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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카가 요시노리(足利義教, 1394년 ~ 1441년)는 일본 무로마치 시대 중기에 재임한 무로마치 막부 제 6대 쇼군이다(재위:1428년~1441년). 제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의 삼남으로, 모친은 요시미쓰의 측실 후지와라 요시코(藤原慶子)로, 제 4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모치(足利義持)의 동복 동생이다. 당초 출가하여 기엔(義円)이라고 불렸으나, 가독을 잇기 위해 환속하여 요시노부(義宣)라 칭하였다. 그러나, 후에 개명을 결의하여 조정에서 하사한 요시토시(義教)라는 이름도 거절하고, 최종적으로는 요시노리(義教)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오에이 원년(1394년) 6월 14일, 아시카가 요시미쓰의 삼남으로 태어났다.
오에이 10년(1403년), 아시카가 막부 쇼군 가독 상속자 이외의 자식으로서, 관례대로 불문에 들어가 기엔이라는 법명을 받고 쇼렌인(青蓮院)의 문적이 되었다. 오에이 26년(1419년) 11월에는 153대 천태종 좌주(天台座主)가 되어 '천태종 개벽 이래의 일재(逸材, 아주 뛰어난 인물)'이라 불리며 장래가 촉망되는 승려였다.
오에이 32년(1425년), 형인 제 4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모치(足利義持)의 자식인 제 5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카즈(足利義量)가 급서하고, 요시모치도 쇼초 원년(1428년)에 중태에 빠졌다. 그러나 요시모치 자신이 후계자 지명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각료들이 모여 평정을 개최한 결과, 이와시미즈 하치만 궁(石清水八幡宮)에서 제비 뽑기 의식을 거행하여 요시모치의 동생인 가지이 기쇼(梶井義承)·다이카쿠지 기쇼(大覚寺義昭)·고잔 에이류(虎山永隆)·기엔 중에서 쇼군을 결정하기로 하였다.
1월 17일, 이와시미즈 하치만 궁에서 제비를 뽑아, 그 다음날 쇼군 요시모치 사망 후에 개봉한 결과, 기엔이 후계자로 결정되었다. 제비 뽑기에 관해서는 신을 믿었던 중세의 일이었기 때문에 공정했을 것이라는 설 혹은 사전에 산보인 만사이(三宝院満済)가 손을 써서 부정했을 것이라는 설 등이 존재한다. 여하튼 이렇게 무로마치 막부 제 6대 쇼군으로 취임한 요시노리는 제비뽑기 쇼군(籤引き将軍)이라는 별칭을 가지게 되었다.
요시노리는 쇼군에 취임을 즉각 응낙하지는 않고, 취임 전에 간레이를 돌아가면서 차지하는 중앙 정부의 실력자들인 시바 가문(斯波氏), 하타케야마 가문(畠山氏), 호소카와 가문(細川氏)에게 ‘쇼군을 뒷전에 두고 멋대로 행동하지 않겠다’라는 서약서를 받아 내고 나서야 취임을 승낙하였다.
쇼군 취임을 마친 요시노리의 목표는 실추된 막부 권위의 부흥과 쇼군 친정체제의 부활이었다. 부친 요시미쓰를 시책의 모범으로 삼은 것으로 여겨지며, 그 시발점으로 쇼초 원년(1428년), 쇼코 천황 사후의 천황위 계승 문제에 개입하였다. 고하나조노 천황의 신속고킨와카슈(新続古今和歌集)는 요시노리가 상주한 것이다. 산보인 만사이를 정치 고문으로 삼아 예의와 소송 수속 등을 요시미쓰 시대의 형식으로 되돌리고, 참가자의 신분과 가문이 정해져 있는 기존의 의결기관(효조슈(評定衆) 등)을 대신하여 쇼군이 스스로 주재하며 참가자를 지명하는 비공식 평정인 고젠사타(御前沙汰)를 협의기관으로 삼아 간레이의 권한을 제한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리고 요시모치 대에 중단되었던 명과의 감합무역을 재개하여 재정 정책을 손보는 등 막부 권력의 강화에 힘썼다. 또한 신사·사찰 세력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다.
군사적으로도 쇼군 직할의 치안 담당 기관 호코슈(奉公衆)를 정비하는 등 군제 개혁을 감행하여 군사력을 얻었다. 그리고 가마쿠라 구보 아시카가 모치우지(足利持氏)가 쇼초에서 에이쿄로 연호를 개원한 것을 무시하고 계속 쇼초 연호를 사용하고 가마쿠라 5산의 주지를 멋대로 결정하는 등 전횡을 일삼자, 이를 구실로 가마쿠라 구보 토벌을 시도하였다. 이는 간토 간레이 우에스기 가문(杉氏)의 반대로 단념하였으나, 대신 오우치 모리미(大内盛見)에게 규슈 정벌을 명하였다. 모리미는 전사하였으나, 모리미의 뒤를 이은 조카 오우치 모치요(大内持世)가 야마나 가문(山名氏)의 힘을 빌려 시부카와 가문(渋川氏)·쇼니 가문(少弐氏)·오토모 가문(大友氏)를 격파하고, 요시노리 자신의 심복이 된 모치요를 규슈 단다이에 임명하여 규슈를 쇼군의 영향력 하에 두었다.
요시노리는 영지 다툼과 신사의 인사 문제 등이 일어나면 스스로 심리하지 않고, 제비 뽑기 등의 신명재판(神明裁判)에 맡겼다. 이에 대해서는 신의 권위를 빌려 중신과 구게 등의 반론을 제압하고, 스스로의 독재 권력을 확립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과, 스스로가 신의 뜻에 의해 무로마치 쇼군이 되었다는 왕권신수 의식에 따른 것이었다는 설 등이 주장되고 있다.
이러한 신명재판은 주로 영지 경제 문제와 조정 관련 문제에 한정되어, 슈고 인사와 군사면에서는 시행하지 않았다.
본래 천태종 좌주였던 요시노리는 환속 후 바로 동생 기쇼(義承)를 천태종 좌주에 임명하고, 천태종 세력을 포섭하려고 했다. 에이쿄 5년(1433년)에 엔랴쿠지(延暦寺) 승도들이 막부의 부교의 부정을 비판하는 12개조의 탄핵소송을 제기하였다. 만사이와 간레이 호소카와 모치유키(細川持之)가 유화책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요시노리는 부교를 유배하는 것으로 사건을 수습하였다. 그러나 히에이 산 승도들은 승소의 기세를 몰아 소송 결과에 동조하지 않고 온조지(園城寺)까지 불태우는 사건이 일어났다. 요시노리는 격노하여 스스로 병사를 이끌고 온조지 승병과 함께 히에이 산을 포위하였다. 이에 히에이 산 측이 즉각 항복하여 일단 화목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이듬해(1434년) 7월, 엔랴쿠지가 가마쿠라 구보 아시카가 모치우지와 내통하여 요시노리를 저주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요시노리는 즉시 오미 슈고 교고쿠 모치타카(京極持高)·롯카쿠 미쓰쓰나(六角満綱)에게 명하여, 히에이 산 일대를 포위하여 물자의 유입을 막았다. 더욱이 11월에는 군사가 히에이 산 산하 마을인 사카모토(坂本)의 민가에 방화하여 주민이 히에이 산으로 피난하는 소동이 일어났다. 엔랴쿠지 측이 항복 의사를 밝히고, 간레이 호소카와 모치유키 등 막부의 중신들도 사면 요청을 하였으나, 요시노리는 좀처럼 승낙하지 않았다. 12월 10일, 모치유키 등 막부 중신 5인이 “히에이 산 사면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저희의 교토 저택을 불태우고 영지로 돌아가겠습니다”라고 강경한 요청을 거듭하였다. 12일, 요시노리는 뜻을 꺾고 화해에 응하여 엔랴쿠지 대표 4인을 알현한 뒤 군대를 물렸다.
그러나 요시노리는 엔랴쿠지를 진심으로 용서하지 못하고, 에이쿄 7년(1435년) 2월, 앞서 온 엔랴쿠지 대표 4인을 교토로 초빙하였다. 그들은 요시노리의 저의를 의심하여 좀처럼 상락하려고 하지 않았으나, 간레이 모치유키가 맹세장을 보내왔기 때문에 교토로 출두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출두하자마자 참수당했고, 이 사실을 들은 엔랴쿠지 신도들은 격앙하여, 이 처사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근본중당(根本中堂)에 방화하고, 24인의 신도가 분신자살하였다.
불길은 교토에서도 보여 세간이 소란스러워졌다. 요시노리는 히에이 산에 대한 소문을 이야기하는 자는 참수형에 처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그 뒤, 엔랴쿠지 대표 후임으로 친막부파의 승려가 새로이 임명되고, 반년 뒤에는 근본중당 재건도 개시되었다.
가마쿠라 구보 아시카가 모치우지는 요시모치의 동생들은 모두 승적에 들었으나, 자신은 승적이 들지 않았기 때문에 요시모치 사후 자신이 쇼군에 취임했어야 했다고 믿고 있어 요시노리를 원망하고 있었다. 전술한 연호 문제는 타협으로 수습되었으나, 히에이 산 저주 문제에 에이쿄 10년(1438년)에 모치우지의 적남 아시카가 요시히사(足利義久)의 관례 때 요시노리를 무시하고 멋대로 이름을 붙여준 것(당시에는 쇼군에게 한 글자를 받는 것이 관례였다) 등 문제를 일으켜 모치우지와 막부와의 관계는 일촉즉발의 상황이 되었다. 이러한 때에 때때로 모치우지에게 충고를 해주던 간토 간레이 우에스기 사다자네(上杉憲実)가 모치우지가 자신을 소원하게 여기는 것에 신변의 위험을 느껴 영지 고즈케국으로 도망가고, 모치우지가 사다자네 토벌군을 일으키기에 이르렀다. 요시노리는 이를 호기로 여겨 사다자네와 손을 잡고, 간토의 제 다이묘를 모치우지 포위망을 결성하여, 토벌 칙령을 받고 모치우지를 조정의 적으로 인정받아, 이듬해 에이쿄 11년(1439년)에 간토 토벌군을 일으켰다(에이쿄의 난). 모치우지는 대패하고 삭발, 공순의 자세를 보였으나, 요시노리는 사다자네의 구명 탄원에도 아랑곳않고 모치우지 일족을 살해하였다. 그 뒤 간토에서 자신의 세력권을 넓히기 위하여 친아들을 새로운 가마쿠라 구보로 내려보냈으나, 이는 우에스기 가문(上杉氏)의 반대에 부딪혀 좌절되었다. 또한, 요시노리의 아들 아시카가 요시마사 대에 아시카가 마사토모(足利政知)가 막부 공인 가마쿠라 구보로서 간토로 부임하여 요시노리의 계획이 실행되기에 이르렀으나, 결국 마사토모는 가마쿠라에 들어가지 못한 채 이즈국 호리고에(堀越)에 머무르며 호리고에 구보(堀越公方)라고 칭하게 된다.
요시노리는 가마쿠라를 평정하였으나, 에이쿄 12년(1440년)에 도망친 모치우지의 아들 안오마루(安王丸)·슌오마루(春王丸) 형제가 유키 우지사다에게 가담하여 판란을 일으켰다(유키 전투(結城合戦)). 요시노리는 은거하고 있던 사다자네에게 토벌을 명하였으나, 간토 제장의 완강한 반항에 직면하여 무작정 공세에세 병량 공세로 전환하여 다음해 가키쓰 원년(1441년) 4월에는 진압에 성공하였다. 모치우지의 두 아들은 교토로 호송되던 중에 참수되었다. 또한 야마토 에이쿄의 난(大和永享の乱)에서 유력 고쿠진과 후남조(後南朝) 세력을 토벌하였다. 이러한 난 진압 때 요시노리는 조정의 윤지를 받아 상대를 ‘조정의 적’으로 삼아 토벌하였는데, 이것이 센고쿠 시대에 조정의 권위 회복의 한 요인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또한 요시노리는 유력 슈고 다이묘들의 가독 계승에 적극적으로 간섭하여, 오우치 모치요와 아카마쓰 사다무라(赤松貞村) 등 자신의 심복을 당주로 밀어 지배력을 강화하는 정책을 펼쳤다. 요시노리의 뜻을 거스른 슈고 다이묘 잇시키 요시쓰라(一色義貫)와 도키 모치요리(土岐持頼)는 자객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요시노리 시대에는 쇼초 도잇키(正長の土一揆)와 후남조 세력의 반란 등 무로마치 막부를 둘러싼 정치·사회 정세가 불온하였는데, 요시노리는 규슈 평정, 종교 세력 간섭, 후남조 토벌, 간토 평정, 슈고 다이묘 간섭 등에서 성과를 거두어 권력의 중앙 집권화에 어느 정도 성공하였다.
요시노리는 쇼군 권력 강화에 집중하여 때로는 심각할 정도로 엄격하고 가혹한 면을 드러냈고, 쇼군 자신의 심기를 건드리면 그것이 사소한 일이라 하더라도 격노하여 혹독하게 처단하는 경우가 많았다. 주요한 예는 아래와 같다.
이에 머물지 않고 ‘헌상받은 매화 가지를 꺾었다’‘요리가 맛이 없다’는 사소한 이유로 정원사와 요리사를 벌한 것이 당시의 기록에 다수 남겨져 있다.
에이쿄 6년(1434년) 6월, 나카야마 사다치카(中山定親)가 자신의 일기 《삿카이키(薩戒記)》에 요시노리에게 처벌 받은 사람 수를 헤아린 것을 보면, 공경 59인, 신관 3인, 승려 11인, 궁녀 7인이 처벌받았다고 한다. 그 중에는 천황의 생모, 황족, 간파쿠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 수는 무가와 서민은 포함되지 않은 수로, 이 외에도 상당수일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사적은 요시노리가 공포정치를 지향한 것과, 가학성을 가지고 있던 것을 보이는 일화로 전해져온다. 사다후사 친왕(貞成親王)은 《간몬닛키》(看聞日記)에 전술한 소문을 흘린 상인의 참수를 언급하며 “만인이 공포에 떠나니, (소문은) 말하지 마라, 말하지 마라”고 기록하였다. 이 때문에 ‘만인 공포’를 요시노리 시대를 상징하는 말로 보는 경우도 많다.
에이쿄 9년(1437년) 즈음부터 쇼군 요시노리가 아카마쓰 미쓰스케(赤松満祐)를 토벌하려 한다는 소문이 퍼져나갔다. 가키쓰 원년(1441년) 6월 24일, 아카마쓰 미쓰스케는 ‘새끼 오리가 다수 출몰’한 것과 간토의 가마쿠라 구보 모치우지 정벌을 마친 것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요시노리에게 자신의 관에 방문하여 축연을 올리게 해 줄 것을 소청하였다. 당시, 쇼군이 가신의 관으로 가 축연을 베푸는 것은 중요한 정치 의식이었다. 요시노리는 소수의 측근을 대동하고 아카마쓰 저택으로 가 축연에 참석하였으나, 축연이 한창일 때 암살당하였다. 향년 48세. 주인을 잃은 막부는 혼란에 빠져서 토벌대를 보내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사이, 아카마쓰 미쓰스케·노리야스(教康) 부자는 영지 하리마로 귀국하였다.
같은 해 7월 11일이 되어서야 막부는 토벌군을 편성하여, 호소카와 모치쓰네(細川持常)·야마나 소젠(山名宗全) 등이 아카마쓰 가문을 토벌하여 멸망시켰다. 이를 가키쓰의 난이라 부른다. 후시미노미야 사다후사 친왕(貞成親王)은 《간몬닛키》에서 ‘자업자득의 말로는 이리도 무력한 것인가. 쇼군이 이러한 개죽음을 당한 것은 고래에 그 예를 들어본 적이 없나니’라고 평하였다.
이 사건의 결과, 요시노리에 의해 부흥되었던 쇼군 권력은 결국 약해져 가게 되었으나, 요시미쓰의 기타야마 문화(北山文化)를 받쳐준 쇼군의 중앙 집중 권력이 요시노리 대에 다시 한번 확립된 것도 사실이다. 또한 요시노리가 설립한 호코슈 제도는 쇼군 권력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기구가 되어 오닌의 난(応仁の乱)을 거쳐 메이오 정변(明応の政変)에 이르기까지 쇼군 권력을 유지해 나가는 데 일조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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