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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리아 집단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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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리아 집단학살(아람어: ܩܛܠܐ ܕܥܡܐ ܐܬܘܪܝܐ 켈마 암마 아우라야)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오스만 제국군과 일부 쿠르드족이 아나톨리아 남동부와 페르시아 아제르바이잔 지방에서 아시리아인/시리아 기독교인을 대량 학살하고 추방한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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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리아인들은 시리아 정교회, 아시리아 동방교회, 칼데아 가톨릭교회 등 서로 적대적인 교회로 나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전에 이들은 오스만 제국의 산악 지대와 외딴 지역에 살았다(일부는 사실상 무국적자였다). 아시리아인들의 폭력과 위험은 제국의 19세기 중앙집권화 노력에 의해 증가했다.
아시리아 집단학살은 1915년 1월부터 5월까지 오스만 제국이 아제르바이잔을 점령하는 동안 시작되었으며, 이 기간 동안 오스만 군대와 친오스만 쿠르드족에 의해 학살이 자행되었다. 비틀리스 지방에서는 페르시아에서 돌아온 오스만 군대가 현지 쿠르드족 부족과 합류해 현지 기독교인(아르메니아인과 아시리아인)을 학살했다. 오스만 군대와 쿠르드족은 1915년 중반에 아시리아의 하카리 부족을 공격했고, 부족들이 협력적인 군사 방어를 구축했음에도 불구하고 9월에 그들을 몰아냈다. 주지사 메메드 레시드는 시리아 기독교인을 포함해 디야르베키르 지방의 모든 기독교 공동체를 학살했으며, 투르 압딘 일부 지역에서는 산발적인 무력 저항에 직면했다. 훨씬 남쪽에 사는 오늘날 이라크와 시리아의 오스만 아시리아인들은 학살의 대상이 아니었다.
아시리아 집단학살은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과 동시에 일어났고, 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지만, 아시리아 집단학살은 덜 체계적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오스만 정부보다 현지 행위자들의 역할이 컸지만, 후자는 특정 아시리아인들에 대한 공격을 명령하기도 했다. 살해 동기에는 일부 아시리아 공동체들 사이에서 오스만 제국에 대한 충성심 부족, 이들의 땅을 차지하려는 욕구가 포함되었다. 1919년 파리 강화회의에서 아시로-찰드 대표단은 인명피해만 25만 명(전쟁 전 인구의 약 절반)이나 된다고 발표했는데, 이 수치의 정확성은 알 수 없다. 이후 1923년 로잔 회의에서 사망자 수를 27만 5천 명으로 추산하는 것으로 수정했다. 아시리아 집단학살은 아르메니아인 집단 학살보다 더 적게 연구되었다. 1990년대부터 아시리아 디아스포라가 주도하여 해당 사건을 집단 학살로 인정받으려는 노력이 시작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아시리아인들이 집단 학살의 피해자였음을 인정하는 국가들이 여럿 있지만, 튀르키예 정부는 이 주장을 부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