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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공의회(世界公議會, 영어: ecumenical councils, 라틴어: Concilium Ecumenicum) 또는 보편공의회는 교리와 의식에 관한 문제를 논의하고 규정하기 위하여 보편교회(공교회) “전체 교회”[1]의 지역별 대표 신학자와 성직자들을 소집하여 진행하는 기독교의 종교회의이다. 기독교의 동방기독교, 서방기독교의 교파들에서 두루 받아들이는 세계 공의회는 처음 일곱 개의 회의이다.[2]
교리적 측면에서는 동방 정교회와 개신교회가 충실하게 따른다. 천주교회는 12세기 이후의 서방 공의회의 교리를 우선하므로 일부 보편공의회 교리를 거부하거나 수정하였다.
실상 첫 세계 공의회라고 할 만한 것은 신약성서 사도행전 15장에 기록한 예루살렘 사도회의(공의회)로, 유대교 전통을 강조하는 유다-그리스도인(유대계 그리스도인)과 이방-그리스도인(이방계 그리스도인) 사이에 논쟁이 벌어져 이방인에게 유다인의 전통 행동을 요구할지에 대해 논하였다. 그러나 이 공의회는 '공의회'라고 선언한 회의가 아니므로 통상 공의회 횟수 기록에서 제외한다.
그 뒤 2세기, 3세기의 박해시대에도 지역별로 감독 및 주교들이 모여서 사목문제를 협의하였는데, 이런 회의를 지역 공의회(Concilium provinciale, 혹은 regionale)라 하였다. 이러한 회의는 인근지역 교회 상호간의 유대를 강화하고 교리상의 일치를 보존하며 같은 신앙을 선포하고 확인하는 통상적인 회의였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교회가 자유와 평화를 누렸다. 차츰 로마제국 전역에 교회 영향력이 확장하고 신학(神學)이 성립 발전하는 과정에서 많은 이단설(異端設)이 생겨 교리 논쟁이 심하게 대립하였다. 이런 교회 문제가 제국의 문제로 나타났고, 동로마 제국 황제들은 국가의 평화와 교회의 안정을 바라면서 여러 번에 걸쳐 공의회(Concilium oecumenicum)를 소집하였다.
제1차 공의회에서 제8차 공의회까지는 동로마 황제가 소집하고, 황제의 보호 하에 제국의 동방지역인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에페소, 칼케돈 등지에서 개최하였다. 고대 교회의 신학 논쟁은 당시 교회의 중심지였던 동로마제국의 지역인 동방에서 일어났고, 5대 교구 즉,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에페스, 예루살렘, 안디오키아,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동방 지역 주교들이 참석했고, 서방 지역에서는 로마 교회의 주교들이 참석하였다. 당시는 보편교회 전통을 따라 동방과 서방 교회를 구분하지도 않았으므로, 각 지역의 주교들이 모인 회의였을 뿐이었다. 지역적 배분으로 5개 지역에서 모였으므로 현재 시각에서 보면 당연히 동방교회의 참석자가 대부분이며 그에 비해 서방교회의 소수가 참석핝 회의다.
공의회를 거듭하면서 이단설을 단죄하고 정통 교리를 선포하였으나, 차츰 지역별 언어와 문화적 차이가 발생하였다. 5개 지역 중 교회의 언어로 신약성경 언어인 코이네 그리스어를 사용한 콘스탄티노폴리스, 에페스, 안디옥, 알렉산드리아, 예루살렘 교회와 라틴어를 사용한 로마교회[3]에서 언어적 차이와 지역별 관습의 차이가 나타났다. 결정적으로 정치적인 여건과 결부하여 신앙의 일치에도 불구하고 많은 문제에서 견해 차이를 보이며 점차 대립 규모가 커졌다.
보편교회 전체의 회의였던 제1차 니케아 공의회(325년)로부터 제2차 니케아 공의회(787년)에 이르는 기간을 "일곱 공의회 기간"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동로마제국(동로마제국) 황제가 소집 명령을 내렸고,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 대주교/대감독이 의장이었으며, 신약성경 언어인 코이네 그리스어(헬라어)로 회의를 진행하고, 코이네 그리스어로 기록을 작성하였다.
여덟번째 공의회는 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869-870년)로 기독교에서 역사적인 사건이었지만, 교리적으로는 무의미한 공의회였다. 따라서 역사적 사건 이외에는 언급하지 않는다.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869-870년)는 코이네 그리스어를 사용하여 진행하였다. 교리가 아닌 교회 제도와 정치적 견해가 주제였으며 당연히 공의회로 교리적 영향력이 전혀 없다.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 대주교가 의장이 되어 로마지역 교회의 포시우스 대주교를 파문한 공의회로 교회 대분열의 서막이었다. 보편교회 참석자들이 모인 보편교회의 공의회이었으나 교리적 내용을 다루지 않고 교회조직 운영과 정치적 성격의 회의였으므로 트룰로 공의회처럼 중요한 공의회로 여기지 않는다.
서방교회 공의회는12세기 교회대분열 이후 서방교회 지역만의 공의회로 보편교회부터 내려온 전통적인 기독교 교리와 무관하며, 보편교회 공의회와 다른 공의회이다. 교회 대분열 이후 서방교회는 교황중심적 교회로 전환하고자 개최한 공의회이다. 보편교회의 모습은 사라지고, 동방교회의 참여가 전혀 없이 서방교회의 참석자만으로 이뤄졌다. 12세기 이후에 서방교회만의 새로운 기준을 형성한 공의회이다.
당연히 보편교회 교리를 따르는 입장과 동방교회 전통의 교회에서는 7대 보편공의회 교리만을 따르며, 서방교회 공의회는 서방교회 지역의 역사적 사건으로 인식하며 교리적인 측면은 없다고 본다. 서방의 개신교회에서도 7대 보편공의회 교리만을 따르며 서방교회 공의회 결정은 교리로 인식하지 않는다. 개신교회에서 서방교회 공의회 결정은 신학적인 교리가 아니라 시대적인 교회법률 결정 회의이며, 신학 분야에서 참조하거나 연구할 교회의 역사적 사건일 뿐이라고 본다. 이 공의회들은 보편교회의 공용어였던 헬라어가 아닌 고대 이탈리아 지역 언어였던 라틴어로 진행한 회의이다.
로마교회 대주교가 의장인 서방교회 공의회는 서방교회 전통 교파에서 다르게 인식한다. 서방교회 전통의 천주교회는 이를 교리적 측면에서 적극적으로 기준과 교리로 수용하며, 같은 서방교회인 개신교회에서는 서방교회 지역 역사에서 나타난 단순한 교회의 회의일 뿐이라고 이해한다. 개신교회에서는 7대 보편공의회 교리와 내용이 항상 우선적인 기준이다. 반면 천주교회에서는 보편 공의회의 결정보다 서방교회 공의회의 결정을 우선하며, 교리적 견해가 다를 경우 서방교회 공의회 결정을 우선하여 따른다.
로마지역에서 발전하며 오래된 역사적 경험을 토대로 로마교회는 서방교회로 발전하였다. 서방교회의 새 교회법[6] 은 공의회에 관한 기본적인 규범을 337~341조에서 규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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