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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덕종 때인 1033년부터 1044년까지 평장사(平章事) 유소(柳韶)가 여진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한반도 북부에 쌓은 장성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천리장성(千里長城)은 고려 덕종 때인 1033년부터 평장사(平章事) 유소(柳韶)가 여진과 거란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쌓은 장성이다. 고려는 개국 초기부터 북평의 거란·여진족의 침입에 대비하여 장성을 쌓으려 하였는데, 이 계획이 실행되기는 1033년(덕종 2)부터였다. 이때 고려가 요나라의 세 차례 침입을 모두 막아낸 뒤 요나라와 화친하게 된다. 고려 조정은 요나라의 재침과 여진족의 침략을 막을 목적으로 축성하게 된다.
천리장성의 규모는 매우 컸던 것으로서 서쪽의 압록강 옆 인주(麟州)[1]로부터 동쪽으로 의주 근처인 위원(威遠)[2]·흥화(興化)[3]·정주(靜州)·영해(寧海)·정융(定戎)을 비롯한 오늘날의 평안남북도인 운주(雲州)[4]·안수(安水)[5]·청색(淸塞)[6]·영원(寧遠)·맹주(孟州)[7]·삭주(朔州) 등 성(城)을 거쳐 영흥 지방인 요덕(耀德)·정변(靜邊)·화주(和州) 성에 이르러 정평 해안인 도련포[8]까지 뻗어, 길이가 천여 리(里), 높이와 폭이 각각 25자(尺)의 석축이었다.
천리장성은 1033년 경 단기간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고, 덕종 이전에 대대로 북방에 쌓은 여러 성책을 연결하고 보축(補築)한 것으로, 그 완성 시기는 1044년(정종(靖宗) 10)경의 일이었다. 그렇지만 덕종 때 유소(柳韶)가 축조(築造)의 대부분을 끝마쳐 장성의 윤곽이 형성되었다.
유소는 그 공으로 1034년(덕종 3) 3월에 추충척경공신(推忠拓境功臣)의 호를 받았다. 이 장성의 축조는 거란에게 큰 충격을 주어 항의를 받았으나, 고려에선 이에 적의가 없음을 밝힌 일도 있었다. 이 장성은 그 뒤에도 오랫동안 고려의 북방 방어선으로 이용되었으며, 그 유적은 지금도 신의주시, 피현군 등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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