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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무신 (?–1011)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하공진(河拱辰, ?~1011년 12월[2])은 고려의 무신이다.
994년(성종 13년) 압강도 구당사(鴨江渡勾當使)가 되고,[3] 목종 12년(1009년) 정5품 중랑장(中郞將)으로 강조의 정변에 가담하였다.[4] 목종이 병들어 자리에 눕자 중랑장 탁사정, 친종장군 유방 등과 함께 목종이 거처하는 궁궐주변을 호위하는 책임을 맡았다. 얼마 뒤 문관직으로 개반하여 상서좌사낭중이 되었다.[1]
1010년 현종 원년에 동서 양계(東西兩界)를 지키면서 임의로 군대를 동원하여 동여진의 촌락을 치다가 패한 일이 드러나 유배를 당하였다.[5] 그 해 거란이 목종의 시해를 빌미로, 고려에 또 다시 침입하자 유배에서 풀려나 군 지휘관으로 복직하게 된다.[6]
요나라(거란)이 쳐들어오자 고영기(高英起)와 함께 군사 20여명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피난 중이던 현종을 뒤따라가 양주에서 거란군의 철수 교섭을 자청하였다.[7] 그는 현종의 사절로 요 성종을 만나서 현종의 친정과 더불어 스스로 볼모가 되는 조건으로 군대를 철수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 거란은 강조를 죽임으로써 강조의 죄를 묻는다는 당초의 대의명분도 세웠고, 병참선의 확보도 어려워 끝까지 항전하는 고려에서 퇴각하였다.
하공진은 고영기와 함께 거란에 볼모로 잡혀가 요 성종의 신임을 받게 되었으나, 여러 차례 탈출을 계획하다가 발각되어 연경으로 이송되어 양가의 딸을 아내로 맞아 살면서 철저한 감시를 받고 살았다.[1] 하지만 요 성종은 하공진의 인품과 교양, 문무를 겸비한 외교관으로 그가 지닌 고려에 대한 충성심을 높이 평가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신하로 섬기기를 간절히 원하였다.[2]
하공진은 평소 저자거리에서 준마(駿馬)를 많이 사 고려로 가는 길에 배치하여 두고, 귀국을 꾀하다가 탄로가 나 요 성종의 국문(鞠問)을 받게 되었다. 1011년(현종 2년)에 요 성종은 온갖 악형과 회유로 신하가 될 것을 회유하였으나 이를 완강히 거절하였다.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모욕스러운 말로 응대하며 거란왕을 크게 격분시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고려 조정에서는 하공진의 공을 잊지 않고그가 사망 후 무려 300년 동안 그 후손들이 공신대우를 받아 관직에 진출하게 되었다. 진주하씨 시랑공파의 시조이다.
1052년(문종 6년)에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리고, 상서공부시랑(尙書工部侍郞)을 추증하였으며, 그의 아들 하측충에게는 5품직을 뛰어 넘는 관직을 주었다.[1]
좌사낭중(左司郞中) 하공진은 통화(統和) 28년(1010년)에 거란군이 침입하자 죽음을 무릅쓰고 적의 군영으로 가 세 치의 혀를 휘둘러 대군을 물리쳤으니 공신각에 초상을 모셔야 할 것이다.
진주성 내에 있는 경절사에 배향되어 있다. 경절사 앞에는 하공진 선생의 사적비가 서 있고, 맞은 편으로 경절사가 있다.
고려 시대의 공신인 하공진(河拱辰)을 소재로 한 조희로, 1110년(예종 5년)에 연희된 잡희 또는 잡극이다. 《고려사》의 기록에는 “배우가 있어 놀이로써 선대공신을 기렸다”고 전하고 있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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