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도비쿠스 4세 트란스마리누스
936년부터 954년까지 서프랑크 왕국의 왕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루이 4세(Louis IV, 920년 9월 10일 – 954년 9월 10일)는 936년부터 954년까지 서프랑크의 국왕이었다. 카롤링거 왕조의 일원으로 샤를 단순왕의 아들이다. 해외왕 루이(오트로메르 루이, Louis the Outremer) 또는 두트로메르 (d'Outremer) 또는 트란스마리누스(Transmarinus), 울트란스마리누스(Ultramarinus)라는 별명으로 불리는데 그 뜻은 모두 "바다 건너서 온" 또는 "외국에서 온"이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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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2년 아버지 샤를 3세가 네우스트리아 귀족들에 의해 폐위되자 혼란을 피해 어머니 에드지푸를 따라 잉글랜드로 망명했다. 936년 부르고뉴의 라울이 사망하자 서프랑크의 귀족들에 의해 추대되어 왕위에 올랐다. 그는 통치기간의 대부분을 서프랑크의 영주이자 유력 귀족인 파리 백작이자 프랑크 공작 위그 르 그랑과 갈등하는데 보냈다. 치세 말기에 위그 르 그랑과 일시적으로 화해했지만 서프랑크 왕국의 실권은 이미 대부분 위그의 가문에게로 넘어간 상태였다.
그는 아버지 샤를 3세를 지지하던 로타링기아의 귀족들과 노르망디, 브르타뉴의 노르만족 귀족들과 손잡고 위그 르 그랑에 저항하려 하였지만, 위그 르 그랑은 동프랑크 왕국의 국왕 오토 1세와 동맹을 맺고 그의 뜻을 좌절시켰다. 그는 동프랑크 왕국의 카롤링거 왕조가 단절된 것을 이유로 동프랑크 수복을 꿈꾸었지만 오토 1세에 의해 무산되었고, 그의 누이이자 로렌 공작의 미망인인 작센의 게르베르가와 재혼하는 것으로 타협을 보았다. 940년 경부터는 위그 르 그랑을 불신한 오토 1세가 위그를 견제하면서 그를 지원, 왕국의 북동부에 자신의 영향을 넓혀갔으나 954년 갑작스러운 낙마 사고로 사망하였다. 그의 생애와 행적에 대해서는 다소 모호하게 전해지다가 플로도하르트의 플로도하르트 연대기(Annals of Flodoard), 10세기 경의 프랑스의 역사가 레미의 리체로스의 저작 히스토리아(Historia)에 의해 알려졌다.
참고로 생일과 기일이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