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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 제국과 13개 식민지 사이에서 일어나 미국 독립군의 승리로 끝난 전쟁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미국 독립 전쟁(美國獨立戰爭, 영어: American War of Independence, 1775년 4월 19일 -1783년 9월 3일) 또는 미국 혁명 전쟁(美國革命戰爭, 영어: American Revolutionary War)[2]은 18세기 영국과 13개 식민지 사이에서 발발한 전쟁으로, 미합중국의 독립이 선언된 전쟁이었다.
이 문서의 내용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2020년 4월) |
미국 독립 전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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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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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조지 워싱턴 |
조지 3세 |
1765년 이후 영국과 식민지 사이의 관계는 정치적인 차이로 인해 악화되었다. 미국 독립주의자들은 "대표 없이 과세 없다"를 주장하며 인지세법에 반발했고, 이는 이후 보이콧으로 이어졌으며, 1773년 자유의 아들들이 보스턴 차 사건을 일으키면서 영국과 식민지 사이의 갈등이 깊어졌다. 보스턴 차 사건 이후 영국은 보스턴 항을 폐쇄했고 매사추세츠만 지방에 맞서 보복적인 법률들을 제정했다. 매서추세츠 식민지는 이에 대해 서포크 해결안을 마련했고, 영국 왕실에 대항해 비밀 정부를 설립했다. 조지아주를 제외한 12개의 식민지는 대륙회의를 만들고 영국 정부에 조직적으로 저항하고자 했다.
영국 정부는 매서추세츠 민병대를 콩코드에서 해산시키려고 했고, 이로 인해 1775년 4월 19일 영국군과 민병대 사이에 렉싱턴 전투가 발발했다. 민병대는 이후 보스턴을 포위했고, 1776년 3월 영국군은 보스턴에서 철수했다. 대륙회의는 조지 워싱턴을 대륙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동시에 미국은 퀘벡을 침공하여 영국군에 맞선 내란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퀘벡 전투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1776년 7월 2일, 제2차 대륙회의가 독립에 대해 투표했고, 7월 4일 미국 독립선언을 발표했다. 윌리엄 하우는 반격을 개시했고, 영국군은 뉴욕을 점령했다. 그러나 트렌턴 전투와 프린스턴 전투에서의 승리로 미군의 사기는 다시 올라갔다. 1777년 영국의 존 버고인 장군은 사라토가 공세를 개시해 뉴잉글랜드 식민지를 고립시키려고 했다. 이 작전을 지원하는 대신 하우는 필라델피아에서 전쟁을 벌였고, 1777년 10월 사라토가 전투에서 버고인은 패배하였다.
버고인의 패배 이후, 프랑스 왕국이 동맹 조약을 체결하고 1778년 영국과의 전쟁에 돌입했으며, 프랑스와의 우호 조약으로 스페인이 미국의 동맹국이 아닌 프랑스의 동맹국으로 참전하였다. 1780년 영국은 네덜란드 공화국 및 마이소르 왕국과도 관계가 악화되었고, 결국 네덜란드와 영국은 전쟁을 개시했다. 북아메리카에서 찰스 콘월리스는 왕당파의 지지를 받는다는 남부 전략을 채택했으나 소수의 왕당파만 모여들었다. 영국군은 킹스마운틴과 카우펜스에서 패배했고, 그는 요크타운으로 철수해 탈출을 모색했다. 그러나 프랑스 해군이 체사피크만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콘월리스의 탈출은 어려웠고, 프랑스-미국 연합군은 요크타운 전투에서 콘월리스의 항복을 받아냈다.
1782년 영국 의회는 아메리카에서의 모든 작전을 중단하기로 투표했지만, 해외에서 전쟁은 이어졌다. 상트 해전에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영국군이 승리를 거두었지만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는 지브롤터를 여전히 포위하고 있었다. 1783년 9월 3일 파리 조약이 체결되었고, 영국은 미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종전에 합의했다. 프랑스가 전쟁에 미친 영향이 컸음에도 불구하고,[3] 프랑스는 상대적으로 적은 이익을 보았으며 채무에 시달리게 되었다. 스페인도 일부 식민지를 회복하였으나, 지브롤터를 점령한다는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다.[4] 네덜란드는 영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했으며, 영국과 마이소르 왕국의 전쟁은 1784년에 망갈로르 조약으로 끝났다.
미국 독립 전쟁의 원인으로 가장 대표적인 것은 영국의 미국 식민지에 대한 과도한 조세 정책이다. 1763년 7년 전쟁의 결과를 논의하는 파리 강화 회담에서 영국은 식민지에 대해 조세 정책을 실시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후 〈설탕법〉, 〈당밀법〉 등으로 당밀, 설탕, 철, 소금 등의 수입품에 대해서 관세를 부과하였으나 간접세인 탓에 큰 반발이 따르지는 않았다. 문제가 된 것은 〈인지세법〉인데, 이는 신문, 일간지, 트럼프 카드 등 미국 식민지에서 출판되는 모든 출판물에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다. 이는 간접세지만 관세가 아니라 내부세라는 점에서 식민지인들의 커다란 반발을 불러왔다. 이에 식민지인들은 “대표가 없으면 과세도 없다”(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는 구호를 내걸고 영국의 과도한 조세 정책에 반발하였다. 즉, 미국 식민지에서는 영국 의회에 대표를 보낸 적이 없으니 이러한 법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영국은 이를 인정하지는 않았으나, 〈인지세법〉이 간접세의 추구라는 조세 원칙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금방 〈인지세법〉을 철폐하였다.
미국 독립 전쟁의 또 다른 원인으로는 영국의 ‘인디언 보호구역’의 설정을 들 수 있다. 프렌치 인디언 전쟁에서 미국은 인디언과 연합한 프랑스와 전쟁하는 영국을 적극 지원하였다. 영국 승리 후, 식민지 미국인들은 비옥한 중서부지역으로의 진출을 기대하였지만 영국 정부는 이 지역을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설정하였다. 그런데 인디언 보호구역의 설정에도 불구하고 식민지인들은 자꾸 중서부 지역으로 넘어가려하였고, 이 과정에서 식민지 주민과 인디언들의 분쟁이 자주 발생하였다. 이에 대해 영국은 식민지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어쩔 수 없이 군대를 파견해야 했고, 재정적 비용에 부담을 느껴 〈병영법〉을 제정한다. 〈병영법〉은 영국 군대 비용의 일부를 미국 식민지 주민이 부담하게 하는 것으로 많은 반발을 불러왔다.
또한 1770년 3월에는 보스턴 학살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는 미국 식민지인들이 보스턴에서 시가 행진을 하던 영국군과 충돌이 발생한 것으로, 보스턴 시민 5명이 사망하였다.
이러한 불만이 누적되어 마침내 1773년에는 미국 독립 전쟁에 결정적인 도화선이 된 ‘보스턴 차 사건’이 발생하였다.
1775년 제2차 대륙 회의에서 식민지군이라는 이름에서 대륙군으로 명칭을 바꾸고, 벤자민 프랭클린, 존 애덤스, 로저 셔먼, 로버트 리빙스턴, 토머스 제퍼슨의 다섯 사람이 〈미국 독립선언서〉의 기초 작업을 수행했다. 그리고 대륙군을 창설하고, 조지 워싱턴 장군을 대륙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면서, 각 주에 군사와 물자지원을 요청하였다. 제2차 대륙회의는 1775년 5월부터 미국의 사실상 연방의회의 역할을 하였으며,[5] 이 1775년 제2차 대륙회의부터 미국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 시작 전 보스턴에서는 반정부 활동이 이어졌고, 1774년에 영국 정부는 징벌을 위한 《매사추세츠 통치법》을 제정하고 직접 통치를 거론했다. 그러나 이 정책은 민중 사이에 반발을 더 불러오는 결과가 되었으며, 본국에서 새로 임명된 관리는 사직하고 폭도에 쫓겨 보스턴으로 도망갔다. 영국군 북아메리카 총사령관이 된 토머스 게이지 중장은 보스턴 본부에서 영국 정규군 4개 연대를 지휘하고 있었지만, 시내를 벗어나면 혁명 세력의 수중에 있었다.
1775년 4월 18일 밤, 게이지 장군은 매사추세츠주 콩코드에 식민지 민병대가 무기를 보관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탄약을 압수하기 위해 700명의 부대를 파견했다. 혁명 세력에 속하는 폴 리비아 등의 전령이 교외 도시를 뛰어 다니며, 영국군이 출동했다는 경고를 전했다.4월 19일 아침, 영국군이 렉싱턴 마을에 진입하자 77명의 민병이 마을의 녹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총탄을 맞아 몇 명의 민병대가 사망했다. “한 발의 총성이 세상을 바꾸었다”라는 말을 낳은 사건이었다. 영국군은 콩코드로 이동, 3개 중대의 분견대가 노스 브릿지에서 500명의 민병대와 싸웠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영국군이 보스턴에 들어서자 수천 명의 민병대가 모여 들었고, 도로변에서 영국군을 공격해 큰 피해를 입혔다. 영국군은 증원군의 도착으로 괴멸을 면했다. 이 ‘렉싱턴 콩코드 전투’가 미국 독립 전쟁의 포문을 열게 된 최초의 충돌이었다.
민병대는 보스턴으로 몰려가 보스턴 포위전을 시작했다. 4,500여명의 영국 증원군이 대서양을 건너 도착했고, 1775년 6월 17일, 윌리엄 하우 장군이 지휘하는 영국군이 ‘벙커 힐 전투’에서 찰스타운의 반도를 점거했다. 미국 민병대는 후퇴했지만, 영국군의 손실이 커서 다음 공격을 이어갈 수 없었다. 포위는 깨지지 않았고, 영국군 지휘관 게이지 장군은 9월 잉글랜드로 돌아가 하우 장군과 교체를 하게 된다.
1775년 7월 새로 임명된 워싱턴 장군이 보스턴 교외에 도착하여, 식민지 군을 지휘, 육군을 조직했다. 워싱턴은 아군에 탄약이 부족한 것을 인정하고 새로운 공급처를 요구했다. 무기고를 습격하여 확보하고, 또한 자체 생산도 시도했다. 1776년 말까지 군수 물자의 90%는 수입에 의존했다. 그 총액은 200만 파운드에 달했으며, 대부분의 수입처가 프랑스였다.
정체 상태가 가을부터 겨울까지 이어졌다. 1776년 3월 패이트리엇들이 타이컨더로가 요새에서 획득한 대포가 헨리 녹스 소령에 의해 도체스터 고지에 전달되었다. 대포가 영국군에게 하향 조준되었기 때문에, 하우 장군은 방어를 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3월 17일 보스턴 시를 넘기고, 배를 이용하여 노바 스코샤의 핼리팩스의 해군 기지까지 후퇴를 했다. 이후 워싱턴은 뉴욕 시를 사수하기 위해 육군 대부분을 이동시켰다.
보스턴 방면에서 교착 상태에 빠져있는 동안, 대륙회의는 전쟁의 주도권을 잡으려고 다른 방면에서 작전을 시도했다. 대륙회의는 당초 프랑스계 캐나다인을 14번째 식민지로 끌어들일려고 노력하고 있었지만, 이것이 실패하면서 캐나다 침공 작전을 승인했다. 그 목적은 프랑스 사람이 많은 퀘벡에서 영국의 지배를 벗어나게 하는 것이었다.
캐나다에 2개의 원정대가 파견되었고, 그 중 하나는 리처드 몽고메리 준장 이끄는 1,700명의 민병대로 1775년 9월 16일에 타이컨더로가 요새를 출발하여, 11월 13일에는 몬트리올에 도달했다. 캐나다 지사 가이 칼튼은 퀘벡 시에서 철수했다. 두 번째 원정대는 베네딕트 아놀드 대령이 이끄는 부대로 동쪽에서 퀘벡시에 공략했지만, 보급이 여의치 않았고, 또한 천연두로 쓰러지는 사람도 많았다. 11월 초에 아놀드 부대가 퀘벡 시에 도착했을 때, 당초 1,100명 있었던 부대는 600명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합류한 몽고메리 부대와 아놀드 부대는 12월 31일에 퀘벡 시를 공격(퀘벡 전투)했지만, 칼튼 의해 완벽하게 막혔다. 이후에도 미합중국군은 1776년 봄까지 퀘벡 외곽에 주둔하고 있었지만 결국은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 캐나다는 미합중국 보다 많은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전선을 견고하게 방어했다.
미합중국군은 퀘벡을 재공략하려 했지만, 1776년 6월 8일 트루아 리비에르 전투에서 패배했다. 칼튼은 역습으로 전환하여, 10월에는 발쿠르 섬 전투에서 아놀드의 수군을 격파했다. 아놀드는 캐나다 침공 작전의 출발점이었던 타이컨더로가 요새까지 퇴각했다. 캐나다 침공 작전은 미합중국군에게 비참한 결과로 끝났지만, 아놀드의 공작으로 영국군의 전반적인 반격을 연기할 수 있었다.
이 캐나다 침공으로 미합중국은 영국 여론의 지지 기반을 잃었다. “그래서 미국에 대한 무력 행사는 이 나라의 모든 계층과 직업의 사람들로부터 흔쾌히 받아 들여지는 것이다.”
퀘벡 전투에서 제임스 리빙스턴 중령의 제1 캐나다 연대가 또한 생피에르 전투에서 모세스 헤이즌 제2 캐나다 연대가 미합중국 군을 추격하였다.
1776년 7월 4일, 대륙회의는 〈미국 독립 선언〉을 채택했다.
영국군의 하우 장군은 보스턴에서 철수한 후 뉴욕 시의 탈취에 집중했다. 대륙군의 워싱턴은 뉴욕의 방위를 위해 롱아일랜드와 맨하탄 사이에 2만명의 군대를 배치했다. 영국군이 스태튼 섬에 집결하는 동안 워싱턴은 새로 채택된 미국 독립 선언을 병사들에게 읽어주었으며, 더 이상 타협의 여지는 없었다.
1776년 8월 27일, 롱아일랜드에 상륙한 22,000명의 영국군은 독립 전쟁 중에서도 최대의 교전이 된 ‘롱아일랜드 전투’에서 대륙군을 몰아내고, 브루클린 하이츠까지 후퇴시켰다. 하우는 거기에서 포위전을 시도했지만, 워싱턴 군은 모두 맨해튼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9월 15일, 하우는 12,000여명의 부대를 이끌고 로워 맨해튼에 도착, 곧바로 뉴욕을 장악했다. 대륙군은 할렘 하이츠까지 물러났으며, 다음날 할렘 하이츠 전투가 벌어졌지만, 가까스로 진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하우가 워싱턴 군 주위에 움직일 때 퀘벡 주지사였던 가이 칼튼 장군의 해군도 전선에 합류하였는데, 베네딕트 아놀드 장군을 필두로 한 대륙군은 10월 11일 샹플레인 호수에서 발쿠르 섬 전투로 후속부대의 보급을 지연한다. 한편 하우가 이끄는 영국군이 워싱턴 군 주위를 배회할 때 워싱턴 군은 뒤로 후퇴한 뒤, 10월 28일에 화이트 플래인스 전투를 벌였다.[6] 워싱턴 군은 후퇴를 거듭했기 때문에, 하우는 맨해튼으로 돌아 워싱턴 요새를 점령하고 2,000여명을 포로로 잡을 수 있었다. 포로의 수는 롱아일랜드 전투 때와 같이 3,000여명에 달했다. 이후 뉴욕에서 악명 높은 ‘감옥선’이 시작되었으며, 종전까지 이어졌다. 이 감옥선에서 독립 전쟁의 어떤 전투보다 많은 미합중국 군과 선원이 방치되어 죽어갔다.[7][8][9][10][11]
찰스 콘월리스 장군이 워싱턴을 쫓아 뉴저지까지 진군하였고, 대륙군은 12월 초 델라웨어 강을 건너 펜실베이니아까지 후퇴했다. 뉴욕에서 뉴저지로 이어졌던 영국군 진격 작전도 겨울 들어 일단 정지하고 뉴저지에서 겨울 숙영에 들어갔다. 하우는 몇 번이나 소모전을 벌이며 대륙군을 잡을 기회가 있으면서도 실패했지만, 5,000명 이상의 대륙군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다.
대륙군의 전망은 암울했다. 대륙군과 함께 철수를 반복했던 토마스 페인은 “지금이 병사의 영혼을 시험할 때다”고 적었다. 가용할 수 병력은 5,000명 미만이었다. 군인은 1년이면 복무 기간이 끝나기 때문에 12월이 오면, 1,400명까지 줄어들게 되었다. 대륙회의는 절망 속에서 필라델피아를 포기했다. 그러나 영국군의 점령에 대한 대중의 반항은 강해지고 있었다.
워싱턴은 해가 바뀌기 전에 공격하기로 결정, 크리스마스 밤에 몰래 델라웨어 강을 건너 12월 26일, 트렌턴 전투에서 1,000여명 헤시안을 포로로 잡았다. 콘월리스는 트렌턴을 다시 탈환하려고 진군해 왔지만, 워싱턴은 그 허를 찔러 1777년 1월 3일의 프린스턴 전투에서 영국군의 후위 부대를 무찔렀다. 워싱턴은 미국 측의 사기를 높일 수 있었기 때문에, 이후 모리스 타운에서 겨울 숙영에 들어갔다. 뉴저지의 민병대는 겨울 동안 영국군과 헤시안을 계속 괴롭혔고, 영국군은 뉴욕시 주변까지 철수하게 되었다.
대륙회의와 워싱턴은 보스턴 포위전 때부터 정보, 첩보 전략을 전개하였고, 점령된 뉴욕을 중심으로 한 정보수집, 첩보활동은 지역의 지원이 적은 영국군보다 우위에 서 있었다. 트렌턴 전투 승리는 첩보활동이 성과를 거둔 예이다. 유럽 국가들과 정보 교류는 일찍부터 진행되고 있었으며, 이 정보전의 우위는 종전까지 계속됐다.
모든 단계에서 영국군의 전략은 국왕에 충성을 맹세하고 달려오는 왕당파들의 지원을 기대하고 있었다. 1776년 2월, 헨리 클린턴 장군은 2,000명의 병사와 해군함대로 노스캐롤라이나를 침공하려 했지만, 왕당파의 부대가 무어즈 크릭 다리 전투에서 섬멸된 것을 알고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6월에 클린턴은 남부의 주요 항구인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찰스턴을 점령하려 했고, 이때도 남부 왕당파의 궐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이것은 전쟁을 수행하는 간편한 방법으로 보였지만, 해군이 요새 공격으로 물러났고, 배후에서 마을을 공격하는 왕당파도 없었기 때문에 작전은 실패했다. 남부 왕당파는 효과를 보기에는 너무 형편없는 조직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1781년 말 런던의 고위 관료들은 남부에서 도망쳐 온 왕당파의 말을 믿고, 봉기할 것이라고 자신하고 있었다.
영국군이 1777년 전략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을 때, 북아메리카에는 두 개의 주력군이 있었다. 캐나다 칼튼 군과 뉴욕 하우 군이었다. 런던에서 조지 저메인이 이 부대의 작전을 승인했지만, 연락 소홀과 지휘관의 라이벌 의식 때문에 연계가 잘 이뤄지지 않았다. 하우는 필라델피아 점령에 성공했지만, 북부군이 새러토가에서 항복하면서 상실하게 되었다. 결국 1777년의 작전 후 칼튼과 하우 두 명 모두 사직하게 되었다.
1777년에 첫 작전은 존 버고인 장군이 이끄는 퀘벡에서 출발한 원정대였다. 목적은 샹플레인 호수와 허드슨강 통로를 확보하고, 뉴잉글랜드를 나머지 미국 식민지로부터 효율적으로 고립시키는 것이었다. 버고인의 침략은 두 방향에서 이루어졌다. 버고인 자신이 1만 여명의 병사를 이끌고 샹플레인 호수에서 올버니로 향했고, 다른 부대는 배리 세인트 리저가 이끌고 있는 2,000 여명의 부대로 모호크 계곡을 내려 와, 올버니에서 버고인과 합류하는 것이었다.
버고인은 6월 출발하여 7월 초에는 타이컨더로가 요새를 점령 했다. 이후 대륙군이 나무를 베고 길을 막았기 때문에 버고인 군의 행보는 지체되었다. 보급품을 확보하기 위해 분견대를 파견했지만, 8월에 미국의 민병대와 베닝턴 전투를 벌여 대패하면서 1,000명 가까운 병력을 잃어버렸다.
한편, 세인트 리저 부대는 그 절반을 모호크 족 지도자 조셉 브랜트가 이끌고 있었는데, 스탠윅스 요새를 포위 했다. 미국의 민병대와 동맹을 맺은 인디언이 포위된 아군을 구출하기 위해 나섰지만, 오리스카니 전투에서 매복을 당해 흩어지고 말았다. 두 번째 구원 부대는 베네딕트 아놀드가 이끌고 있었는데, 지원하기로 한 인디언들의 지원이 무산되자 세인트 리저의 부대는 포위를 풀고 캐나다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버고인 군은 총 6,000명까지 줄었다. 이러한 타격에도 불구하고 버고인은 올버니로 계속 진군하기로 결정했다. 이것이 나중에 큰 패착이 되게 된다. 대륙군을 이끄는 호레이쇼 게이츠 장군은 8,000명의 부대를 이끌고, 새러토가에서 남쪽으로 약 10마일(16 km) 지점에 진지를 구축했다. 9월 버고인은 대륙군의 측면을 공략하려고 했지만, 프리먼 농장 전투에서 반격을 당했다. 버고인 군 상황은 절망적이었으며, 뉴욕의 하우 군이 올버니로 향하고 있다는 기대를 가 있었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는 못했다. 하우 군은 배를 타고 멀리 돌아서 필라델피아를 공략하러 가고 있었다. 대륙군의 민병대는 속속 집결했고, 10월 초에는 총 11,000명에 달했다. 베미스 고지 전투에서 대패를 하게 된 버고인은 10월 17일에 항복했다.
새러토가는 전쟁의 전환점이 되었다. 하우 군에게 필라델피아를 빼앗겼지만, 미국 혁명 세력은 자신감과 결의를 되찾았다. 더 큰 소득은 이 전투의 승리로 프랑스를 미국 측에 끌어들여 영국군과 대결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영국군은 전쟁의 상황이 점점 꼬여만 갔다.
1776년에 뉴욕시를 확보한 하우 장군은 1777년 당시 혁명 세력의 수도인 필라델피아의 점령에 눈을 돌렸다. 하우는 느긋하게 이동하여, 체사피크 만의 북쪽 끝에 15,000명의 부대를 상륙시켰다. 워싱턴은 11,000명의 병사를 하우 군과 필라델피아 사이에 배치했지만, 1777년 9월 11일 브랜디와인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또 다시 후퇴를 해야 했다. 9월 26일, 대륙회의는 다시 필라델피아를 포기해야 했다. 하우는 또한 워싱턴 군을 무찌르고 필라델피아를 저항없이 점령했다. 워싱턴은 10월 초에 저먼타운 근처에 숙영하고 있던 하우 군과 저먼타운 전투를 벌였고, 12월 초에는 화이트 마쉬 전투를 벌였지만, 모두 결정적인 승패에는 이르지 못했고, 퇴각을 하여 기다리기로 했다.
화이트 마쉬 전투 후에, 워싱턴 밸리 포지를 겨울 숙영지로 정했다. 그곳은 필라델피아에서 약 20마일(32 km) 떨어진 곳으로, 다음 6개월을 보냈다. 겨울 동안 1만명 병력 중 2,500명이 질병과 추위로 죽어나갔다. 1778년 봄, 유럽에서 온 슈토이벤 남작의 체계적인 강훈련으로 대륙군은 사기를 되찾았다. 슈토이벤은 프로이센의 현대 전법을 가르쳤고, 훈련을 통해 규율 있는 군대로 탈바꿈시켰다.
영국군 총사령관은 하우 장군에서 클린턴 장군으로 교체되었다. 프랑스군의 참전으로 영국군은 전략을 바꾸어, 프랑스 해군의 위협 대상이 된 뉴욕시를 방어하기 위해 필라델피아를 포기했다. 1778년 6월 28일, 워싱턴은 철수하는 클린턴 군을 쫓아 몬머스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는 북부에서 벌인 마지막 큰 전투가 되었다. 클린턴 군은 7월에 뉴욕에 도착했지만, 그것은 데스탱 백작이 이끄는 프랑스 해군이 미국 해안에 나타나기 직전의 일이었다. 워싱턴 군은 뉴욕시의 북쪽에 있는 화이트 플레인즈로 돌아왔다. 양군 모두 2년 전에 대치 원점으로 돌아 왔지만, 전쟁의 양상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1776년부터 프랑스는 정보 교류를 통해 미국 독립 전쟁에 관여해 왔다. 토머스 제퍼슨이 프랑스에게 동맹을 재촉한 이후 프랑스군 트레빌 제독은 대륙군에게 보급품과 탄약, 대포를 지원했다. 그러한 드 발리에르와 같은 대포가 사용되면서, 새러토가 전투와 같은 교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777년 5월 2일 워싱턴은 프랑스의 보급품에 대해서 히이드 장군에게 편지를 썼다. 1778년, 북아메리카의 반란은 국제전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새러토가 전투에서 대륙군이 승리한 것을 알게 된 프랑스는 벤자민 프랭클린의 협상으로 1778년 2월 6일에 미국과 동맹 조약을 맺어 프랑스 미합중국 동맹이 결성된다.
1776년 아란다 공작은 스페인을 대표하여 벤자민 프랭클린과 사일러스 딘, 아서 리로 구성된 미합중국 대표단을 접견했다. 대륙회의는 대표단에게 유럽을 돌면서 북미 해안의 영국 해군의 봉쇄를 풀 수 있는 유럽 열강들과의 동맹을 재촉했다. 아란다 공작은 파리의 자택에 그들을 초대했다. 그는 그곳에서 스페인 대사로서 역할을 했으며, 식민지에 대한 조지 지원과 공개적인 공약을 하면서 투쟁하는 신생 식민지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보다 신중한 접근을 선택했던 플로리다블랑카 공작, 호세 모니뇨로부터 반대에 부딪쳤다.
이후 스페인의 지위는 스페인 대사가 프랑스 왕실의 제로니모 그리말디가 마드리드에서 스페인 정부에게 공개적인 동맹을 선언하라고 설득하는 아서 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요약되었다. 그리말디는 리에게 “귀하는 자신의 상황을 고려하겠지만, 우리의 입장은 아닙니다. 아직 우리가 나설 순간은 아닙니다. 포르투갈과의 전쟁 – 프랑스는 준비되지 않았고, 남아메리카에서 오는 우리의 보물선은 도착하지 않은 – 이 우리에게 즉각적인 선언을 부적합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 동안 그리말디는 리에게 의류와 화약이 미합중국을 위해 뉴올리언스와 하바나에 비축되었으며, 추가적인 담요가 빌바오에서 준비되고 있다고 재확인을 해주었다.
비록 스페인 정부가 전쟁의 초기부터 혁명군에게 도움을 주고 있었지만, 결국 1779년 6월 공식적으로 참전하게 되고, 그리하여 아랑후에스 조약을 맺게 된다. 네덜란드 공화국도 마찬가지였으며, 그들은 공식적으로 1780년 말에 참전을 하게 된다.
런던에 있는 국왕 조지 3세는 영국이 유럽에서 싸워야 할 전쟁이 있기 때문에 추가로 군을 투입하여 미국을 함락시키겠다는 모든 희망을 포기했다. “펜실베이니아를 계속 유지한다고 생각한 것은 농담이네.” 뉴잉글랜드를 회복한다는 희망이 없었다. 그러나 국왕은 여전히 “미국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며, 영원히 약속된 전쟁의 무한한 연장으로 그들의 불복종을 처벌할 것이다.”라며 결의를 다지고 있었다. 그의 계획은 3만 명의 병력을 뉴욕, 로드아일랜드, 퀘벡, 그리고 플로리다에 있는 요새에 주둔 시키는 것이었다. 다른 군대는 서인도 제도에 있는 프랑스나 스페인을 기습할 예정이었다. 미국인들을 처벌하기 위해 왕은 모든 해안 무역을 파괴하고, 그들의 항구를 파괴하고, 해안을 따라 도시를 불태우고, 약탈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베네딕트 아놀드가 1781년 코네티컷에 있는 뉴런던에서 했던 것처럼) 그리고 인디언들이 변경 지역의 개척지에 있는 민간인들을 공격하도록 놔두자는 계획도 세웠다. 왕은 이러한 작전들이 로열리스트를 고무시킬 수 있고, 의회를 분쇄시킬 수 있고, 또한 “그들이 불만을 가지고, 실망이 후회로 바뀔 때까지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반란군들을 당황시키고, 걱정시키고, 초라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1778년에 ‘새러토가 전투’에서 독립군의 첫 승리가 이루어졌고, 벤저민 프랭클린이 이것을 명분으로 프랑스의 참전을 설득하였다. 그리하여 프랑스가 참전하게 되고, 1781년 ‘요크타운 전투’에서 프랑스와 독립군 연합부대가 영국군의 주력부대를 격파하게 된다. 결국, 1783년 9월 3일 파리 조약에서 영국 정부는 미국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된다.[12]
미국 독립 전쟁의 의한 사상자 수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시대의 전형적인 전쟁들처럼, 질병으로 죽는 사람이 전사자보다 많았다. 천연두가 만연한 가운데 독립전쟁이 발발했는데, 이 전염병은 대략 130,000 명보다 많은 사람을 죽였다.
약 25,000명의 미국 독립군이 군 복무 중에 죽었다. 그 중 약 8,000명은 전사했다. 17,000여명은 질병으로 죽었는데, 그 중 8,000명은 포로가 된 채로 죽었다. 독립군의 사상자는 약 8,500명에서 25,000명 사이로 추정된다. 따라서 미국인 총 사상자는 50,000여명 정도로 추정된다.
171,000 명의 해군이 전쟁 중 영국군으로 참전했고, 그 중 25-50%는 강제 징집되었다. 1,240명이 전사했고, 18,500명이 질병으로 죽었다. 가장 큰 원인은 비타민 결핍이 원인인 괴혈병이었다. 레몬주스로 충분히 예방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독부가 절차를 밟지 않았기 때문에 병사들은 속절없이 죽어 나갔다. 전쟁 중 약 42,000명의 해군이 탈영했다.
대략 1,200명의 독일인이 전사했고 6,354명이 사고나 질병으로 죽었다. 16,000명의 남은 독일인들은 고향으로 돌려보내졌지만 5,500명 정도는 여러 가지 이유로 미합중국에 잔류했다. 대부분 미합중국 시민이 되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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