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사의 난
당나라 시기에 일어난 대규모 반란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안사의 난(安史之亂, 영어: An Lushan Rebellion)은 755년 12월 16일부터 763년 2월 17일에 걸쳐 당나라의 절도사인 안록산, 부하인 사사명과 그 자녀들이 일으킨 대규모 반란이다. '안사의 난'이란 안록산과 사사명의 첫글자를 따서 지은 이름으로 안녹산의 난 또는 천보의 난(天寶之亂)이라고도 한다. 안녹산은 나라 이름을 연(燕)으로 하고 스스로 황제(稱帝)라고 선포하고서 9년간 지속했다. 이 기간 동안 당나라의 인구는 3600만명이나 줄었다.[1] 위구르족에 의해 진압되지만, 위구르에 의해 장안은 황폐해진다.
안사의 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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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을 가는 현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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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카를룩 | 연나라 | ||||||
지휘관 | |||||||
당 현종 |
안록산† 안경서† 사사명† 사조의† | ||||||
병력 | |||||||
약 60만 명 ~ 70만 명 | 약 20만 명 ~ 30만 명 | ||||||
피해 규모 | |||||||
불명 | 불명 | ||||||
당나라의 지방통제력 약화 및 중앙아시아 주도권 상실. |
반란은 천보 14년(755년)에 시작되었다. 12월 16일(음력 11월 9일), 범양절도사 안록산은 군대를 일으켜 남하하기 시작했다.[2] 안록산은 아들 안경서에 의해 암살될때까지 2년 동안 반란을 이끌었다. 안경수가 안록산의 군대를 이어받고 2년 후, 사사명은 안경수를 살해하고 군부를 찬탈했다. 사사명 역시 2년 동안 이들을 지휘했지만 이후 아들 사조의에 의해 암살당하고 찬탈당했다. 사조의는 763년 2월 17일 당나라에 함락될 때까지 2년을 더 통치했다.[3] 혼란을 틈타 소그디아 및 기타 세력들 역시 당에 반기를 들었다. 안사의 난은 이 반란 일체를 부르는 용어이다.
안사의 난은 중세 중국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는데, 군사 활동과 이와 관련된 전투 사망으로 기근, 인구 이동, 대규모 기반 시설 파괴 등으로 인한 인구 손실이 크게 발생하여 당 왕조가 크게 약화되었고, 당나라 황제들의 천왕(天王)으로서의 위신이 무너졌으며 서역(西域)의 영구적인 상실로 이어졌기 때문이다.[4] 비록 반란이 황조, 의병, 외부의 지원 등 대규모 연합군에 의해 궁극적으로 진압되었지만, 왕조는 군부의 구조를 개편하지 않고 점령지의 통치방식은 이전의 것을 고수하였다.[4] 이는 당 왕조 쇠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말기에 지역 군벌 분리주의가 만연한 원인이 되었다. 이로써 당의 멸망 이후 수십 년 동안 오대 십국 시대가 이어졌다.
오대 십국 시대가 끝난 뒤에도 당 말기의 군벌 세력 난립은 이후 통일왕조들에게도 트라우마가 되었다. 일례로, 송나라는 요나라, 서하, 금나라 등의 침략을 받았을 때도 주요 군 지휘관들을 불신하고 그들에게 충분한 권한을 주지 않았다. 또한 적어도 한나라 이후 중국의 정치적, 경제적 중심지였던 관중이 쇠퇴하여 중국의 경제 중심지가 강남 지역으로 이동하는 원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