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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쿠라 시대 초기에 권세를 떨친 무라카미 겐지 적류의 내대신 미나모토노 미치치카의 자손이다.미치치카의 4내대신 츠치미카도 사다미치를 가조로 한다. 사다미치의 자손인 태정대신에도 오른 사다자네를 시작으로, 무로마치 시대 초기까지 청화가의 가격을 유지했지만, 무로마치 시대 중기에 아리미치가 요절하면서 절가 되었다.
미치치카의 장남 미치무네나 6남 미치유키도 츠치미카도를 표방하고, 특히 미치무네가 죽은 후, 고사가 천황의 외할아버지로써 좌대신에 추증되었지만, 가마쿠라 시대에 절가되었다.
<아베씨#음양도 아베씨>도 참고 바람
헤이안 시대의 음양사 (천문박사) 아베노 세이메이를 가조 (실질적 시조)로 하는 아베씨 적류 일족의 후예로, 조정에 출사하는 공가이다. 가격은 반가이고, 메이지 이후에는 화족으로 자작에 올랐다.
대대로 음양도 (게다가 천문도)를 가학으로 삼고, 아베씨 적류로써, 아베씨 씨장자를 대대로 지냈다. 아베씨는 무로마치 시대의 다른 공가와 마찬가지로 본성이 아닌 "츠치미카도"를 가명(성)으로 칭하게 된다. 일반적으로는 무로마치 시대의 당주 아베노 아리요가 츠치미카도로 칭한 최초의 인물이라는 설도 있지만, 실제로는 무로마치 시대 중기부터 전국 시대의 당주였던 아리노부부터 정식으로 츠치미카도 라는 가명을 쓰게 되었다.
오닌의 난 이후로, 전란을 피해 아리노부 이후 4대에 걸쳐 와카사국 남부의 오뉴군 나타쇼(현재의 후쿠이현 오이군 오이정)으로 이주했다. 와카사는 당시 동군의 부장을 지낸 막강한 슈고 다이묘 다케다씨의 슈고국이었기고, 비호를 받기 위해 수도의 공경들이 다수 하향해서 번영하고 있었다. 에도 시대 초기에 츠치미카도 히사나가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령으로 완전히 교토로 돌아와, 고쇼 주변의 쿠케쵸가 아닌 우메코우지에 연구소 겸 대규모 저택을 지었다. 천황 즉위나 세이타이쇼군 선하 의식때에는 천조지부제라는 기도를 올렸다,
에도 시대 중기의 당주 츠치미카도 야스토미 (1655년 ~ 1717년)은 덴나 3년 (1683년), 전국의 음양사의 지배・임명권을 츠치미카도가 독점을 성공해, 츠치미카도가는 유일한 음양도 종가로써 전성기를 맞이한다. 이후, 음양두는 츠치미카도가가 독점하게 된다. 이어, 야스토미는 신토가 야마자키 안사이에게 사사해, 음양도에 신토를 융합한 츠치미카도 신토를 창설한다. 이후, 음양사 등 각종 면허장을 얻기 위해서는 츠치미카도가의 문하생이 되는 것이 필수 요소가 되었다.
츠치미카도 야스토미는 에도 막부의 명을 따라 시부카와 하루미가 착수했던 개력계획 (改暦計画, 이른바 조쿄개력)에도 참여하고, 완성 시에는 음양두의 지위를 가지고 막부 주도로 작성된 신력법을 조정에 주청하여 인가를 받았다. 당시의 달력가였던 코토쿠이가 (카모씨 자손)의 몰락도 겹쳐, 츠치미카도가는 음양료가 소관하고 있던 "음양 (점복)" "천문" "달력"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분야를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아울러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츠치미카도가는 음양사 등의 임명권도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 권력(권리)는 매우 커졌다.
츠치미카도가는 실질적으로 막부 말기의 당주 츠치미카도 하루오 (분세이 10년 (1827년) ~ 1869년 (메이지 2년))을 마지막으로 메이지 이후에는 음양도와 천문학을 공적으로 계승하는 가문이 아니게 되었다.
1869년에 화족에 올랐고, 1884년에 화족령이 내려져 5작제가 발족되면서, 하루오의 양사자 하레나가 (안세이 5년~6년 (1859년) ~ 1915년 (다이쇼 4년)이 자작에 올랐고, 귀족원 의원도 지냈다.
전후, 옛날의 츠치미카도가의 지행지였던 후쿠이현 오뉴군 나타쇼촌 (현재의 오이군 오이정 나타쇼)에 종교법인 「텐샤츠치미카도 신토 본청」을 두어, 당시의 당주 츠치미카도 노리타다 (土御門範忠, 1920년 (다이쇼 9년) ~ 1994년 (헤이세이 6년))이 관장을 맡고 있었지만, 노리타다가 1994년 (헤이세이 6년)에 사망한 후, 츠치미카도가는 츠치미카도 신토에 일절 관여하지 않는다. 당대 츠치미카도 신토의 대표 (텐샤츠치미카도 신토 본청장)은 옛 가신의 후예가 되어, 츠치미카도가의 후예가 아니다.
또한, 아베노 세이메이의 남계 혈통은 우다 겐지 아야노코지가의 자식이자, 아베씨 서류 쿠라하시가의 양자가 된 쿠라하시 아리코토 (倉橋有儀, 1738년 ~ 1784년)와 그의 아들이자 츠치미카도가의 양자가 된 츠치미카도 야스히데 (土御門泰栄, 1758년 ~ 1806년)의 대에서 단절되어, 현재의 츠치미카도가・쿠라하시가의 당주는 어느 쪽이나 거듭 양자 상속이 반복된 결과, 전국 시대의 당주 츠치미카도 아리나가와 세어보면 네번이나 여계 혈통을 거친 먼 친척이 되었다. 2020년 (레이와 2년), 현재 남아있는 츠치미카도의 후예로서는 현재 마지막 남성 당주인 츠치미카도 노리타다의 딸, 츠치미카도 요시코 (土御門善子, 1959년 (쇼와 34년) ~ ) 단 한사람 뿐이고, 다른 자손들과도 연락이 끊겼고, 보리사인 바이린지(梅林寺)의 무덤도 보존 상태가 나빠지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츠치미카도 아리나가#후예> 및 <츠치미카도 히사나가#후예>를 참고 바람
국립역사민속박물관의 『구고구령취조장 데이터베이스(旧高旧領取調帳データベース)』에서 산출된 막말의 츠치미카도가의 영지는 아래와 같다. (5개 마을・186석 6두)
남북조시대의 야나기와라 스케아키라 (야나기와라가의 조상)의 아들인 야스미츠를 조상으로 하는 공가이다. 야스미츠와 아들 스케이에는 권대납언에 올랐다.
그러나, 카키츠 원년 (1441년) 7월, 스케이에의 아들인 토노벤 나가미즈가 출가하여 카라하시 아리토요의 아들은 유자(양자와 비슷하지만 더 앝은 관계)로 맞이하여 가독을 물려주려고 했는데, 종가인 히노가를 비롯한 일문의 제가가 스가와라씨계의 카라하시가의 유자를 반대한 것을 계기로, 조정의 논의는 분열되어 무로마치 막부도 이에 개입, 최종적으로는 고하나조노 천황의 칙재에 의해 6곳의 소령을 모두 몰수 당했고, 1개소는 카라하시 아리토요의 아들에게 주어졌으며, 나머지 5곳은 나카미카도가・요츠츠치가 (대신, 토우인가와 소령 교환됨) 등으로 5분할되어서 다른 가문에게 다시 주어져서, 절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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