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 시황제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진 시황제(중국어: 秦始皇帝, 병음: Qín Shǐ Huáng Dì, 기원전 259년 1월 ~ 기원전 210년 음력 6월 14일)는 전국 칠웅 진나라의 제31대 왕이자 제1대 황제로, 세계 최초의 황제이다. 성은 영(嬴), 씨는 조(趙)·진(秦)[1], 이름은 정(政)이다.
이 문서에는 여러 문제가 있습니다. 문서를 편집하여 수정하시거나 토론 문서에서 의견을 나눠주세요.
|
시황제 始皇帝 | |
---|---|
진 황제 | |
재위 | 기원전 220년-기원전 210년 9월 10일 |
후임 | 이세황제 |
진왕 | |
재위 | 기원전 247년 5월 7일-기원전 220년 |
전임 | 진 장양왕 |
후임 | (칭제) |
이름 | |
휘 | 정(政, 正) 또는 영(榮) |
묘호 | (없음) |
시호 | (없음) |
능호 | 여산릉 |
신상정보 | |
출생일 | 기원전 259년 2월 18일 |
출생지 | 조 한단 |
사망일 | 기원전 210년 9월 10일 |
사망지 | 진 사구(沙丘; 오늘날의 허베이성 핑샹현) |
국적 | 진나라 |
가문 | 영(嬴)성 조(趙)·진(秦)씨 |
부친 | 진 장양왕 |
모친 | 조희 |
배우자 | 조황후(趙皇后) |
자녀 | 장남 부소 공자 고 공자 장려 말자 호해 등 |
능묘 | 여산릉 |
사마천(司馬遷)은 진본기(秦本紀)에서 시황제(始皇帝)가 전쟁, 통일, 축조, 국정, 인사를 직접 처리하는 능력이 있었으며 토착 귀족 세력과 신하의 조언을 판단하는 시각이 뛰어난 완벽한왕(王)이었다고 평했다.
기원전 246년부터 기원전 210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기원전 246년부터 기원전 241년까지 여불위가 섭정을 하였고 기원전 241년부터 기원전 210년 붕어할 때까지 친정을 하였다. 불로불사에 대한 열망이 컸으며, 대규모의 문화 탄압 사건인 분서갱유를 일으켜 수 양제와 더불어 중국 역사상 최대의 폭군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도량형을 통일하고 전국 시대 국가들의 장성을 이어 만리장성을 완성하였다. 분열된 중국을 통일하고 황제 제도와 군현제를 닦음으로써, 이후 2천년 중국 황조들의 기본틀을 만들었다. 전근대의 중국에서는 특히 유학 관료들에 의하여 폭군이라는 비판을 계속 받았으나, 오늘날 중국에서는 병마용 발굴 이후부터[출처 필요] 시황제의 진취성과 개척성에 초점을 맞추어 재평가하려는 시도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정은 상방 여불위마저 제거하면서 마침내 진나라 최고의 실세로 떠올랐으며 잠시나마 실추되었던 왕권을 회복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자신을 평생토록 보좌할 이사를 만났고, 그와 더불어 군사를 일으켜 소양왕이 쌓은 기반으로 나머지 6국을 통일할 계획을 세웠다. 우선 정은 모사인 울요의 주장대로 6국의 대신들을 미리 매수하고, 6국 사이를 이간질했는데, 이는 실제로도 상당한 위력을 발휘하였다. 조나라의 간신 곽개 등이 명장 이목의 활동을 저지하여 진군은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싸울 수 있었고, 6국이 서로를 믿지 않아서 도우려 하지 않게 되었다.
이후 정은 본격적으로 전쟁을 벌여서 진나라와 인접했던 국가들, 즉 삼진(한•위•조)부터 공격하기 시작했는데 기원전 230년에 한나라를 장군 등이 멸망시켰고, 그 다음에는 삼진 중에 가장 강했기에 동방 진출을 위해 반드시 무너뜨려야 했던 조나라를 기원전 228년 장군 왕전이 수도 한단을 함락시켜 멸망시켰다. 기원전 225년에는 왕전의 아들 왕분이 위나라를 수공으로 쳐서 대량을 함락시키고 멸망시켰다.
그 뒤 이신의 주장대로 20만의 군사로 초나라를 공격하였으나 초나라의 명장 항연에게 격파당하자, 노장 왕전의 주장을 받아들여 진나라의 총전력인 60만 대군으로 다시 공격해 기원전 223년에 초나라를 멸망시켰다. 궁지에 몰린 항연은 결국 자결로서 생을 마감했다. 《사기》에 의하면 당시 초나라의 군사도 40만 명이였다고 하는데 이는 사실로 보인다. 다만 진나라만큼의 중앙 집권력이 없었고, 각 귀족들의 사병이라는 성격이 강했기에 진나라에게 패배한 것으로 보여진다.
한편 정의 조나라 볼모 시절 친구였고, 진나라의 볼모였다가 탈출한 연나라 태자 단(丹)은 진나라의 이런 정복 활동을 우려해서 형가를 보내어 정의 암살을 시도했다 실패하고, 격노한 정은 이를 빌미로 연나라를 맹공했다. 동북 변경인 요동까지 도망간 연나라 왕 연희는 아들 연단의 목을 잘라서 바치면서까지 용서를 빌었으나, 정은 거부하고 집요하게 추격해서 왕분이 연나라 왕을 사로잡아 서주 창건때부터 이어져 온 연나라는 기원전 222년에 완전히 멸망하였다. 그리고 기원전 221년에 제나라를 쳐서 왕분이 제나라 왕 전건의 항복을 받아내 멸망시켰다. 이리하여 재위 27년인 39살에, 정복을 시작한지 약 10년 만에 정은 광활한 중국 대륙을 통일하는 엄청난 위업을 달성하게 되었다.
다만 엄밀히 말하면 시황제는 모든 중국을 통일하진 못했다. 왜냐하면 전국시대가 끝난 후에도 엄연히 위(衛)나라가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시황제는 어떤 이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스스로 위(衛)를 야왕(野王)으로 옮겨놓고도 끝까지 멸망시키지 않았고, 2대 황제인 호해가 위의 마지막 군주 각을 서민으로 만들면서 완전히 멸망시켜 버린다.
중국 북쪽에는 흉노족들이 살았는데 이들의 땅은 농사짓기 힘든 곳이어서 추수할 때가 되면 진나라로 쳐들어와서 곡식들을 약탈했다. 그래서 이들을 막기위해 진나라 북쪽의 성벽들을 이어붙여서 만리장성을 건축하게 됐고, 덕분에 흉노족들을 막을 수 있었다.
그 흔적이 시안의 북쪽, 오르도스 지역의 중간쯤에 위치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