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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의 경제학자 (1883–1946)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제1대 케인스 남작 존 메이너드 케인스(영어: John Maynard Keynes, 1st Baron Keynes[1]of Tilton in the Country of Sussex[2], CB, 1883년 6월 5일 ~ 1946년 4월 21일)은 거시경제학과 경제 정책 분야에서 기존의 이론과 관습들을 변화시킨 영국경제학의 대표자이다. 1883년 6월 5일 영국 케임브리지에서 태어났으며, 이튼을 거쳐 케임브리지의 킹스칼리지에서 수학하고, 수학과 우등시험에서 12등으로 합격했다. 졸업 후 한 때 인도성에 근무하다가 대학에 돌아와 금융론을 강의했고, 그 후 약 20년간 앨프리드 마셜의 충실한 후계자로서 아서 세실 피구와 더불어 케임브리지학파의 쌍벽을 이루었다. 또 Royal Economic Society의 서기로 있었고 Economic Journal의 명편집자로서 잡지를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경제학잡지로 육성했다.
이 문서의 내용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2011년 5월) |
이전의 학설들을 토대로 하여 '케인스 경제학'이라는 독창적인 이론을 창시해, 경기후퇴와 불황에 대해서 재정정책을 사용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케인스의 이론들은 케인스 경제학의 뿌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거시경제학파들에도 큰 영향을 미쳐서, 케인스는 현대 거시경제학의 창시자들 중 한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20세기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경제학자로 인정받고 있기도 하다.[3]
케인스는 1930년대에 《고용·이자 및 화폐의 일반 이론》, 흔히 일반이론이라고 불리는 책을 발표하였다. 이 책은 기존의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의 시장주의를 비판함과 동시에 유효수요이론을 제시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 후엔 선진 서양국가들은 케인스의 경제정책을 채택하였다. 후에 1950년대와 1960년대에는 그의 추종자들로 인해 대부분의 서양국가들이 케인스의 이론을 채택하게 된다.
1970년대에는 석유파동 등으로 인해 세계경기가 침체하게 된다. 그에 대한 해결책으로 밀턴 프리드먼 등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의 이론이 부각되기 시작하면서 케인스학파의 영향력이 감소하게 된다.[4] 그러나 상대적일 뿐 정부의 개입을 촉구한다는 측면에서 케인스학파는 관료 사회에서 여전히 주류의 위치에 있었으며, 특히 2007~2010년 금융 위기 사태와 함께 신자유주의 노선이 쇠퇴하면서 케인스 경제학은 다시 조명받기 시작한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는 잉글랜드 케임브리지셔 주 케임브리지의 중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존 네빌 케인스(John Neville Keynes) 역시 경제학자였으며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도덕과학 강의를 하였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 플로렌스 케인스(Florence Ada Keynes)는 지역의 사회개혁가였다. 케인스는 2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마가렛이라는 여동생과 제프리라는 남동생이 있었다.
경제학자이자 케인스 전기 작가인 로버트 스키델스키(Robert Skidelsky)에 따르면 케인스의 부모는 자식들에 대한 애정이 많았고 주의도 많이 기울였다고 한다. 그들은 자식들이 언제나 돌아와서 쉴 수 있도록 평생을 같은 집에서 살았다. 케인스는 그의 아버지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케인즈가 장학금 시험을 통과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으며 케인즈가 젊을 때에 재정적 지원도 해주었다. 특히 케인스가 1929년 대공황의 시작으로 그의 자산을 거의 잃었을 때에도 존 네빌 케인즈는 자식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케인스의 어머니는 자신의 취미를 아이들에게 주었다.[5]
케인스는 유년기 시절 교육을 주로 집과 학교에서 받았다. 1892년에 세인트 페이스(St Faith) 사립 초등학교의 학생이 되기 전에 2년 동안 퍼스 스쿨 유치원(The Perse School nursery)에 다녔었다.[6]학교의 교사는 케인스는 똑똑하지만 때때로 주의력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이며 결정력이 부족한 아이라 평가하였다. 케인스는 유년기 때에 건강이 좋지 않은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에 장기 결석을 하곤 했다.
케인스는 1897년에 장학금을 받고 이튼 칼리지에 입학한다. 그 곳에서 그는 다양한 분야에서 재능을 드러냈다. 특히 수학, 고전, 역사에서 뛰어난 모습을 보였다. 이튼에서 케인스는 그의 인생의 첫사랑을 경험하게 되는데 그 상대는 후에 영국의 수상이 되는 해럴드 맥밀런(Harold Macmillan)이었다.[7] 케인스는 중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상류층 학생들과 쉽게 어울리곤 했다. 1902년 케인스는 수학을 공부하기 위해 장학금을 받고 케임브리지 대학교 킹스칼리지(King’s College)에 입학을 한다. 케인스가 철학에 큰 관심, 특히 조지 에드워드 무어(George Edward Moore)의 철학체계에 영향을 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알프레드 마셜(Alfred Marshall)은 케인스에게 경제학자가 될 것을 권유한다.[8] 케인스는 뛰어난 학생들이 모여 논쟁을 펼치는 비밀결사 케임브리지 어포슬스(Apostles Society)의 활동적인 멤버였다. 다른 멤버들과 마찬가지로 케인스 역시 졸업 후에도 사도회에 유대감을 유지 했으며, 평생동안 시간이 나면 클럽 모임에 나가곤 했다. 케인스가 케임브리지를 떠나기 전에 케임브리지 유니언 소사이어티(Cambridge Union Society)와 케임브리지 대학 문학 클럽의 의장을 역임하기도 했었다. 1904년 5월 그는 수학에서 일등으로 학사학위를 받게 된다. 그 후 2년간 가족이나 친구들과 휴일을 보내는 대신에 대학에 나가는 것에 충실하였다. 그는 논쟁에 참여하였으며 철학을 공부했고 졸업생신분으로 경제학 강의를 듣고는 했다. 그는 1905년엔 케임브리지 졸업시험(Tripos)을, 1906년엔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다.
경제학자인 해리 존슨(Harry Johnson)은 케인스의 낙관적인 성향을 이해하는데 그의 유년시절의 모습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9] 케인스는 언제나 자신이 주의를 기울이기만 한다면 어떤 문제라든지 정답을 찾을 수 있다는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선한 일을 하는 공무원의 능력에 대한 신뢰를 평생 동안 가지고 있었다.[10] 그리고 케인스의 낙관적인 성향은 두 가지 측면에서 문화의 영향도 받았다. 첫 번째는 케인스는 영국의 절정에 오른 막강한 힘을 직접 본 마지막 세대이다. 두 번째로 케인스는 또한 전문적 지식보다는 문화에 의해 통치 받을 자격이 있다고 느낀 마지막 세대이다.
경제학에 관한 케인스의 초기 관심은 주로 화폐와 외환문제에 있었으나, 제1차 세계대전 후부터는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의 고용 및 생산수준을 결정하는 요인에 관하여 종래의 경제이론을 재검토하게 되었다. 그 결과 대표적 저서인 《고용·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1936)에서 완전고용을 실현·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유방임주의가 아닌 소비와 투자, 즉 유효수요를 확보하기 위한 정부의 보완책(공공지출)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이 이론 및 이에 입각한 정책, 그 기반을 형성하는 사상의 개혁을 '케인스 혁명'이라고 한다.
흔히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이 케인스의 이론에 입각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지만, 뉴딜 정책과 케인스의 이론은 사실 우연히 비슷한 시기에 나왔을 뿐 초기에 상호 영향을 준 것은 아니었다.
이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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