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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우다 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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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우다 천황(일본어: 後宇多天皇, 1267년 12월 17일 ~ 1324년 7월 16일)은 제91대 일본 천황(재위 1274년~1287년)으로 휘(諱)는 요히토(世仁)이다.
고우다 천황 後宇多 天皇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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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대 일본 천황 | |
재위 | 1274년 3월 6일-1287년 11월 27일 |
전임 | 카메야마 천황 |
후임 | 후시미 천황 |
섭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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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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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
휘 | 요히토 (世仁) |
시호 | 고우다 (後宇多) |
능호 | 렌게부지 능 (蓮華峯寺陵) |
연호 | 분에이 (文永) 겐지 (建治) 고안 (弘安) |
신상정보 | |
출생일 | 1267년 12월 17일 |
사망일 | 1324년 7월 16일 |
왕조 | 야마토 왕조 |
가문 | 다이카쿠지 왕통 |
부친 | 카메야마 천황 |
모친 | 후지와라노 키츠시 |
배우자 | 호리카와 모토코 |
가메야마 천황의 차남이자 다이카쿠지 왕통(大覚寺統) 출신으로 시호는 59대 천황 우다 천황(宇多天皇)에서 유래하였다.
중세 일본 최고의 현군의 한 명으로 꼽히며, 그와 대립했던 지묘인 왕통(持明院統)의 하나조노 천황(花園天皇)조차도 그를 「말대(末代)의 영주(英主)」[lower-alpha 1]라고 칭송하였다. 그는 생에 두 번의 인세이(院政)를 행하였는데, 제1차 인세이 때에는 소송 제도 개혁에 나서서 큰 업적을 남겼다. 하지만 만년에는 진언종(真言宗) 수행에 경도된 나머지 정치를 소홀히 한다는 말까지 나오게 되어 하나조노 천황은 그를 두고 「만절을 더럽혔다」(晩節を汚した)고 비판했다. 다만 한편으로는 이렇게 정치 무대에서 멀어진 것은 그의 아들 고다이고(後醍醐)에게 친정을 맡게 하여 천황으로서의 위신과 경험을 쌓게 하였으며, 다이카쿠지 왕통 체제를 반석에 올리기 위해 의도적인 판단이었다는 설도 있다. 일본의 사학자 혼고 가즈토(本郷和人)는 고다이고 천황의 막부 타도 계획을 저지시키게 하려고 인세이를 그만둔 것이라고도 하였다.[1] 어쨌든 평가가 엇갈리는 만년을 들더라도 고우다 천황이 영주였다는 평만은 흔들림이 없으며, 그의 정치 개혁은 아들 고다이고 천황의 겐무 정권(建武政権) 시기를 지나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정책에도 영향을 주었다.
또한 고우다 천황은 호학(好学) 즉 학문을 좋아하는 군주였다고도 한다. 서도(書道)로는 신한양(宸翰様)의 명수로도 알려져 『고우다 천황 신한어수인 유고』(後宇多天皇宸翰御手印遺告, 다이카쿠지 소장) 등 여러 점의 어필이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와카(和歌)에도 뛰어나 니조파(二条派)의 유력 가인(歌人)의 한 사람이었다. 그의 제1차 인세이 때에 칙찬(勅撰) 와카 모음집인 『신후찬화가집』(新後撰和歌集, 가겐 원년인 1303년)이, 제2차 인세이 때는 『속천재화가집』(続千載和歌集, 겐오 2년인 1320년)이 편찬되었는데, 주람(奏覧) 및 찬자는 모두 니조 다메요(二条為世)가 맡았다(훗날 고다이고 천황의 아들로 규슈에서 기쿠치씨 등의 도움을 받아 정서부를 열고 정서장군궁이라 불리며 규슈의 남조 세력을 규합하게 되는 가네요시 친왕의 어머니는 니조 다메요의 손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