 내정에 힘써 복건지역의 생산성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그러나 왕심지 사후 내분이 일어나 이 기회를 틈타 침략한 남당에 의해 945년 멸망하였다.
호북성에선 형남(남평), 호남성에선 초, 광동성에서는 남한이 할거했다. 형남은 10국 중 가장 최소국으로 주변 여러나라 전부에게 신종하여 교역의 중계점으로 번영을 누렸다. 초나라는 차의 교역으로 번영한 국가로 건국자 마은의 치세에는 경제적으로 부유했으나 사후 내분사태에 빠져 951년 남당에 의해 멸망당했다. 남한의 통치자 유씨는 아랍계로 알려져 있는데, 그의 궁정은 오대 십국의 전란속에서 유일하게 문관의 힘이 강했다. 그러나 후기에는 그의 정치도 몰락하고 환관정치로 변질되었다.
사천성은 양주와 함께 부유한 나라였기에 천부(天府)라 불렸다. 이곳에서 할거한 나라는 전촉, 후촉의 정권이었다. 전촉의 건국자 왕건은 원래 소금 밀매상이었으나 사천성에 들어와 이곳을 장악하고 이땅의 풍부한 산물을 바탕으로 문인의 보호와 경서의 인쇄를 진행하는 등 문화적인 정책을 실시했다. 전촉은 925년 후당에 의해 멸당한다. 그 후 이 땅에 부임한 무장 맹지상이 자립하여 후촉을 건국했다. 후촉도 전촉과 마찬가지로 문화진흥에 힘을 기울였고, 특히 당나라 말기부터 당대까지의 사(詞)를 모아 화간집(花間集)을 편찬한 것은 이 시대의 문화를 전하는 데 커다란 공헌이다.
오대왕조는 국내정세의 불안정에 더해서 거란 등의 외적이란 요소도 포함되어, 10국의 평정에 나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불안정하게 세력균형이 유지되어갔다. 다만 오대 최후의 왕조 후주가 형남, 남당의 영역을 잠식하기 시작하였고 거란의 지속적인 공격에 영토를 잃고 거란에 조공하게 되면서 이런 균형은 일거에 무너지게 되었다.
즉위한 태조 곽위는 내정에 뜻을 두고, 형벌의 완화와 자작농의 양성 및 세제의 불공평을 시정하는 등의 정책을 펼쳐 연이은 전란에 황폐화된 중원의 부흥에 나섰다. 이렇게 축적된 힘을 바탕으로 천하통일의 대망을 품게 된 이가 954년에 즉위한 시영(후에 세종)이었다. 세종은 오대의 국가중 가장 훌륭한 명군으로 칭송받았던 인물이다.
세종이 즉시 실시한 것은 자립성이 강한 군인들을 억누르는 것이었다. 군인들을 억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든 시위친군이 강대화되었기 때문에 이것을 분할하여 전전군(殿前軍)을 창설하였고, 이를 강화하여 절도사 및 금군사령관도 황제에게 대항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 병력을 바탕으로 남당, 후촉, 북한, 요나라등을 공격해 영토의 일부를 빼앗았다. 그중에서도 남당에게서 빼앗은 토지는 소금의 산지로서 가장 중요한 지역도 포함되었기에, 이 땅을 차지한 것은 남당의 생사여탈권을 장악한 것이라 말해도 좋은 것이었다.
또한 군사비를 모으기 위해 폐불운동을 진행했다. 중국에서는 삼무일종의 법난이라 일컫는다. 당시는 세금을 피하기 위해 비과세인인 승려로 가장하는 사람이 많았고, 이들을 가려내 징세를 실시한다면 막대한 수입이 들어오는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었다. 또 화폐를 주조하는 동이 부족했었기에 불상 등을 녹여 재이용해 [주원통보](周元通寶)라고 일컫는 동전을 주조하였다.
이렇듯 세종은 통일을 향해 착착 일을 진행해 갔으나 959년 원정에서 돌아오던 중 병사하고 말았다.
세종의 뒤를 계승한 사람은 겨우 7살의 시종훈이었다. 이 상황을 보고 북한은 요나라의 후원을 얻어 후주를 침공하였다. 이를 막기 위해 나선 인물이 세종의 제일 측근이었으며, 전전도점검(殿前都點檢;금군사령관)이었던 조광윤(후에 송나라 태조)이었다.
어린 황제를 모시고, 요나라와 싸우는 것에 불안을 느낀 군인들은 도중에 조광윤을 강제로 옹립하였다.(진교의 변) 수도에 돌아온 조광윤은 시종훈을 보호하며 선양을 받아 송나라를 건국하였다. 오대에서는 선양은 이렇듯 자주 일어났었고, 양위를 물려준 황제는 뒷날 일어날 역습을 우려해 죽이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조광윤은 시종훈을 죽이지 않았고, 시종훈의 자손은 남송의 멸망 때까지 두터운 보호를 받았다.
태조는 이때까지 군인이 정치를 맡았던 오대의 경향을 고치고 문치주의를 내세웠다. 과거의 정비 및 지방군대의 약체화와 중앙군의 강화, 절도사직의 무력화 등을 진행해 내부를 튼튼하게 한 태조는 후주 세종의 노선을 물려받아 통일에 대한 길을 걷기 시작했다.
즉 963년 중국대륙의 가장 중요한 요지라 할 수 있는 호북성의 형남을 합병했다. 그때 10국은 동서로 분열되어서 단결하여 송나라에 대항하는 것이 어려웠다. 뒤이어 965년에 사천성의 후촉을 병합하고 이땅의 풍부한 물산을 빼앗아 전쟁 비용을 보충하고 971년 광동을 지배하던 남한을 멸망시켰다. 그리고 975년 화남에서 최대세력을 자랑하던 남당을 멸망시키게 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북쪽의 북한과 남쪽의 오월뿐이었지만 태조는 당돌에서 병사했다. 이 죽음에 태조의 동생이며, 2대 황제 태종이 된 조광의에 의한 독살의혹이 있었다.(천극불결의 의) 태종은 태조의 방침을 이어받아 통일을 진행해 978년 오월을 멸망시키고, 979년 북한을 멸망시킴으로써 천하통일을 완성하였다. 당나라 멸망 후 약 70년 만의 일이었다.
-당 문화의 쇠퇴_도석인물화 쇠퇴<산수화의 발전> -정치, 종교 속박에서 벗어나 순수 예술로 발전 -산수화, 화조화의 독립적 발전 -수묵화의 발전: 객관적 묘사에서 주관적 표현으로 -형호<필법기> ▶️53년동안 세상이 혼란스러웠던 시기이다 한나라, 당나라 문화가 쇠퇴하면서 산수화가 발전하기 시작한다 목적이 있는 회화에서 감상용의 회화로 넘어오게되는 시기이다 이는 송나라에 꽃을 피우게된다 동양화 회화사 절정은 송나라때 이다 장르 특성상 인물의 배경에서 산수화가 또 다른 장르로 독립하게 되며 수묵화가 발전하게 된다 또한 사실에서 사의시대로 넘어오게되는 시기로서 이전에는 사실적인 표현을 중점으로 그렸지만 내뜻을 담아서 내 식대로 표현하는 자신의 생각을 담는 그림인 사의 시대로 넘어오게 된다 당나라때 불교에 심취했던 문인들 시와 서법이 들어오게되고 그림에 시를 지음 풍조도 이때부터 시작하게 된다 감상용회화의 수요가 증가하면서 화가들의 수또한 증가 하였다
1. 수묵 산수화의 본격적인 발전
: 북방산수양식(형호,관동) 강남산수양식(동원,거연)
▶️수묵산수화가 인물의 배경에서 발전하게 된다
문명의 중심이 북쪽이었을 때 북방산수중심으로 바위산이 많아 이전에는 북방산수의 그림이 발전했다 오대가 되면서 남방이라는 남쪽이라는 지역 위진남북조시대도 남쪽과 교류하면서 남쪽에 산수에도 관심을 갖게된다 남쪽은 대게 흙산으로 공간구성도 틀리고 생긴모양도 다르다 바위산(북방산수화)과 흙산(남방산수화)으로 나뉘게 되고 북방산수화를 잘그렸던 사람이 형호 관동이고 남방 산수를 잘그렸던 사람이 동원.거연 이었다
산수화에 발전에 있어서 풍부해지고 서로 다른모양대로 발전하게 됨으로써 이를 형관동거라고 하였다
1) 불교회화:관휴의 나한도
그림1, 2, 3
2) 인물화: 고굉중, 주문구
▲고굉중<한희재 야연도>
3) 화조화: 황전,황거채부자의 부귀체, 서희의 야일체
→황전부귀,서희야일
▶️황전의 화려하고 장식적인 채색화와 반대로 서희는 자유분방한 스타일 그림이다 화조화는 두가지 스타일로 부귀와 아일로 나뉜다 (부귀체/아일체)
<인물에서 산수의 시대로>
-이사훈과 오도자: 준법의 발명
-북방산수: 주산당당-중당식-거비파 산수
-남방산수: 일각, 일변산수
▶️남방식과 북방식으로 북방산수-주산당당(산수화를 그리는 정형적인 그림) 화면형식을 세로로 하여서 높은 산을 그리기에 좋았다 남방산수는 화면형식을 가로로 하였고 흙과 평야지대를 그렸다 물이 많다보니깐 구름 안개가 끼게 되고 남방산수는 안개의 표현이 많아진다
■형호
-필법기
-육요: 기,운,사,경,필,묵
-공간표현의 완비: 근경 중경 원경
▶️그림을 그리는 데 있어서 중요한 6가지 <육요: 기운사경필묵 >
기운생동으로 기.운 그중에 가장 중요한것은 필과 묵이다. 묵은 그동안 재료였기 때문에 그림에 있어서 밀려 났지만 중요한 요소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기운과 필묵의 문제이다
▶️산을 그렸지만 산수화가 모양을 갖추어 갈 때 어떻게 멋있게 그릴 것인가가 중요함 이때 근경.중경.원경 삼단의 구분을 통해서 웅대한 자연을 그려야한다고 곽희라는 사람이 발전을 시키면서 삼원법을 만들어낸다
※필에서의 묵의 변화를 제시함 기와 운으로 나누어서 세밀화함
※동양회화에 있어서 공간 구성
■형호 <관려도> 북방산수
형호, <匡廬圖>, 견본수묵, 185.8×106.8cm, 국립고궁박물원
▶️북방산수의 대표적인 양식 -거비파
▶️높고 거친산을 표현하는 산
■관동<북방산수>
관동, <秋山晩翠圖>, 견본수묵담채, 140.5×57.3cm, 국립고궁박물원
▶️산수화가 자리잡기 실작할 때 형호가 나오고 관동이라는 제자가 형호의 필법을 이어받아서 더욱더 발전시킴
■동원<남방산수>
동원, <瀟湘圖>, 약 950년, 비단에 수묵담채, 북경 고궁박물원
▶️비단에 수북담채 -평담하고 꾸밈없는 천지한 산수
▶️북방과 남방 흙과 동산 산의 모양을 포괄할 수 있는 형식
※겸재정선-우리나라 산수를 우리나라 식으로 표현함 북방식산수와 남방식 산수를 한국화해놓음 (강렬함과 은근한 산수) 대표적인 그림-금강전도 기본적인 원형
■거연 거연, <秋山問道圖>, 비단에 수묵, 국립고궁박물원
▶️동원의 제자 -거연 스님
▶️물안개표현이 뛰어나고 동원의 그림을 계승함
▶️중단식 발묵. 반두(머리두 - 자신만의 산을 표현하는 방식)
십국 이외 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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