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柳)씨는 2015년 대한민국 통계청 조사에서 642,693명(류 163,703명 + 유 478,990명)으로 조사되어 성씨 인구 19위이다. 본관은 문화(文化), 전주(全州), 진주(晉州), 고흥(高興), 서산(瑞山), 풍산(豊山), 영광(靈光), 선산(善山), 정주(貞州) 등 130여 본이 전한다.
- 전주 류씨(全州 柳氏)에 관한 기록으로 578년(백제 위덕왕 34) 성덕태자(聖德太子)의 요청으로 사천왕사(四天王寺)를 건축하러 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류중광(柳重光)은 본관이 전주(全州)다. 전주 승화현(承化縣) 출신의 류방헌(柳邦憲, 944년 ~ 1009년)이 972년(고려 광종 23년) 과거에 급제하여 1009년(현종 즉위년)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에 이르렀다.[1] 전주인(全州人) 류방헌(柳邦憲) 묘지명(墓誌銘)에는 증조부가 통일신라 때 각간(角干)을 지낸 류기휴(柳基休)이고, 할아버지 류법반(柳法攀)이 후백제의 우좌군(右將軍)을 역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전주류씨는 백제 때 창성(創姓)된 성씨다.[2] 류혼(柳渾), 류습(柳濕), 류지(柳池)를 각각 시조로 하는 3파가 있다. 2015년 인구는 78,690명이다.
- 정주 류씨(貞州 柳氏)는 삼중대광(三重大匡) 류천궁(柳天弓)의 딸이 고려 태조의 제1비 신혜왕후(神惠王后)이다.[3] 시중(侍中) 류덕영(柳德英)의 딸은 고려 태조 제6비 정덕왕후(貞德王后)이다. 중시조 류소(柳韶)가 고려 덕종 때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가 되었다. 2015년 인구는 15명이다.
- 문화 류씨(文化 柳氏) 시조 류차달(柳車達)이 고려 태조 때 군량 수송에 공을 세워 대승(大丞)에 제수되고 삼한공신(三韓功臣)의 호를 받았다. 7세손 류공권(柳公權)이 1160년(고려 의종(毅宗) 14년) 과거에 급제하여 명종 때 정당문학(政堂文學)·참지정사(叅知政事)에 이르렀다. 2015년 인구는 327,624명이다.
- 고흥 류씨(高興 柳氏) 시조 류영(柳英)이 고려 문종 때 호장(戶長)을 지냈다. 7세손 류청신(柳淸臣)이 고이부곡(高伊部曲) 출신으로 1310년(충선왕 2) 정승에 임명되고 고흥부원군(高興府院君)에 봉해졌다. 2015년 인구는 73,329명이다.
- 진주 류씨(晉州 柳氏)는 류정(柳挺)을 시조로 하는 토류계(土柳系)와 류차달(柳車達)의 9대손 류인비(柳仁庇)를 시조로 하는 이류계(移柳系)의 서로 다른 두 계통이 있다. 2000년 인구는 60,104명이다.
- 서산 류씨(瑞山 柳氏) 시조 류공기(柳公器)는 고려조에 관직이 합문지후(閤門祗候)에 이르렀으며, 사후에 증손 류숙(柳淑)이 귀해지자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수문전대학사(修文殿大學士)·감수국사(監修國士)·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에 추증되었다.[4]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9명을 배출하였다. 2000년 인구는 14,827명이다.
- 풍산 류씨(豊山 柳氏) 시조 류절(柳節)은 수주(樹州 : 경기도 부평)에서 호장(戶長)을 지냈다고 한다. 류절의 증손 류백(柳伯)이 고려 충렬왕 때 은사(恩賜)로 급제하였고, 7세 류종혜(柳從惠)가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역임하고 낙향해 하회동(河回洞)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22명을 배출하였다. 13세손 류성룡이 영의정에 오르고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해졌다. 2000년 인구는 13,341명이다.
- 영광 류씨(靈光 柳氏) 시조 류언(柳漹)의 아들 류두명(柳斗明)이 조선 초기 나주목사를 거쳐 대언(代言)을 지냈고, 손자 류규(柳規)가 1426년(세종 8) 무과에 급제하였다. 류규의 아들 류자환(柳子煥)은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정난공신 3등에 오르고 도승지·대사헌·전라도관찰사를 지냈다. 류규의 서자인 류자광(柳子光)이 연산군 때 무오사화를 주도하였고, 정국공신(靖國功臣) 1등으로 무령부원군(武靈府院君)에 봉해졌다. 2000년 인구는 1,475명이다.
유(劉)씨는 2015년 대한민국 통계청 조사에서 302,782명으로 조사되어 성씨 인구 30위이다. 본관은 충주(忠州), 강릉(江陵), 거창(居昌), 배천(白川), 연안(延安) 등 47본이 전한다.
- 충주 유씨(忠州劉氏) 시조(始祖) 유긍달(劉兢達)의 딸이 고려 태조(太祖)의 셋째 부인인 신명순성왕후(神明順成王后)가 되자 유긍달은 태사 내사령(太師 內史令)으로 추증되었다.[5] 2015년 인구는 2,544명이다.
- 거창 유씨(居昌劉氏) 시조 유전(劉荃)은 송나라에서 한림학사(翰林學士)와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냈다고 한다. 『을묘보(乙卯譜)』 서문에는 유전이 한태조(漢太祖) 고황제(高皇帝)의 40세손으로 왕안석(王安石)에게 간언하다가 1082년(문종 36) 고려로 들어와 영일군(迎日郡)에 터를 잡았다고 한다. 유전(劉筌)의 첫째 아들 유견규(劉堅規)가 거창군(居昌君)에 봉해져서 본관을 거창으로 했다고 한다. 2015년 인구는 27,756명이다.
- 배천 유씨(白川劉氏) 시조 유국추(劉國樞)는 유전(劉筌)의 8세손으로 고려에서 도첨의평리(都僉議評理)를 지냈다고 하며,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추증되어 배천군(白川君)에 추봉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족보에 앞서 유석(劉碩, 1094년 ~ 1155년)의 본관이 백주(白州)로 나타난다.[6] 2015년 인구는 8,773명이다.
- 강릉 유씨(江陵劉氏) 시조 유승비(劉承備)의 증손자인 유창(劉敞)이 1371년(고려 공민왕 20년)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좨주(成均祭酒) 등을 역임하고,[7] 조선 개국공신에 책록되어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에 봉해졌다.[8]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8명을 배출하였다. 2015년 인구는 236,871명이다.
- 연안 유씨(延安劉氏) 시조 유극량(劉克良)은 과거에 응시할 수 없는 노비였으나, 홍섬의 배려로 노비 신분을 면제받고, 무과에 급제하여 1591년(선조 24) 전라좌수사가 되었고, 조방장(助防將)으로 전임되어 임진왜란 때 활약하였다. 2015년 인구는 133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