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독일과 미국의 물리학자 (1879–1955)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알베르트 아인슈타인(독일어: Albert Einstein, [ˈalbɛʁt ˈʔaɪnʃtaɪn]; 영어 발음: /ǽlbərt áinstain/;[4] 1879년 3월 14일~1955년 4월 18일)은 독일 태생의 이론물리학자로서[5]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물리학자 중의 한 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상대성 이론을 개발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양자역학 이론의 발전에도 중요한 공헌을 했다. 상대성 이론은 양자역학과 함께 현대 물리학의 두 기둥이다.[1][6] 상대성 이론에서 나온 그의 질량-에너지 등가식 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방정식"으로 불린다.[7] 그의 작업은 과학 철학에 미친 영향으로도 유명하다.[8][9] 그는 1921년 "이론 물리학에 대한 공로, 특히 광전 효과 법칙의 발견"[10]으로 양자 이론 발전의 중추적인 단계에 대한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11] 그의 지적 업적과 독창성은 "아인슈타인"이 "천재"와 동의어가 되는 결과를 낳았다.[12]
'기적의 해(annus mirabilis)'로 묘사되는 1905년에는 4개의 논문을 발표했다.[13] 이 논문들은 각각 광전 효과와 브라운 운동을 설명하고, 특수 상대성이론과 그에 기반한 질량-에너지 등가성을 설명한다. 특수 상대성이론은 시간과 공간에 관한 개념을 일부 수정함으로써 고전역학과 전자기학을 조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다음으로 그는 1915년 자신의 특수 상대성이론을 확장하여 중력을 기하학적으로 설명하는 일반 상대성이론을 발표, 1917년에는 일반 상대성이론에 근거하여 우주의 구조와 진화를 연구하는 현대 우주론의 기반을 마련하였다.[14][15] 그는 통계역학과 양자 이론의 문제를 계속 다루었고, 이는 입자 이론과 분자 운동에 대한 설명으로 이어졌다. 또한 빛의 열적 특성과 빛의 광자 이론의 기초가 된 복사의 양자 이론을 연구했다.
한편 그의 후반부 연구 경력 대부분은 두 가지의 궁극적으로 실패한 시도에 집중되어 있다. 첫째, 그는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말을 통해 새로운 양자 역학에 대하여 코펜하겐 해석이 과학에 본질적인 무작위성을 도입하는 것을 강하게 반대하고 숨은 변수 해석, 앙상블 해석, EPR 역설 등을 제시했다.[16] 둘째, 자신의 기하학적 중력 이론을 전자기학을 포함하는 방식으로 일반화함으로써 통일장 이론을 고안하려 시도했다. 이러한 상황이 고착화됨에 따라 그는 현대 물리학의 주류에서 밀려나고 점차 학계에서 고립되었다.
아인슈타인은 독일 제국에서 태어났지만 1895년 스위스로 이주하여 이듬해 (뷔르템베르크 왕국의 시민으로서)[노트 1] 독일 시민권을 포기했다. 1897년, 17세의 나이로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교의 수학 및 물리학 교직 과정에 입학하여 1900년에 졸업했다. 1901년에 스위스 시민권을 취득하여 평생 유지했으며, 1903년 그는 베른에 있는 스위스 특허국 사무소에서 정규직을 확보했다. 1905년에, 그는 취리히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14년에, 아인슈타인은 프로이센 과학 아카데미와 훔볼트 대학교에 합류하기 위해 베를린으로 이주했다. 1917년, 아인슈타인은 카이저 빌헬름 물리학 연구소의 소장이 되어, 이번에는 프로이센인으로 다시 독일 시민이 되었다.
1933년, 아인슈타인이 미국을 방문하는 동안 독일에서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했다. 아인슈타인은 새로 선출된 나치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여;[17] 미국에 정착하여 1940년에 미국 시민이 되었다.[18] 제2차 세계 대전 직전에 그는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잠재적인 독일 핵무기 프로그램에 대해 경고하고 미국이 유사한 연구를 시작할 것을 권고하는 편지에 서명했다. 아인슈타인은 연합국을 지지했지만 일반적으로 핵무기 아이디어를 비난했다.[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