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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1995년 사이 크로아티아에서 독립을 선포한 세르브인의 준국가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세르보크로아트어: Република Српска Крајина / Republika Srpska Krajina 레푸블리카 스르프스카 크라이나[*], 발음 [rɛpǔblika sr̩̂pskaː krâjina], 약칭 RSK) 또는 주령서 세르비아 크라이나(세르보크로아트어: Српска Крајина / Srpska Krajina)는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에서 독립한 크로아티아에서 분리독립을 선언한 국가로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1991년~1995년) 기간 존속한 세르브계 크로아티아인의 준국가이다.[1][2] 국제사회에서는 어떤 국가에게도 인정받지 못했다. 크라이나라는 단어는 19세기 후반까지 합스부르크 군주국(오스트리아-헝가리)에서 세르브인이 다수 거주했던 역사적인 행정구역인 군정국경지대에서 온 말이다. 세르비아 크라이나 정부는 크로아티아로부터 세르브인 민족의 독립을 달성하고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및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분리독립한 스릅스카 공화국과의 통일을 목표로 전쟁을 벌였다.[3]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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Република Српска Крајин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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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어 | 단결만이 세르브인을 구할 수 있다 | |||
국가 | "정의의 신" | |||
1991년 독립을 선포한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의 영역 | ||||
수도 | 크닌 | |||
정치 | ||||
정치체제 | 이원집정부제 공화국 | |||
대통령 1991년 ~ 1992년 1992년 ~ 1993년 1993년 ~ 1994년 1994년 ~ 1995년 | 밀란 바비치 고란 하지치 밀란 바비치 밀란 마르티치 | |||
입법부 |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 의회 | |||
지리 | ||||
1991년 어림 면적 | 17,028 km2 | |||
인문 | ||||
공용어 | 세르비아어 | |||
경제 | ||||
통화 | 크라이나 디나르 (1992년~1994년) 유고슬라비아 디나르 (1994년~1995년) | |||
종교 | ||||
종교 | 세르비아 정교회 |
크라이나 정부는 크로아티아 영토의 중앙 부분 상당수를 통제했으나 외곽 지역 통제는 군사 작전의 성패에 따라 많이 달라졌다. 법적으로는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의 영토에 유엔 보호군(UNPROFOR)이 진주해 보호했다.
1995년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은 크로아티아군의 대공세인 플래시 작전과 폭풍 작전에 따라 영토 대부분을 상실하면서 사실상 해체되었고, 동슬라보니아 지역의 잔존국은 1995년 맺어진 에르두트 협정에 따라 1998년까지 유엔 동슬라보니아 바라냐 서시르미움 과도행정기구(UNTAES)라는 이름의 과도기구로 유엔이 임시로 통치했으며 이후 크로아티아로 평화롭게 통일되며 사라졌다.
크라이나(Krajina, '국경'이란 뜻)라는 단어는 합스부르크 군주국이 오스만 제국의 확장에 맞서 방어하기 위해 1553년에서 1578년 사이 크로아티아와 슬라보니아의 일부 왕관령에 세워진 개척지대인 군정국경지대에서 유래했다.[4] 이 지역의 인구는 주로 오스만 제국(오스만령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와 오스만령 세르비아)의 인근 지역에서 이주한 세르브인, 크로아트인, 블라흐인으로[5][6][7] 이들은 오스만 제국과의 싸움에서 필요한 주둔군 외에도 일반 인구를 늘리고 보충하는 데도 도움을 주었다. 오스트리아는 빈에 있는 군사령부에서 국경지대롤 통제했으며 전쟁으로 황폐화된 지역에 정착민 이주를 장려하기 위해 몇 가지 특별한 권리를 부여했으나 이곳을 왕관령으로 만들진 않았다. 군정 폐지는 1869년에서 1871년 사이에 이루어졌다. 1867년 5월 11일, 세르브인을 크로아티아의 일원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사보르는 "삼위왕국은 그 안에 거주하는 세르브인을 크로아티아 국가와 동일하고 동등한 민족으로 인정한다"고 선포했다. 그 후 국경지대는 1881년 8월 1일 크로아티아의 부왕 라디슬라브 페야체비치가 자그레브 총사령부의 군정령을 인수하면서[8] 합스부르크령 크로아트-슬라본 왕국으로 흡수되었다.[4]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이전의 군정국경지대였던 곳은 대부분이 오래된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와 함께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사바 바노비나 행정구역으로 편입되었다. 양차 대전 사이 크로아티아와 슬라보니아 크라이나의 세르브인은 보산스카크라이나나 세르비아의 기타 지역 세르브인과 함께 스베토자르 프리비체비치가 이끄는 독립민주당이라는 유명한 주목할 만한 정당을 세웠다. 새로 수립된 유고슬라비아에서는 서로 다른 정치적 비전 때문에 크로아트계와 세르브계 사이에 많은 긴장이 존재했으며 크로아트인 지도자였던 스체판 라디치가 의회에서 암살당하고 세르브계가 보안국 조직을 장악하며 탄압하면서 크로아트인의 자치 운동이 절정에 달했다.
1939년에서 1941년 사이에는 초기 유고슬라비아에서 크로아트인과 세르브인 사이의 정치적, 사회적 적대감을 해소하기 위해 구 국경지대 외에도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 지역까지 합쳐진 크로아트인의 자치 왕국인 크로아티아 바노비나 자치령이 세워졌다. 하지만 1941년 추축국이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했고 이 여파로 오늘날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전체와 세르비아의 동시르미아 지역을 포함한 크로아티아 전역에 크로아티아 독립국이 세워졌다. 독일은 (1934년 유고슬라비아의 알렉산다르 1세 국왕을 암살했다는 혐의를 받은) 우스타샤를 크로아티아 독립국의 새 통치자로 임명했고 우스타샤 정부는 곧바로 세르브인, 유대인, 반정부 크로아트인을 향한 대량학살 정책을 펼쳐 30만명 이상이 사망했다.[9][10] 이 기간 크로아트인 각각은 집권중인 정부나 공산주의 반파시즘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을 중심으로 뭉쳤다. 크닌 지역의 세르브인은 주로 체트니크에 합류했으며 바노비나나 슬로바니아 지역 세르브인은 주로 파르티잔에 합류했다. 여기서 세르브인의 체트니크는 리카와 달마티아고원 북부를 중심으로 크로아트인을 향해 여러 학살과 잔학 행위를 벌였다.[11]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공산당이 지배하는 파르티잔이 득세하면서 크라이나 지역은 크로아티아 인민공화국 지역이 되었으며 이후 1963년 4월 7일 연방공화국이 개편되면서 크로아티아 사회주의 공화국(SR 크로아티아)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요시프 브로즈 티토는 크로아티아의 봄과 같은 다른 운동과 함께 자치를 주장하는 정치조직을 전부 탄압했으나, 1965년과 1974년 개정 유고슬라비아 헌법에서는 SR 크로아티아의 세르브인을 포함한 소수민족에게 많은 권리를 부여했다.
1991년 크로아티아의 독립 선언과 함께 등장한 세르비아의 "크라이나"는 세 가지 종류의 영토를 포함하게 된다.
역사적인 군정국경지대는 대부분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 외곽 지역이며 대부분 크로아트계 다수 지역으로 여기에는 슬라보니아 중부와 동남부를 포함한 벨로바르를 중심으로 한 지역과 리카 지역도 포함된다.
크로아티아 내 세르브계 인구 밀집 지역은 1980년대 후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가 이끄는 세르비아 민족주의운동의 주요 관심 지역으로 떠올랐다. 1986년 9월 세르비아와 세르브인의 지위에 대한 세르비아 과학 예술 아카데미 각서 비망록이 세르비아 신문에 일부 유출되었다. 이 비망록에서는 코소보의 상황이 대량학살이라고 주장하고 유고슬라비아 연방에 대해 일련의 불만을 나열하고 크로아티아 정부의 세르브인 차별 문제에 대해 불평했다. "크로아티아 내 세르브인이 지금처럼 위협을 받은 시절은 크로아티아 독립국 시기정도 밖에 없다"는 주장도 내세웠다.[12] 밀로셰비치 충성파가 반관료제적 혁명을 일으켜 보이보디나와 몬테네그로 정부가 붕괴되고 1989년에는 코소보와 보이보디나의 자치주 지위가 폐지되면서 긴장이 더욱 고조되었고 밀로셰비치는 유고슬라비아의 대통령직 8표 중 4표를 얻으며 대통령직 내 모든 결정을 막을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1989년에는 크로아티아에서 세르비아의 압력으로 세브르계 민족주의자 집회가 여러 차례 열렸다. 1989년 7월 8일에는 크닌에서 대규모 민족주의 집회가 열렸는데 이 집회에서 유고 인민군의 크로아티아 개입을 위협하는 현수막과 체트니크의 상징물이 전시되어 크로아티아 국민들은 이에 놀랐다.[13] 1990년 선거에서 친독립파의 승리로 크로아티아 내 소수민족인 세르브계가 밀로셰비치의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상황이 더욱 긴장되었다. 당시 세르브인은 크로아티아 인구의 약 12.2%(581,663명)을 차지했다.[14]
1990년 4월 크로아티아의 대통령으로 선출된 프라뇨 투지만이 독립 크로아티아의 건설을 향해 노골적으로 나아가자 세르브인은 프라뇨의 투지만에 대해 점점 더 반대했다. 1990년 5월 30일 요반 라슈코비치의 세르브인 민주당(SDS)은 크로아티아 의회와의 모든 관계를 단절했다. 이듬해 6월 크닌에서 세르브인 민주당이 주도하는 세르브계가 북달마티아와 리카 지방의 자치단체 연합의 설립을 선포했다. 1990년 8월에는 세르브계가 크로아티아로부터의 분리독립을 표출하기 위해 남부 전역의 도로에 통나무 바리케이드를 쌓는 통나무 혁명을 시작했다. 이 때문에 달마티아 해안 지역과 나머지 지역이 분리되어 크로아티아가 사실상 둘로 분열되었다. 1990년 12월 제헌된 크로아티아의 헌법에서는 세르브인이 "구성원"에서 이탈리아인, 헝가리인과 같은 "국가 내 소수민족"으로 격하되었다. 나중에 일부에서는 크로아티아가 여전히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법적 통치 아래 있었으므로 크로아티아 신헌법이 1974년 유고슬라비아 헌법과 모순된다고 주장해 세르브인의 독립국을 정당화했으나 이는 크로아티아 헌법보다 3개월 전에 먼저 공표된 세르비아 헌법에서도 1974년 연방 헌법에 위배되는 여러 조항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무시한 주장이었다.[15]
크로아티아 내 세르브인은 1990년 7월 크로아티아 독립에 대한 반대를 조율하기 위해 세르비아 민족위원회를 수립했다. 이들은 크로아티아가 유고슬라비아에서 분리독립 할 수 있다면 세르브인도 크로아티아에서 분리독립을 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크닌 남부의 치과의사인 밀란 바비치가 위원회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2004년 ICTY 재판에서 바비치는 "[1990년~1992년] 당시, 특히 자신의 정치 입문 당시 크로아티아에서 세르브인에게 자행된 크로아트인의 대량학살에 대한 위협이 임박했다고 반복적으로 언급하는 세르비아의 선전에 강한 영향을 받고 오도되어 크로아트인에 대한 증오와 적대심을 부추기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고 말했다.[16] 세르브계 크로아티아인 반군은 크닌의 경찰서장인 밀란 마르티치의 지휘 아래 여러 준군사조직 민병대를 조직했다.
1990년 8월 크라이나에서 크로아티아 내 세르브인의 "주권과 자치" 문제에 대한 주민투표가 열렸다. 이 결의안 투표는 세르브인에게만 국한되었으며 99.7%라는 압도적인 찬성으로 통과되었다. 이후 크로아티아 정부는 세르브계가 크로아티아의 법적 영토 내에서 이탈할 헌법적 근거가 없으며, 하나의 민족으로 제한할 권리도 없다고 밝히며 이 결의안은 불법이자 무효라고 선언했다.
바비치 행정부는 1990년 12월 21일 크라이나 세르브인 자치주(SAO 크라이나)의 수립을 선언했다. 1991년 3월 16일에는 크라이나에서 "SAO 크라이나가 세르비아 공화국에 합류해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및 유고슬라비아를 보존하고자 하는 타 국가와 함께 유고슬라비아 잔류에 대해 찬성하십니까?"라는 질문의 주민투표가 열렸다. 99.8%의 찬성으로 주민투표가 통과되었고 크라이나 의회는 "SAO 크라이나의 영토는 세르비아 공화국의 통일된 국가 영토의 한 구성체"라고 선언했다.[17][18][19] 1991년 4월 1일 크라이나는 크로아티아로부터 분리독립을 선포했다.[20] 크로아티아 동부의 기타 세르브계 다수 거주 지역도 SAO 크라이나에 합류했으며 자그레브 정부에 대한 세금 납부를 중단하고 자체 통화 체계, 군사 연대, 우편 서비스를 시작했다.
1991년 5월 19일 크로아티아의 독립에 대한 국민투표가 열려 투표를 제외한 수많은 세르브인을 제외한 유권자들은 다른 유고슬라비아 국가와의 국가연합 대신 독립을 선택해 83%의 투표율로 93%의 압도적인 찬성으로 통과되었다. 1991년 6월 25일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동시에 유고슬라비아로부터 독립을 선포했다.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이 짧게 발생한 슬로베니아 전쟁에서 슬로베니아의 독립 저지에 실패한 한편, 반란을 일으킨 세르브계 크로아티아인과 크로아티아 보안군 사이에서도 바로 충돌이 발생해 양 측에서 수십 명이 사망했다. 세르브인은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출신으로만 구성된 유고슬라비아 인민군 잔존 세력의 지원을 받아 무기를 받았다. 많은 크로아트인이 공포에 고향을 떠나거나 세르브계 반군에게 쫓겨 강제로 고향에서 쫓겨났다. 유럽 연합과 유엔은 휴전과 평화 정착을 논의했으나 실패했다.
1991년 8월경 ICTY의 주장에 따르면 세르브계 크로아티아인 지도자들이 "크로아티아 공화국 영토의 약 1/3에서 대다수의 크로아트인 및 기타 비세르브계 주민을 강제로 제거하여 새로운 세르브인이 지배하는 국가 영토로 만들러는" "공동범죄집단" 계획을 세웠다.[21] 이후 밀란 바비치가 전범 재판에서 한 증언에 따르면 1991년 여름 (밀로셰비치의 지휘 아래 있는) 세르비아 비밀경찰이 "국가안보국과 크라이나 경찰, 세르비아 국가안보국의 지휘를 받는 부대의 병렬적 지휘구조"체계를 수립했다.[22] 세르비아 비밀경찰이 후원한 부차크의 늑대나 흰 독수리와 같은 준군사조직도 이 지휘체계의 핵심 구성 요소였다.[23]
1991년 8월 들어 전면전으로 확대되었다. 이후 몇 달간 크로아티아의 1/3에 해당하는 넓은 영토가 세르브계 반군이 장악했다. 크로아트인은 여러 살해 사태가 나는 가운데 도망치거나 쫓겨나면서 큰 고통으로 이어졌고 인종 청소로 이어졌다.[24] 대부분의 전투는 1991년 8월에서 12월 사이에 일어나 약 8만명의 크로아트인이 추방되었고 이 중 일부는 사망했다.[25] 그 외에 더 많은 사람들이 슬라보니아 동부에서 전투로 사망하거나 난민이 되었다(크로아티아-세르비아 국경을 따른 지역의 영토는 당시 SAO 크라이나의 영토가 아니었으며 이 분쟁의 주요당사자는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이었다). 추방된 크로아트인 및 기타 비세르브인의 총 수는 17만명(ICTY 추정)[26]에서 최대 25만명(휴먼 라이츠 워치 추정)으로 추산된다.[27]
1991년 하반기 크로아티아는 군대를 조직하기 시작했고 주요 방어 세력이었던 지역경찰은 반란을 일으킨 세르브계 크로아트인을 지원하는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에게 제압당했다.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은 내륙에 있었지만 곧 크로아티아 영토 깊숙히로 진격하기 시작했다.[24] 또한 크로아티아의 해안 마을인 자다르에 포격을 가해 인근 주민 80명을 살해하고 해안-91 작전에서 크로아티아 북부와 남부를 잇는 마슬레니차 다리를 손상시켰다. 또한 시베니크 전투에서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은 시베니크까지 진격을 시도했으나 방어군이 공격을 성공적으로 격퇴했다. 도시 중앙 극장도 유고 인민군의 포격을 받았다.[28] 부코바르 시가지는 유고 인민군의 공격으로 완벽하게 황폐화되었다.[29] 수 개월간 유고 인민군의 공격을 막아내던 부코바르 시가지가 함락되면서 부코바르 전투가 끝났다. 부코바르 방어군과 민간인 2천명이 사망하고 800명이 실종되었으며 22,000명이 강제 추방되었다.[30][31] 부상자들은 부코바르 병원에서 인근 오브차라로 이송되어 처형당했다.[32]
1991년 12월 19일 SAO 크라이나가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으로 정식 선포되었다. 같은 날 세르비아 크라이나 헌법도 발효되었다.[33] 1992년 2월 26일 SAO 서슬라보니아와 SAO 동슬라보니아 바라냐 서시르미아가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에 합류했다. 1992년 3월 19일에는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군(SVK)이 공식적으로 창설되었다.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은 최대 17,028 km2의 면적을 차지했다.
1991년 11월에 서명한 밴스 계획에 따라 투지만과 밀로셰비치 대통령은 사이러스 밴스 전 유엔 사무총장 특사가 세운 유엔 평화 계획에 동의했다. 1992년 1월 양측 대표가 최종 정전 협정인 사라예보 협정에 서명하며 밴스 계획 실행을 위한 길을 열었다.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이 주장한 크로아티아 영토 4곳에 유엔보호구역이 설정되었고 크로아티아 내 유고 인민군이 전부 철수하며 난민들을 유엔보호구역 내 고향으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명시했다.
유고 인민군은 1992년 5월 크로아티아에서 공식적으로 철수했지만 대부분의 무기와 병력은 세르비아계가 점령한 지역에 남아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의 군사에 넘겨졌다. 난민들은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고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에 남은 크로아트인과 기타 국적자들은 다음 달 들어 추방되거나 살해당했다.[29][34] 1992년 2월 21일 초기 1년간 유엔보호구역의 안보를 책임지기 위한 유엔보호군(UNPROFOR)의 수립이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에서 허가되었다.
밴스 계획에 따른 휴전은 이후 3년간 사실상 전선을 동결시켰다.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은 사실상 서로 대치했다. 하지만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은 다른 어떤 국가나 국제기구로부터 법적으로 국가승인을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러시아와 같은 세르비아의 동맹국이 사실상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을 지지했다.
유엔보호군은 정전 협정 유지를 위해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 전역에 병력을 배치했지만 실제로는 경무장과 제한된 교전수칙 때문에 사실상 감시부대에 불과했다. 이 부대로는 난민을 귀환을 완전히 보장할 수 없다고 판명되었다. 실제로 반군인 세르브계 크로아티아 정부는 마을의 문화 및 종교 기념물을 파괴해 크라이나에 거주했던 크로아트인의 존재를 지워버리는 등 이들이 '절대로' 돌아오지 못하도록 계속 움직였다.[29] 나중에 밀란 바비치는 이 정책이 베오그라드에서 파견된 세르비아 비밀경찰,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밀로셰비치의 명령으로 추진되었다고 증언했으며 밀로셰비치가 크라이나의 모든 행정기관과 군대를 통솔했다고 말했다.[35] 이를 통해 유고슬라비아군이 "평화유지군"으로 활동한다고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반란을 일으킨 세르브계의 편을 들었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하지만 밀로셰비치는 바비치가 "두려움" 때문에 지어낸 이야기라며 이를 부인했다.
세르비아 크라이나군은 종종 중포로 이웃한 당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의 영토였던 비하치 포위망을 공격했다.[36]
1992년 12월 30일 크로아티아에 새로운 크로아티아의 주가 만들어지면서 크로아티아 정부는 크라이나 지역에도 세르브인 민족을 위한 2곳의 자치구(코타르, kotar)도 따로 설정했다.
하지만 세르브인은 원하는 정도의 자치권도 아니며 너무 뒤늦게야 한 조치라고 생각해 이 때쯤이면 사실상의 독립을 선언했다.
자치구 구역 전체가 자칭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 내에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 기능을 한 적은 없다. 글리나 자치구의 존재는 Z-4 계획의 초안에도 이어졌으나 이 계획은 시행되지 않았다. 스톰 작전 이후 자치구를 허용하는 법의 적용이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38] 2000년 들어 자치구에 관한 법률이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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