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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태생의 마르크스주의자, 정치인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스페인어: Ernesto "Che" Guevara, /ˈtʃe ɣeˈβaɾa/[1], 1928년 6월 14일 ~ 1967년 10월 9일)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마르크스-레닌주의 혁명가이다. 의사로 성장한 그는 쿠바의 게릴라 지도자가 되었고 쿠바 혁명 이후 정치인, 외교관으로 활동하였다. 게릴라 활동에 대한 군사 이론을 만들기도 하였고 여러 저작을 펴낸 저술가이기도 하다. 볼리비아에서 군사 정권에 대항하는 게릴라 활동 중에 체포되어 사형되었다. 대중에게 체 게바라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사후 여러 대중 문화에서 저항의 상징으로 다루어졌다.[2] 체는 아르헨티나 스페인어에서 "어이" 또는 "이보게"하고 다른 사람을 부를 때 쓰는 말에서 왔다.[3]
체 게바라 Ernesto Guevara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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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산업부 장관 | |
임기 | 1961년 2월 11일 ~ 1965년 3월 24일 |
대통령 | 피델 카스트로 |
이름 | |
별명 | 푸세(Furibundo de la Serna), 아비나 백작 |
신상정보 | |
출생일 | 1928년 6월 14일 |
출생지 | 아르헨티나 산타페주 로사리오 |
사망일 | 1967년 10월 9일 | (39세)
사망지 | 볼리비아 라 이게라 |
국적 | 아르헨티나, 쿠바 |
학력 |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교 의과대학 박사 |
경력 | 쿠바 공업부 장관 쿠바 아바나 대학교 겸임교수 |
정당 | 7월 26일 운동 (1955년 ~ 1962년) 쿠바 사회주의 혁명연합당 (1962년 ~ 1965년) 쿠바 공산당 (1965년 ~ 1967년) |
배우자 | 위키 게베라 |
서명 |
아르헨티나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에르네스토 게바라는 의과 대학시절 남아메리카를 두루 여행하면서 자신이 본 빈곤과 기아의 참상을 통해 급진적 사상을 지니게 되었다.[4][5] 미국 중앙정보국이 개입하여 1954년 과테말라 쿠데타를 일으켜 하코보 아르벤스가 이끄는 과테말라 혁명을 좌절시키는 것을 보면서 게바라는 반자본주의 혁명을 통한 국가 전복이 남아메리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라고 생각하게 된다.[4] 멕시코에서 피델 카스트로와 라울 카스트로 형제를 만난 게바라는 쿠바 혁명 조직인 7·26 운동에 합류하여 요트 그란마호를 타고 쿠바로 들어갔다.[6] 게바라는 군의관으로서 게릴라 활동을 시작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부사령관이 되었다.[7]
쿠바 혁명 이후 게바라는 새 정부의 핵심적 인물이 되었다. 그는 혁명 이후 정치 개혁의 실행자였고[8] 혁명 정부의 초대 산업부 장관을 시작으로 토지 개혁, 중앙 은행의 설립, 쿠바 혁명군의 건군과 같은 일들을 주도하였다. 미국이 피그스만 침공을 일으키자 이에 대한 군사 대응을 지휘하였고[9] 이 사건은 쿠바가 소련의 핵무기를 제공 받는 쿠바 미사일 위기를 불러오게 된다.
1928년 6월 14일, 아르헨티나 로사리오의 바스크-아일랜드 혈통 관련 중산층 가정에서 5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그의 생년월일은 일반적으로 6월 14일로 기록되었으나, 이는 당시 보수적인 아르헨티나 사회에서 게바라의 부모가 혼전 임신을 숨기기 위한 조치였다. 결혼 이후의 정상적인 임신을 알리기 위하여 1개월 늦게 출생등록을 한 것이다. 아버지 에두아르 라파엘 에르네스토 게바라 린치와 무신론자였던 어머니 셀리아 데 라 세르나 Y 죠사는 사회주의자는 아니었으나 진보적인 사고를 갖고 있었다.[10] 또한 1824년에 시몬 볼리바르, 안토니오 호세 데 수크레 등 라틴 아메리카 해방군과 아야쿠쵸에서 싸운 페루 부통령 호세 드 라셀나의 후예이고 경제적으로 풍족한 가정이었다.
미숙아로 태어난 체 게바라는 폐렴에 걸려 2살 때 심한 천식을 앓는다. 체 게바라의 부모님은 아들의 건강을 우선시해서 천식 치료에 좋은 환경을 찾아 몇 번이나 이사를 했다. 어렸을 때는 경련을 동반하는 천식 발작에 위기에 빠진 적도 많았으며, 그 때마다 산소 흡입기를 사용하여 회복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게바라는 럭비같은 격렬한 스포츠를 사랑했으며, 발작이 일어날 때에는 산소 흡입기를 사용하며 경기에 돌아오곤 하였다. 게바라의 중증 천식은 그를 평생 괴롭혔다.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교에서 의학을 배웠다. 재학 중이던 1951년에 나이 많은 친구, 알베르토 그라나도와 함께 오토바이로 라틴아메리카를 돌아 방랑 여행을 경험하였다. 이 때 라틴아메리카의 각 나라들은 우익 쿠데타 정부가 들어서면서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경험했지만, 빈부의 격차와 노동착취가 매우 심했으며, 부유층은 최상의 삶을 누리는 반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극도로 빈곤한 삶을 살아야했다. 이러한 상황을 견문하면서 아메리카 대륙에서 나타난 민중에 대한 억압과 착취의 현실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으며, 마르크스주의에 공감을 하게 되었다 (이것은 《라틴아메리카 여행 기록》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어 이것을 원작으로 한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도 제작되었다). 이 여행을 계기로 게바라는 평범한 의사에서 혁명가로의 첫 의식 변화가 이루어졌다.
1952년에 볼리비아 인민운동에 참가하여 외국자본의 유치와 산업 민영화에 반대하였다. 1953년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의학대학을 졸업한 후 25일만에 친구 카를로스 페레로와 함께 다시 라틴아메리카 방랑 여행을 떠난다.
후안 페론의 독재정권 하에 있던 아르헨티나를 떠나 당초 베네수엘라 구라나도를 방문할 예정이었지만, 볼리비아 혁명이 진행되는 볼리비아를 여행하면서, 그때까지 억압을 받아왔던 인디오가 해방되어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로운 분위기가 감돌고 있는데 큰 충격을 받았다. 그 후 페루, 에콰도르, 파나마, 코스타리카, 니카라과, 온두라스, 엘살바도르를 여행하고 하코보 아르벤스 시대 포프리스모(사회주의로 보는 견해도 있다) 정권 하에 있는 과테말라에 도착했다.
과테말라에서 의사를 계속하다가 조국 페루에서 쫓겨나 과테말라에 망명하고 있던 여성운동가 《일다 가데아》와 만나 교감하여 사회주의에 급속히 눈을 뜨고, 그녀와 결혼한다.
1950년 10월의 선거로 성립된 과테말라 아루벤스 정부는, 스페인 식민 시대부터 지속된 구조화된 수탈과 오랜 독재 부패 정권에 의해 유린된 사회의 개혁을 진행하고 있었다. 미국기업(유나이티드 프루츠사)의 착취에서 경제적 독립을 달성하고, 과테말라의 농업 자본주의 경제 확립을 위해 마야계 인디오의 복권을 시도하였다. 그때까지 착취만 당하였던 소작농에 대한 농지 분배 등 과테말라 혁명이라 불릴 정도의 급진적인 개혁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루벤스 정권이 유나이티드 프루츠 사의 사유지에 손을 쓰면서 미국 정부는 과테말라를 맹비난 하였다. 게바라는 이 정부의 활동을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자유롭고 민주적인 나라" 라고 평했다. 그러나 군부의 배신으로 CIA가 밀어준 반정부 세력 '까스띠요 아르마스'에 의해 아루벤스 정부가 전복되면서 (PBSUCCESS 전략), 민주 선거로 선출된 과테말라 정통 혁명 정권은 붕괴되었다. 이 사건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게바라는 무력에 의한 라틴 아메리카 혁명을 진심으로 지향하게 됐다.
그 후 새로 집권한 아르마스 정권에 의해 게바라의 암살령이 내려졌기 때문에, 아내 가데와 함께 실망과 분노를 안고 멕시코로 망명하였다. 1955년 7월 이곳에 망명 중인 반체제 쿠바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와 만난다. 7월 26일 쿠바 풀헨시오 바티스타 독재 정권 타도를 목표로 동료들을 인솔하고 있는 피델 카스트로에 깊이 공감하게 되었다. 게바라는 이때, 하룻밤 사이에 반 바티스타 무장 게릴라 투쟁에 참여를 결심했다고 한다. 이렇게 스페인 내전의 공화파의 생존자였던 알베르트 바요 중령에 의한 본격적인 군사 훈련을 받고, 쿠바 상륙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는 아내와 딸 이루디다를 멕시코에 남겨두고 혼자서 쿠바로 향한다.
1956년 11월 25일, 피델 카스트로를 게릴라 지도자로 하여 총 82명이 8인승 레저 보트 "데셈바르코(그란마)"에 탑승하였다. 그러나 너무 많은 인원이 타서 위생 등의 환경이 열악하였다. 또한 눈에 띄지 않기 위해, 폭풍 속에 출발했기 때문에 7일 후 12월 쿠바에 도착했을 때 많이 지쳤고, 사기도 떨어져 있었다. 혁명군의 상륙 계획을 피델 카스트로가 미리 발표하였기 때문에 그 내용이 쿠바 정부에 유출되어 반란군은 도착 직후부터 정부군의 습격을 받아 괴멸 상태가 되었다. 결국 살아서 도착할 수 있었던 사람은 82명 중 게바라, 피델 카스트로, 라울 카스트로, 카밀로 시엔푸에고스, 루이스 크레스포, 호세 모얀, 훌리오 디아즈, 카리스트 가르시아, 카를로스 베르데무스 등 12명뿐이었다. (생존자가 17명이라는 설도 있다.)
당시 피델 카스트로는 혁명에 실패하여 감옥살이를 했었는데, 재판 당시 피델 카스트로는 판사 앞에서 〈역사가 나중에 나를 다시 평가할 것〉이라는 유명한 말을 한다. 체 게바라 등의 동지들의 참여로 다시한번 혁명에 도전하여 친미, 친서방 성향의 풀헨시오 바티스타 독재정권을 붕괴시킨다.
상륙 후, 혁명군은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맥에 잠복하여, 산골 마을을 전전하면서 군 재건을 도모했다. 이후 쿠바 국내에서 활동하던 반정부 세력과 합류에 성공하여 반군 세력은 점차 강화되어 갔다. 당초 부대에서 게바라의 역할은 군의관이었지만, 혁명군의 정치 방송을 하는 라디오 방송국(라디오 레베르데)을 설립하는 등 정부군과 전투에서 그 인내심과 성실, 상황 분석, 냉정한 판단력,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뛰어난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점차 반군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도착 1년 후 병력 증가에 따른 부대 개편 시, 카밀로와 라울 등을 그대로 두어, 피델 카스트로부터 제 2군(이름은 제 4군) '코만단테'(사령관, 지휘관 아래에 분대와 분대를 지휘하는 "대장"이 있다)에 임명되어 지휘권과 소령의 계급을 받아 카스트로에 이어 명실상부한 혁명군 이인자가 되었다.
1958년 12월 29일에 제 2군을 이끌고 쿠바 제 2의 도시 산타클라라에 돌입한다. 많은 시민의 가세로 적들을 제압하고 수도 아바나로 가는 길을 열었다. 1959년 1월 1일 오전 2시 10분 후 풀헨시오 바티스타가 도미니카 공화국에 망명하자, 1월 8일 피델 카스트로가 아바나에 입성하여, 쿠바 혁명이 달성되었다. 게바라는 혁명적인 업적과 헌신적인 작업으로 쿠바 시민권을 부여받아 쿠바 새 정부의 각료가 되기에 이르렀다.
1959년 7월 15일, 31세의 게바라는 쿠바의 통상사절단을 인솔하여 일본을 방문하였다. 당시 일본에서의 지명도는 낮아 『아사히신문』이 「카스트로・콧수염[11]」라고 야유와 같이 보도한 것뿐으로, 타사는 무시하였다. 7월 23일에는 오전 중에 아이치현의 토요타 자동차공장의 트럭과 지프형 4륜구동차의 제조라인을 견학, 오후에는 신미쯔비시 중공의 비행기 제작장을 방문하였다. 24일에는 쿠보타철공사카이공장에서 농업기계의 제작을 견학하고 실제로 농업기계를 시승해 본 뒤, 마루베니, 카네보를 돌아보고 저녁에 오사카 상공회의소 주최의 파티에 출석하였다. 이 밖에도 게바라는 통상을 위하여 도쿄도 내의 제국호텔에서 이케다 하야토 통상상과 15분간 면담을 하고, 소니의 트랜지스터 연구소와 영화촬영소, 비료공장 등을 돌아보았다.
7월 24일의 오사카에 숙박했을 때, 히로시마가 오사카에서 멀지 않다는 것을 알고, 다음날 코베의 카와사키 조선소를 시찰한 후에 예정을 변경하여 오마르 페르난데스대위와마리오 아르스가라이 주일대사를 동반하여 전일본공수기로 이와쿠니공항으로 날아갔다. 히로시마현 직원안내를 받아,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내의 원폭 희생자 위령비에 헌화하고, 원폭자료관과 원폭병원을 방문하는 외에, 히로시마 현청을 내방하여 당시의 히로시마 현지사였던 오하라 히로오와 회담하였다.[12]。딸 알레이다 게바라도 2008년 5월에 원폭희생자 위령비에 방문하였다.[13]。
한편, 게바라의 히로시마행에 대하여는, 「시내의 호텔에서 섬유업자와 만날 예정이었으나, 숙소를 몰래 빠져나와 야간열차로 히로시마에 갔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이 설을 뒷받침할 증거는 오마르 페르난데스의 주장 이외에는 없고, 당시의 통역이었던 히로시마현 외사과의 미구치 켄조가 비행기로의 공식내방을 말하고 있는 것 외에, 1972년 시점에서 히로시마현 총무과에는 당시의 기록도 남아있다. 일본어를 전혀 모르는 세 사람이 몰래 빠져나가 야간열차를 탄다는 것의 부자연스러움, 무단으로 빠져나왔을 경우의 일본측의 반응에 대하여 언급이 없는 점, 카스트로가 일시적으로 수상을 해임하는 쿠바 본국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사절단 대표인 게바라가 방문국인 일본정부와 상공단체에 대하여 그러한 배려없는 행동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점, 또한 야간열차로 빠져나왔음에도 히로시마에서 현청직원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자연스럽지 못하여, 페르난데스의 기억이 틀리거나 혹은 각색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14]。
이 때, 『츄고쿠신문』의 기자였던 하야시 리쯔오가 단독취재하였다. 그 때 게바라는 「왜 일본인은 미국에 대하여 원폭투하의 책임을 묻지 않는가」하고 물었다고 한다. 게바라가 히로시마의 상황을 쿠바에 전한 이후, 쿠바에서는 현재에도 초등교육에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의 원폭투하를 가르치고 있다.
일본각지를 시찰한 후, 27일에 일본을 떠나 인도네시아, 파키스탄, 수단, 유고슬라비아, 가나, 모로코를 방문하고 9월 8일에 하바나로 돌아갔다. 이듬해에는 일본과 쿠바의 통상협정이 체결되고, 현재까지도 지속 중이다.
그는 쿠바 혁명 승리 후 쿠바 공산당과 쿠바 혁명정부의 중요직책에 있으면서 쿠바 혁명에서 얻은 혁명적인 성과들을 지키며 혁명을 더욱 전진시키기 위하여 정력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한편 체 게바라는 사형제도를 부활시켜 친서방 또는 반혁명세력 약 14,000명을 처형하였다.[15] 쿠바혁명 승리 후 얼마간 아바나의 라 까바니아 요새수비대 사령관으로 있다가 산업성장을 조종하는 책임자로 있었으며 동시에 쿠바의 토지개혁에도 적극적으로 참가하였다. 1959년 11월∼1961년 2월에 쿠바국립은행총재, 1961년 2월부터 쿠바산업상도 함께 겸하였으며 1962년에 쿠바통일혁명조직 전국지도부 및 비서국에서 일하여 '쿠바의 두뇌'라 일컬어졌다.
그는 쿠바에서 많은 일들을 했음에도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일을 찾아 떠났다. 1965년 4월, "쿠바에서는 모든 일이 끝났다"라는 편지를 남기고 행방이 묘연해졌다.[16] 이 때 쿠바를 벗어나 볼리비아로 투쟁무대를 옮겨 바리엔토스 정권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벌였으나, 1967년 10월 9일 미국이 가세한 볼리비아 정부군에게 잡혀 총살당했다. 그의 나이는 39세였다. 총살 후 그의 시체는 볼리비아 정권에 의해 언론에 공개되었으나, 체 게바라를 하찮은 인간으로 보이게 하려는 의도와 달리, 그의 모습이 예수와 비교되면서 다시 많은 이들의 추앙을 받게 되었다. 그의 시신은 30년후 볼리비아 안데스에서 발굴되어 그가 혁명가로 활동했던 쿠바에 안장되었다.[17]
체 게바라는 사후에 전 세계적으로 '체 게바라 열풍'을 일으킬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아르헨티나 의사의 자리를 버리고 전 아메리카의 쿠데타 정부를 타도하기 위해 혁명에 뛰어들었으며, 쿠바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고도 이를 박차고 또 다른 혁명을 위해 헌신하는 숭고한 모습이 사람들을 감동시켰기 때문이다.[18]
하지만 체 게바라가 쿠바, 콩고, 볼리비아에서 벌인 일련의 혁명과정에서 반혁명 세력과 수많은 농민들의 피해를 가져왔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한다. 당시 쿠바에 살았던 사람들이 체 게바라를 ‘아바나 백작’이라고 부르기도 했다는 주장도 있다.[15]
게바라는 1950년대 공부를 마치기 전에 오토바이 여행을 하였다. 이 여행은 억압받고 가난한 그리고 한센병으로 고통받는 인디오들과 볼리비아 민중들의 아픔을 이해하는 기회였다. 당시 체 게바라의 기록은 1996년 《라틴아메리카 여행 기록(Notas de viaje por América Latina》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고, 《모터사이클 다이어리(Diario de motocicleta)》라는 영화로 제작되어 2004년에 개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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