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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관 겸 정치가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황보인(皇甫仁, 1387년 ~ 1453년)은 조선 전기의 문관 겸 정치가이다. 단종 때 영의정을 지낸 충신이다.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사겸(四兼)·춘경(春卿), 호는 지봉(芝峰)이다.[1]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1414년(태종 14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1414년(태종 14)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 세종 때 장령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병조판서가 되었으며, 1440년 평안도와 함길도 체찰사(體察使)가 된 후 10년 동안 절제사 김종서(金宗瑞)와 함께 육진(六鎭)을 개척하였다. 이후 상호군이 되었고 당상관에 올라서 동부대언, 우대언, 좌대언, 지신사를 거쳐서 형조좌참판, 병조우참판 등을 지냈다. 세종 때 북도 체찰사로서 절재 김종서와 아울러 6진을 개척하고 돌아와 병조판서를 지낸 뒤에 좌참찬과 우찬성, 좌찬성을 거쳐서 우의정이 되었다. 그 후 1451년 문종 때 좌의정을 거쳐서 영의정에 올랐다. 단종을 잘 보살피라는 문종의 유언을 받들어 어린 단종을 보호하다가, 1453년 수양대군에게 김종서와 함께 살해되었다. 향년 67세.
1705년 숙종이 한성부판윤 민진후(閔鎭厚)의 상소를 보고 김종서와 황보인의 신원을 논의하였으며 1719년 부분적인 신원이 이루어졌다. 1746년(영조 22)에 완전히 신원되어 영조가 1758년 충정(忠定)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1791년(정조 15) 장릉(莊陵) 충신단(忠臣壇)에 배식(配食)되고, 1804년(순조 4) 집 앞에 정문이 세워졌으며, 1807년 부조지전(不祧之典, 조상의 위폐를 사당에서 옮기지 않고 영원히 배향하는 것)을 받았다. 영천의 임고서원(臨皐書院), 구룡포읍의 광남서원(廣南書院), 종성의 행영사(行營祠)에 제향되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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