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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20세기 음악가 (1872–1915)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스크랴빈(러시아어: Алекса́ндр Никола́евич Скря́бин, 1872년 1월 6일 ~ 1915년 4월 27일)은 러시아의 작곡가이다. 스크랴빈의 특이한 작품은 자주 논쟁의 대상이 되었으나 그 독창성과 풍부한 재능은 높이 평가받았다.
1872년 1월 6일에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안톤 루빈스타인에게서 배운 피아니스트였으나 스크랴빈을 낳고 오래지 않아 죽었고 친할머니와 숙모의 손에서 자랐다. 1882년에서 1889년까지 육군유년학교에서 배웠다. 스크랴빈은 게오르기 코뉴스에게서 처음 음악을 교육받고서 타네예프에게서 이론을 배웠다. 그 무렵 스크랴빈은 이미 상당히 많이 창작하였다. 피아니스트로서도 괄목할 만하게 발전하여 13세에서 14세 때엔 음악원의 학생 연주회에서[1] 피아노를 연주했다. 1888년에 음악원에 입학하여, 피아노는 바실리 사포노프(1852-1918)에게서, 이론과 작곡은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제자인 안톤 아렌스키(1861-1906)에게서 배웠다.
1893년에 최초 작품이 출판되었다. 그것은 소년 시절에 쓴 피아노곡으로서 일부는 음악원 입학 전의 작품이었다. 다음해 벨라예프와 만나고 1895년에서 1896년까지 벨라예프는 스크랴빈을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독일에 걸치는 연주여행길에 데리고 갔다. 귀국하고서도 러시아 각지를 연주 여행하였다. 1897년, 피아니스트 이사케비치와 혼인하였는데 아사케비치는 스크랴빈의 작품을 잘 연주하는 사람이 되었다. 1898년에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피아노를 가르치기 시작했으나 1904년 봄에는 그만두고서 작곡에만 전념하였고 스위스를 정주지(定住地)로 하고 외국을 여행하였다. 1905년에는 파리에서 명지휘자 니키슈의 지휘로 〈신성한 시〉가 초연되었다. 1909년 러시아로 돌아와 모스크바에서 살았다. 1915년 초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연주회를 몇 번 열었고 그 마지막은 4월 2일이었다. 모스크바로 돌아와서 윗입술에 생긴 종기(腫氣)가 원인이 되어 파상풍으로 4월 27일에 급사하였다.
스크랴빈의 작품은 시대의 격변을 반영(反映)하여 매우 복잡성을 띤다. 예컨대 제3교향곡 <신성한 시>는 스크랴빈의 정신상 과정을 보이는 주목할 만한 작품이고 추상성을 띤 신비 철학을 내용으로 하면서 음악 자체를 극히 아름다운 현실성을 띠게 하였다. 이런 점에 스크랴빈의 음악에 이상한 매력과 깊은 비밀이 숨겨져 있다. 교향곡은 전술한 작품 외에 <법열(法悅)의 시>(1907-1908), 제5교향곡 <프로메테우스>(1909~1910), 또 교향시 <프로메테우스>(1907-1910)가 있다. 이것은 몇 년 전부터 구상하던 대규모 종교극 <미스테리아>의 최초 스케치였다. 한편, 피아노 협주곡, 피아노 소나타 10곡 외에 피아니스트의 흥미를 끄는 소품 10여 곡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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