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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鄭信, 1898년 ~ 1931년)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함남 홍원(洪源)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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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여준(呂準)·정안립(鄭安立)·박성태(朴性泰)·박찬익(朴贊翊) 등 39명의 동지들과 함께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3] 1919년 8월에는 서일(徐一)·김좌진(金佐鎭) 등과 함께 길림성 왕청현(吉林省汪淸縣)에 군정부를 조직하고 일제와 무력투쟁을 전개하고자 하였으며, 동년 12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개편된 뒤에는 인사국장에 취임하였다. 1920년에는 간북북부총판부(墾北北部總辦府) 재무관서 참사(參事)로서 일하였다.[2]
1922년 10월에는 상해(上海)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에 북간도 대한독립군 대표로서 참가하였으며, 1923년 2월에는 이청천(李靑天)·배천택(裵天澤)·신일헌(申日憲)·김동삼(金東三)·최기현(崔基鉉)·김철(金澈) 등과 함께 군사분과위원이 되어 활약하였다. 그리고 1924년에는 상해교민단 제110회 정기이사회에서 회계검사원으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이동녕(李東寧)이 임시정부의 국무총리에 임명되어 대통령 권한을 대행할 때에는 국무원 비서장에 임명되기도 하였다.[2]
1925년에는 다시 북간도로 돌아와 영안현(寧安縣)에서 김좌진·김혁(金赫)·나중소(羅仲昭) 등과 함께 신민부(新民府)를 조직하고 연락부 위원장으로 무장투쟁을 계속하였다. 1927년에 중앙집행위원장 김혁(金赫) 등의 간부가 체포된 뒤에는 경리부 위원장을 맡기도 하였으며, 군민의회(軍民議會)의 민사부 위원(民事部委員)으로도 활약하였다.[2]
그리고 1929년에는 신민부 군정파, 참의부(參議府)의 주류 그리고 정의부(正義府)의 이청천(李靑天)·김동삼(金東三) 등과 3부를 통합하여 민족유일독립당재만책진회(策進會)를 조직하고 김좌진·황학수(黃學秀)·김시야(金時野) 등과 함께 신민부 군정파 대표로서 혁신의회(革新議會) 및 임시기관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1929년 7월에는 중동선(中東線)일대에서 김좌진·김종진(金宗鎭)·이을규(李乙奎) 등과 함께 무정부주의(無政府主義) 이념의 실현체인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를 조직하고, 북만(北滿) 한인동포들의 민생안정에 만전을 기하였다.[2]
그러나 공산당의 사주로 김좌진이 순국한 뒤에는 그가 실질적인 지휘자로 한족총연합회를 이끌었다. 한편 1930년에는 이청천·홍진(洪震)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조직하고 선전부장으로서 일하였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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