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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가 또는 객가(客家)(중국어: 客家, 하카어 백화자: hak-kâ, 병음: kèjiā)는 한족의 여러 민계(民系, Han Chinese subgroup) 중 하나이다. 원래 화북(華北)의 황하(黃河)지역에 살고 있던 후한 시대(後漢) 한족들의 자손이라 자칭한다. 한족들은 튀르크계 몽골계 등 이민족의 지배를 받아 피지배민족으로서 혼혈화됐지만 소수가 남쪽으로 도망쳐 객가라고 불리며 살아왔다.

간략 정보 근연민족 ...
객가인
客家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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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인구
7500만-1억 2000만
언어
객가어(客家語), 대만어(臺語), 광동어(廣東話), 중국어
종교
도교, 유교, 조상숭배, 대승불교, 기독교
민족계통
한장족
근연민족 한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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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西晉)의 영가의 난(永嘉之亂)을 피해 황하 지역에 살던 한족 중에 소수들이 남쪽으로 이주한것을 보통 1차 이민으로, 이후 대다수의 하카인 이주는 북위(北魏)와 당(唐) 등 튀르크계 선비족(鮮卑族) 국가들이 생겨나 남쪽으로 도망친 한족들과 송(宋)대에 북방 몽골계 군사들의 침입을 피하여 소수의 한족들이 광둥성(廣東省), 장시성(江西省), 푸젠성(福建省)의 경계 지역에 정착하여 그들은 하카라고 불렀다. 보통 메이저우(梅州), 간저우(贛州), 팅저우(汀州), 후이저우(惠州)를 객가4주(客家四州)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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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

『진서(晉書)』 「지리지(地理志)」에 “영가 연간, 예주(豫州)가 (흉노) 석씨(石氏)에 함락되었다. 원제(元帝)가 춘곡현(春谷縣)에서 강을 건너 양양군(襄陽郡)과 번창현(繁昌縣)의 교거지(僑居地)를 세웠다. 성제(成帝) 역시 예주 교거지를 강회(江淮) 사이에 세웠고 무호(蕪湖)에 거주하였다. 이때 회수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흘러가면서 단양(丹陽)에서 갈라졌는데 회남군(淮南郡) 교거지를 세웠으며 호구(湖口)에 거하였다. 또한 당양현(當陽縣) 유민이 강을 건너 교거현을 세웠으며, 회남•노강(廬江)•안풍(安豐)을 아울렀고, 모두 예주에 소속시켰다.(永嘉之際, 豫州淪於石氏. 元帝渡江於春谷縣, 僑立襄陽郡及繁昌縣. 成帝又僑立豫州於江淮之間, 居蕪湖, 時淮南入北, 乃分丹陽, 僑立淮南郡, 居於湖口. 又以當陽縣流人渡江, 僑立為縣, 並淮南•廬江•安豐, 並屬豫州.)” 동진(東晉) 시기 이른바 의관남도(衣冠南渡)로 인해 사족(士族)이 교거(僑居)하는 교군(僑郡)이 회하(淮河) 유역 안휘성(安徽省)과 강소성(江蘇省)에 세워졌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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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주팔경대(贛州八鏡臺)

『남제서(南齊書)』 「주군지(州郡志)」에 의하면, “남연주(南兗州)는 광릉(廣陵)에 진을 쳤다. 이때 백성들이 난을 당하여 이곳으로 유입해 왔는데, 유민들인 대성(大姓)에 의탁하여 객(客)이라 했다. 대흥(大興) 4년, 원제는 조서를 내려 유민으로 하여금 본적을 없애고, 민적의 격을 질서있게 배치하여 유사에게 올려 객을 지급하는 제도를 삼았다(南兗州, 鎭廣陵. 時百姓遭難, 流移此境, 流民多庇大姓以爲客. 元帝大興四年, 詔以流民失籍, 使條民上有司, 爲給客制度.)” 라고 한다. 영가 이후, 원제는 재위 시기에 부분 군교현을 설치하여 유민을 안치했다. 1차로 교주군현(僑州郡縣)을 크게 세웠고, 왕돈(王敦)의 난을 평정한 시기까지 갔다. 설치 지점은 현재 강소성(江蘇省) 중부의 강회간(江淮間, 장강과 회하 사이)으로, 강북(江北) 광릉(廣陵) 부근에 집중되었다. 이때에 원래 유민 우두머리 희감(郗鑒)이 왕돈의 난을 평정하였고, 점차 광릉과 경구(京口) 일대에 근거지를 세웠으며, 서주(徐州)와 연주(兗州)의 자사(刺史)를 거느렸다. 동진(東晉) 첫번째 이주는 교군과 교현을 세웠으니, 광릉과 경구 일대 밑 강주(江州) 심양(潯陽)이었다. 두번째 행정구역 설치는 소준(蘇峻)의 난 평정 이후로, 현재 안휘성(安徽省) 일대에 원래의 예주 모든 군을 교거지로 설치하였다. 세번째 행정구역 설치는 동진 중기 이후 진효무제(晉孝武帝)가 옹주(雍州)를 교거주로 세우면서 성립했다. 세 차례 교거 행정구역 설치의 유민의 근원은 다르며, 목적지도 다르다.그리고 이 세 구녁은 이후 동진 3대 중요 군사 진영이 된다. 교거 행정구역 설립은 부분적으로 남하 유민에게 고토 귀향의 희망이 있었다는 것이 요인이며, 또한 중요한 이유는 유민을 받아들이고 편제하여 국가 무력의 내원이 되게 했다. 동진 정권에서 보면 중앙 무력이 약해지면서 당시 크게 의존한 현지 호강의 인력을 징발하였다. 이로 인해 맘하 유민은 국가의 중요한 징발 대상이 되었다. 태흥(太興) 4년, 조서를 내려 유민에게 북방의 본적을 없애고, 이로 인해 본적늘 정리하고 지어내어 객을 내리는 제도를 삼아, 병력 근원을 확충했다. 그러나 ‘강남은 황폐해져서 (본적을) 검사하고 확인할 수 없다(江北荒殘,不可檢實)’고 할 정도여서, 이때 돈구군(頓邱郡)과 제민군(濟岷郡) 교거군을 세우고, 조사할 수 없는 호구를 교군(僑郡)으로 넣었으며, 이를 근거로 징발을 실시했다. 교거 행정 구역 수립은 유민 안치용으로만 한 것이 아니라, 유민 본적 확인이 불가한 상황에서 이들을 고향 적에서 낙적(落籍)하게 하고 국가가 인력 자원을 장악하게 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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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주서호(惠州西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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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거지

주요 거주지는 광둥성, 푸젠성, 장시성, 후난성, 쓰촨성 등의 산간부다.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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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젠성에 있는 하카인들의 전통 건물 '토루'

하카의 사람들은 주변의 평지에 사는 다른 혼혈화된 한족 집단과는 달리 산간부에 많이 거주하며, 독특한 언어와 문화를 가지고 있다. 그 때문에 역사적으로 다른 집단과 알력을 일으켜 짓밟힌 적이 많다. 소수파로 세력이 많지 않기 때문에 중앙 정권이나 왕조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으나 자주 실패하였다. 이주민들은 일반적으로 토지의 소유가 어려웠기 때문에 유통이나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교직에도 많은 사람들이 종사하고 있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아시아의 유태인’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푸젠 토루

세계문화유산으로 잘 알려져 있는 푸젠 토루(福建土壘: 원형은 원 누각, 정방형 등 사각형은 방루)로 불리는 독특한 집합 주택은 하카인 전체의 거주 관습이 아니라 푸젠성의 일부 산간부의 하카인들에게서 환경적인 요인으로 볼 수 있는 것으로 외부로부터의 습격을 막기 위해서 만들어졌으며, 일족이 모여 거주하고 있다. 또 광둥성이나 홍콩에서는 「위(圍)」라고 불리는 성벽 같이 마을 밖에 외성을 쌓아 올리는 형식도 있었다. 외관의 모습이 핵 사일로(발사대)를 닮아, 미중 국교 수립 전에 미국이 위성 사진 판독을 잘못하여 중국 공산당이 실효 지배하는 중국 대륙 각지에 대규모 핵기지가 건설되고 있다는 오해를 받았던 적도 있다.

2008년 푸젠 토루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같이 보기

각주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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