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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의병운동(抗日義兵運動) 또는 항일의병(抗日義兵)은 일본 제국에 항거하는 의병 운동이다. 동학농민운동에서 시작하여 일본의 국권 침탈에 반대하여 을사의병(乙巳義兵), 정미의병(丁未義兵)으로 이어졌고 경술국치(庚戌國恥, 1910년 8월 29일) 이후 항일무장독립운동 세력의 근간이 되었다.
의병운동 | 년도 | 주축세력 |
---|---|---|
을미의병 | 1895 | 유인석, 이소응 |
을사의병 | 1905 | 최익현, 민종식, 신돌석 |
정미의병 | 1907 | 이인영 |
제주의병 | 1909 | 고승천 |
동학농민운동의 세력을 기반으로 하여 1895년 처음으로 의병이 일어났다(을미의병). 을미의병(乙未義兵)은 명성황후가 일본의 낭인들에게 시해 당한 것(을미사변)과 단발령 시행에 항거하여 충청도 유성에서 문석봉의 유성의병에 의해 발생하였다. 이때의 의병들을 거느린 의병장은 유인석과 이소응이 대표적이며 이들은 유학자를 중심으로 일반 농민들까지 그 구성이 다양하였다. 지방의 도시를 공략하여 친일 관리와 일본인을 처단하였다. 고종의 해산 권고 조칙으로 자진해산하였다.
이후 1905년에 일본의 강압에 의한 을사늑약(乙巳條約)에 대해 최익현, 민종식, 신돌석 등이 주축이 되어 을사의병이 일어났다. 을사의병(乙巳義兵)은 평민 출신의 의병장인 신돌석과 그동안 참여하지 못한 유생과 지사들이 대거 가담한 의병이었으나, 신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패해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1907년 의병이 일어나는데 이를 정미의병이라 한다. 정미의병(丁未義兵)은 일제에 의한 고종의 강제 퇴위와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령에 반발하여 일어났다. 정미의병은 해산 군인들이 합세하여 일어났으므로, 그 파급력이 거대했다. 또한 이인영은 13도의 의병을 통합해 서울 진공 작전을 계획하고 각 대사관에 국제 교전 단체로 인정해줄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서울 진공 작전은 이인영의 부친상 때문에 해산하였다. 이후 경술국치(1910년)까지 의병이 지속되었으나, 남한 대토벌 작전으로 만주지방 등지로 그 활동무대를 옮겨 항일무장독립운동으로 이어지게 된다.
1909년 고승천, 이중심, 김석명이 주도 한초의 독립운동이다. 고승천은 김석명·노상옥 등과 더불어 제주군 중면 이도리 광양동에 대장간을 차려 놓고 무기를 제조하였으며 황사평에서는 비밀리에 훈련을 추진시키는 한편, 재정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고승천은 더 많은 동지를 규합하기 위하여 제주군 중면 이도리 광양동에 거주하는 김석조, 제주성 서문 밖에 거주하는 훈장 고성모, 오라리 훈장 고성찬에게 의병의 발동자로 참여해 줄 것을 권유하였으나 거절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고승천은 의병의 거사를 더 이상 늦출 수 없다고 생각하고 1909년 2월 25일 제주군 중면 이도리 광양동 조병생의 집에서 의병을 일으키기 위한 구체적인 회합을 도모하였다. 당시 제주 의병의 창의자는 제주군 중면 이도리 광양동에 거주하는 고승천 외 8명과 제주군 신우면 어음리에 거주하는 한영근 등 총 10명이었다. 회합에서 창의자들은 거사일을 1909년 3월 3일, 거사 장소를 관덕정으로 결정하고 의병장에 고승천과 이중심을 추대하였다. 창의소는 회합을 가졌던 조병생의 집으로 생각된다. 창의 당일 고승천·김만석·김재돌·양남석·조병생 등은 대정군으로 가서 모병을 시작하고, 김석명·양만평·이중심·한영근 등은 의병을 모았다가 고승천이 거사하는 것을 기다려 가담할 것을 약속하였다. 1909년 2월 25일 창의와 함께 고승천·이중심·김석명 등 3인은 다음과 같은 격문을 작성하여 동일 오시에 발통하였다. 격문에는 먼저 의병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는 대의명분을 밝혔다. 다음으로 왜적의 무리가 우리의 강토를 짓밟고 있는 지금, 각 지역에서 국권 수호를 위하여 총궐기하였으니 우리 제주도민도 죽음으로써 왜적을 격퇴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 또한, 구체적인 행동 내용을 담은 「통고사(通告事)」를 동쪽의 화북으로부터 남쪽, 서쪽, 북쪽 순으로 마지막 용담에 이르기까지 제주도를 순회토록 하였다. 의병의 모병은 만인을 목표로 하고 있었으며 불참 이장의 사형, 선박의 출입 금지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였다. 회의 시 선포한다는 조항은 아마 일제의 침략으로 잘못된 열 가지 조항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조항의 주요 내용은 전통적 윤리 질서의 훼손, 산천단 제사의 철폐, 농토·산림·해저 측량과 세금에 대한 것이 대부분으로 당시 일제의 경제적 침략에 대한 제주도민의 항일 감정을 잘 반영해 주고 있다. 1909년 3월 1일 창의를 미리 눈치 챈 일본 경찰에 의하여 고승천과 김만석이 체포되었으나 3월 2일 밤 창의자 양만평과 노상옥은 제주군 신우면 어음리에서 이장을 협박하여 3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였으며 어도리에서도 30여 명을 규합하였다. 그러나 귀덕리에서의 모병이 실패하자 창의의 성공이 여의치 않음을 느낀 양만평과 노상옥은 나머지 의병들을 모두 해산시키고 도주하였다.[1] 강유석과 송계홍등이 주도한 제주유생의 민란, 방성칠란, 이재수란 때에 형성된 저항역량은 소멸되지 않고 남아 제주의병에 가담하였고, 이후 제주도의 조천만세운동같은 제주의 항일 독립운동으로도 계승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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