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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초대 국왕 (?–28)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온조왕(溫祚王, ? ~28년 음력 2월)은 백제(百濟)를 건국한 초대 국왕(재위 : 기원전 18년 ~ 28년 음력 2월)이며, 고구려를 세운 동명성왕(東明聖王)의 아들이기도 하다.
《삼국사기》는 온조를 고구려 동명성왕의 아들로 기록하면서, '일설에는 북부여의 우태의 아들이라고도 한다'라는 내용도 함께 기록하였다. 《삼국유사》는 《고전기(古典記)》를 인용하여 온조를 동명성왕의 셋째 아들이라고 기록하고 있고, 《동국통감》을 비롯한 대부분의 역사서 또한 온조를 동명성왕의 아들로 기록하고 있다.
온조의 출생 연도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이복 형인 유리명왕과 친형인 비류가 있으므로 적어도 기원전 36년 이후에 태어났음을 추정할 수 있다.
온조를 우태의 아들로 비정할 경우, 출생 연도는 더욱더 추정할 수 없게 된다. 온조의 어머니인 소서노가 동명성왕 보다 8살이나 연상인 점[3]을 미루어 볼 때, 소서노가 주몽과 재혼했을 것이라는 《삼국사기》의 기록도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갖는다.
고구려를 탈출한 비류와 온조는 남쪽으로 이주하여 한산에 이르렀는데, 국가를 세우고 도읍을 정하는 과정에서 형제간에 이견이 발생하였다.
기원전 18년, 온조는 한강 유역의 위례성을 근거지로 도읍을 정하고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로 지었다. 비류는 온조와 결별하고 미추홀로 이주하였으나 땅이 습기가 많고 물이 짜서 편하게 살 수 없었다. 비류는 위례성으로 와서 온조의 백성들이 편하게 생활하는 모습을 보고 이를 후회하다가 죽었다.[4]
온조는 비류의 남은 신하들을 받아들이면서 나라 이름을 백제(百濟)로 고쳤다.
고려 무신정권기의 승려인 각훈의 《해동고승전》에는 《기로기(耆老記)》의 내용을 인용하여 비류와 온조가 힘을 합쳐 나라를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충렬왕 때의 승려인 이승휴의 《제왕운기》에는 형인 비류[7]가 나라를 세워 왕이 되었으나 5개월만에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기원전 17년(온조왕 2년), 말갈과의 전쟁에 대비하여 무기를 수선하고 양식을 비축하는 등 방어 계획을 수립하였다. 다음해 9월에 말갈이 북쪽 국경을 침범하자 날쌘 병사를 이끌고 공격하여 대승하였다.
기원전 14년(온조왕 5년)에는 북쪽 국경을 순찰하고 백성들을 위로하였다.
기원전 11년(온조왕 8년) 2월, 말갈군 3천명이 침입하여 위례성을 포위하였다. 열흘 후에 말갈군은 군량미가 부족하여 회군하였는데, 이때를 놓치지 않고 추격하여 대부현에서 말갈군을 대파하고 500여명을 사로잡았다. 같은해 7월, 마수성을 쌓고 목책을 설치한 일로 낙랑과 갈등하였는데, 낙랑 태수가 성과 목책을 허물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온조왕은 '요새를 만들어 나라를 지키는 일은 당연한 일'이라며 거절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낙랑과 백제의 관계는 악화되었다.[4]
- 가을 7월, 마수성(馬首城)을 쌓고 병산책(甁山柵)을 세우자 낙랑 태수가 사신을 보내 말하였다.
- “지난날 서로 사신을 보내고 우호를 맺어 한 집안처럼 지냈는데
- 이제 우리 땅 가까이에 성을 쌓고 목책을 세우니,
- 혹 우리 국토를 야금야금 차지하려는 계책이 아닌가?
- 만일 지금까지의 우호를 생각하여 성을 헐고 목책을 부순다면 의심할 바가 없지만,
-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한번 싸워 승부를 내겠다.”
- 왕이 답하기를,
- “요새를 만들어 나라를 지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떳떳한 일이다.
- 어찌 이 일로 우호 관계에 변함이 있겠는가?
- 당연히 태수가 의심할 일이 아니다.
- 만약 태수가 강함을 믿고 군대를 일으킨다면 우리도 대비책이 있다.”
- 이로 인하여 낙랑과 사이가 좋지 않게 되었다.
— 《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 제1, 시조 온조왕 8년
기원전 9년(온조왕 10년) 10월, 말갈이 북쪽 국경을 침범하자 곤미천에서 싸웠으나 패배하였다. 온조왕이 직접 정예기병 100명을 이끌고 병사들을 구원하니 말갈군이 곧 물러났다. 다음해인 기원전 8년(온조왕 11년)에는 낙랑이 말갈을 종용하여 백제를 습격하였다. 말갈군은 병산(甁山)의 목책을 부수고 노략질을 일삼았다. 이에 백제에서는 독산과 구천에 목책을 설치하여 낙랑과의 통로를 차단하였다.[4]
기원전 2년(온조왕 17년), 낙랑이 위례성에 쳐들어와 불을 질렀다. 다음해인 기원전 1년(온조왕 16년) 10월에는 말갈이 습격하자 병사들을 거느리고 칠중하에서 물리쳤다. 다음달인 11월, 이를 설욕하기 위해 말갈의 우두산성을 공격하려고 출병하였으나 폭설로 인해 회군하였다.
22년(온조왕 40년) 9월, 말갈이 술천성을 공격하였고, 11월에는 부현성을 습격하여 백성 100명을 죽이고 노략질하자 기병 200명을 보내 물리쳤다.
연맹왕국인 마한은 본래 백제와 우호적이었다. 온조왕은 사냥터에서 잡은 신록(神鹿)을 마한에 보내기도 하였고 도읍을 옮길 때에는 마한에 통보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6년(온조왕 24년), 백제가 웅천에 목책을 세우자 마한의 왕이 사신을 보내 책망하였다. 마한의 왕은 온조왕이 처음에 남쪽으로 건너왔을 때, 동북 1백리의 땅을 내주어 편히 살게 하였는데 나라가 완비되자 성을 쌓고 목책을 세운다며 온조왕을 비난하였다. 이에 온조왕은 부끄러워하며 목책을 헐어버렸다.
7년(온조왕 25년), 온조왕은 진한과 마한을 합병할 마음을 갖고, 8년(온조왕 26년) 7월에 마한을 습격하였다. 이때 원산(圓山)과 금현(錦峴) 두 성이 끝까지 항복하지 않았다. 다음해인 9년(온조왕 27년) 4월, 원산과 금현 두 성이 항복함으로써 마침내 마한을 멸망시켰다.[4]
그러나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마한 멸망 후 113년이 지난 122년, 고구려의 태조대왕이 마한, 예맥과 함께 요동을 침입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온조왕에 의해 마한이 멸망했다는 기록과 대치된다. 《삼국사기》를 집필한 김부식 조차 주석을 남겨 의문을 제기하였다.[8]
기원전 18년(온조왕 원년), 아버지 동명성왕의 사당을 세웠으며 기원전 2년에는 어머니 소서노의 사당을 세웠다.
기원전 6년(온조왕 13년), 위례성의 민가를 옮겼으며 다음해인 기원전 5년(온조왕 14년) 정월, 천도하였다. 온조왕은 부락을 순시하면서 백성들을 위로하고 농사를 권장하였으며, 한강 서북쪽에 성을 쌓고 백성들을 옮겨 살게 하였다.
10년(온조왕 28년) 2월, 맏아들 다루(多婁)를 태자로 삼고 중앙과 지방의 병무를 맡겼다.
15년(온조왕 33년), 가뭄이 극심하여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을 지경에 이르고, 도적이 크게 일어나자 온조왕은 이를 안정시켰다. 19년(온조왕 37년)에는 한수 동북 마을에 흉년이 들자, 1천여호의 백성들이 고구려로 도망갔다. 나라의 상황이 악화되자 20년(온조왕 38년), 온조왕은 나라 곳곳을 순시하여 백성들을 살피며 위로하였다. 사자를 보내 백성들에게 농업과 양잠을 권장하였으며, 제단을 쌓아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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