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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지(竹旨, ?~?)는 신라의 대신이자, 화랑 출신 장군이다. 김유신과 함께 백제의 군사를 격파하고, 나당연합군의 고구려 정벌에도 참전하였으며 재상을 지냈다. 화랑 득오가 그를 흠모하여 지은 향가 《모죽지랑가》가 전해진다.
술종이 삭주도독이 되어 임지로 가던 중 죽지령(竹旨嶺)[주 1]이라는 곳에서 한 거사(居士)를 만났고 부임한 지 1달이 되었을 즈음에 거사가 죽었는데, 곧 김술종의 부인이 기이한 꿈을 꾸고는 아들을 낳았는데 술종공이 이를 거사가 환생한 것이라 여기고는 거사와 처음 만났던 곳의 지명을 따서 이름을 죽지라 했다.[2]
죽지는 이후 649년(진덕여왕 3년) 8월에 백제의 장군 은상이 쳐들어오자, 진춘, 천존 등과 함께 김유신의 휘하 장군으로 참전하여 도살성에서 대승을 거두었다.[3] 651년(진덕여왕 5년) 2월에는 새로 설치된 집사부에 파진찬 관등으로 중시가 되어[4] 655년(태종무열왕 2년) 1월까지[5] 기밀사무를 관장하였다.[4] 661년(문무왕 원년) 4월에는 여러 장수들과 함께 백제부흥군과 싸웠다가 패하였으나,[6] 7월에는 천품과 함께 귀당총관(貴幢摠管)에 임명되어 다시 전선에 나섰다.[7] 668년(문무왕 8년) 6월에는 이찬 관등으로 진춘과 함께 경정총관(京停摠管)에 임명되어[8] 같은해 10월 고구려 정벌에서 공을 인정받아 각간 관등이 됐다.[9]
문무왕 10년(670) 7월에는 천존과 함께 웅진도독부를 공격하여 7성을 빼앗고 2천 명을 죽였다.[10] 문무왕 11년(671) 6월에는 백제 잔당들의 가림성으로 가서 그 곳의 벼를 짓밟아 식량보급을 차단했으며[11] 당나라 군사와 석성[주 2]에서 싸워 5천 3백 명의 목을 베고, 백제의 장군 두 명과 당나라의 과의(果毅) 여섯 명을 포로로 잡았다.[12] 이후 기록이 없어 행적은 알 수 없지만 진덕여왕, 태종무열왕, 문무왕, 신문왕의 4대에 걸쳐 재상이 되어 나라를 안정케하였다고 하였다.[2]
효소왕대 모량리(牟粱)에서 아찬 관등을 지내던 익선(益宣)은 죽지랑의 낭도인 득오(得烏)[주 3]를 차출하여 부역시켰다. 죽지랑은 익선에게 득오의 휴가를 청하여 함께 돌아오고자 하였으나 이를 거절당하였고, 사리(使吏) 간진(侃珍)의 도움으로 득오를 데려올 수 있었다.[13] 익선의 악행을 들은 화주(花主)는 익선을 벌하고자 하였으나 그가 도망치자 그 아들을 대신 벌하였다.[1] 이 일로 인해 모량리 사람은 벼슬할 수 없게 되었다.[13] 후에 득오가 죽지랑을 기리며 《모죽지랑가》를 지었다.
得烏去隱春皆林米 간 봄 그리워하매
毛冬居叱哭屋尸以憂音 (임께서 더) 못 살으사 울어 설워하더이다
阿冬音乃叱好支賜烏隱 애닯음 나토시던 모습이
貌史年數就音墮支行齊 해 거듭하는 즈음에 가이더이다
目煙廻於尸七史伊衣 눈 돌이킬 새
逢烏支惡知作乎下是 만나 뵙기 어찌 지으오리까
郞也慕理尸心未 行乎尸道尸 낭이여, 그리는 마음에 가올 길
蓬次叱巷中宿尸夜音有叱下是 다봊 마을에 잘 밤 있사오리까— 득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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