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안(田安, ? ~ 기원전 206년)은 진나라 말기의 인물이다. 제왕 건의 손자며 항우가 책봉한 열여덟 제후왕 중 제북왕(濟北王)이다.
진나라 말기의 혼란기에 제나라를 재건한 전담(田儋)·전가(田假) 형제의 세력과는 별도로, 항우가 조나라를 구원하러 출진할 무렵에 자기 힘으로 제북군의 몇 성을 함락했으며 이를 가지고 항우에 투항했다. 이 때문에 항우의 신임을 받아, 기원전 206년에 항우가 진나라를 멸하고 각지에 제후왕들을 봉건하면서 제나라를 삼분하여 나눈 삼제(三齊)[1]의 왕 중 하나인 제북왕(濟北王)이 되었다. 서울은 옛 진나라 때 제북군(濟北郡)의 치소인 박양현(博陽縣)[2][3]에 두었다. 원래 제나라의 실권자 전영(田榮)은 항우(項羽)에게서 봉지를 받지도 못한데다, 자신이 옹립한 왕 전시(田市)가 교동국(膠東國)으로 옮겨진 데 불만을 품었으나, 전시가 이를 따르려 하자, 전시를 죽이고 제왕(齊王)을 자칭하였다. 마침내 재위 여섯 달 만에 전안(田安)은 전영의 공격을 받아 살해되었다.[4][5]
제나라 사람들은 전안의 집안을 '왕가'(王家)라 불렀고, 이 때문에 전안의 자손은 왕씨를 일컬었다. 효원황후(孝元皇后) 왕정군(王政君), 왕망(王莽)도 전안의 자손이다.[6]
왕망이 신나라를 건국하자 전안은 시호 제북민왕(濟北愍王), 묘호 왕조(王祖)로 추존되었고 신의 종묘에 신주가 봉안되었으나 23년 신나라가 멸망하자 그의 신주는 철거되었다.[7]
제국(齊國)·교동국(膠東國)·제북국(濟北國)을 일컫는다.
박양현(博陽縣)은 전한 태조(太祖) 고제 원년(高帝 元年, BC 206), 항우(項羽)가 제북국(濟北國)을 세우고 전안(田安)을 제북왕으로 봉했을 때, 제북국의 서울이 되었다. 이후 전한 태조(太祖) 고제 5년(高帝 五年, BC 202)에 이르러, 다시 제북군(濟北郡)을 설치하고, 제북군을 나누어 박양군(博陽郡)을 설치했다. 이후 고제 6년(高帝六年, BC 201)에 이르러, 군치(郡治)를 박양현(博陽縣)에서 동평릉현(東平陵縣)으로 옮기고 군명(郡名)을 박양군(博陽郡)에서 제남군(濟南郡)으로 바꿨다.
《漢書卷·九十九下》:九廟:一曰黃帝太初祖廟,二曰帝虞始祖昭廟,三曰陳胡王統祖穆廟,四曰齊敬王世祖昭廟,五曰濟北愍王王祖穆廟,凡五廟不墮云;六曰濟南伯王尊禰昭廟,七曰元城孺王尊禰穆廟,八曰陽平頃王戚禰昭廟,九曰新都顯王戚禰穆廟。
제북왕(濟北王) 전안(田安)의 손자로서, 일가의 성을 전씨(田氏)에서 왕씨(王氏)로 개성(改姓)한 인물이다.
자는 치군(稚君)으로, 왕하(王賀)의 장남이다. 전한 고종(高宗) 원제(元帝) 초원 2년(初元二年, BC 47) 4월, 양평후(陽平侯)에 봉해졌고 영광 2년(永光二年, BC 42) 사망하였다. 시호는 경(頃)이다.
왕금과 동생 왕홍(王弘)은 청주(靑州) 제남군(濟南郡) 동평릉현(東平陵縣)에서 태어났는데, 할아버지 왕수(王遂)가 일가를 이끌고 동평릉현에서 기주(冀州) 위군(魏郡) 원성현으로 이거(移居)했다. 그 후대는 전부 원성현에서 나고 자랐다.
원시 4년(元始四年, AD 4)에 탕목읍을 하사받고 광은군(廣恩君)으로 봉해짐.
광은군 왕군협의 아들로, 자는 자홍(子鴻) 또는 자유(子儒). 아버지의 집안은 미약하였다고 하며 아버지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원시 4년(元始四年, AD 4)에 탕목읍을 하사받고 광혜군(廣惠君)으로 봉해짐.
원시 4년(元始四年, AD 4)에 탕목읍을 하사받고 광시군(廣施君)으로 봉해짐.
자는 원경(元卿)으로 왕망(王莽)의 아버지다. 요절한 터(蚤死)라, 형제들 가운데 유일하게 작위를 받지 못하였으나, 영시 원년(永始元年, BC 16)에 신도애후(新都侯)라는 봉호와 애(哀)라는 시호를 받았다. 신나라가 서자, 황제가 된 아들 왕망이 자신의 아버지를 신도현왕(新都顯王)으로 추증하였다.
왕만의 장남이자 왕망(王莽)의 형으로, 어머니는 공현군 거씨(功顯君 渠氏(?~AD 8).)다. 왕영은 제조(諸曹)가 되었으나, 아버지 왕만처럼 요절했다. 사후에 연공후(衍功侯)에 봉해졌다.
왕영의 아들로, 요절한 아버지의 후위를 습작(襲爵)하였다. 사위(司威) 진숭(陳崇) 상주(上奏)하여, 연공후(衍功侯) 왕광이 집금오(執金吾) 두황(竇況)으로 하여금 살인케 하였다고 하자, 왕망(王莽)이 대노하여, 조카 왕광과 자신의 형수를 스스로 목매 죽게 하였다.
왕망(王莽)의 장녀로서, 이름은 실전되었으며, 모친은 효목황후(孝睦皇后) 왕씨다. 전한 평제의 황후인 효평황후(孝平皇后)다. 신나라 때는 황황실주(黃皇室主)에 봉해졌다.
왕망(王莽)의 차녀로서, 모친은 왕망의 시첩, 증질(增秩)이다. 신나라 때는 목수임(睦脩任)에 봉해졌다.
왕망(王莽)의 삼녀로서, 모친은 왕망의 시첩, 개명(開明)이다. 신나라 때는 목체임(睦逮任)에 봉해졌다.
왕망(王莽)의 장남으로서, 모친은 효목황후(孝睦皇后) 왕씨다.
왕우의 차남으로서, 공명공(功明公)에 봉해졌다. 지황 2년(地皇二年, AD 21) 병사했다.
왕망(王莽)의 차남으로서, 자는 중손(中孫)이며, 모친은 효목황후(孝睦皇后) 왕씨다. 신나라 때는 목체임(睦逮任)에 봉해졌다.
왕망(王莽)의 삼남으로서, 모친은 효목황후(孝睦皇后) 왕씨다. 신나라 때는 목체임(睦逮任)에 봉해졌다.
왕망(王莽)의 사남으로서, 모친은 효목황후(孝睦皇后) 왕씨다. 신나라 때는 목체임(睦逮任)에 봉해졌다.
왕망(王莽)의 오남으로서, 모친은 왕망의 시첩, 회능(懷能)이다. 신나라 때는 공수임(功脩任)에 봉해졌다.
지황 2년(地皇二年, AD 21) 효목황후 왕씨가 죽고 삼남인 신천왕(新遷王) 왕안의 병세가 심해지자, 망은 병들고 자식이 없자 왕안으로 하여금 주서(奏書, 군주에게 올리는 문서)를 쓰게 하여, 사절을 보내 상언하기를, "왕흥(王興) 등은 어미가 비록 비천하나, 마땅히 황자(皇子)에 속하니, 버리는 것은 불가하옵니다."하였다.(興等母雖微賤, 屬猶皇子, 不可以棄.)…(중략)…이에 왕차(王車)로 하여금 사자를 보내어 왕흥 등을 맞이하게 하고 왕흥을 공수공(功脩公)으로, 왕광을 공건공(功建公)으로, 왕엽을 목수임(睦逮任)으로, 왕첩을 목체임(睦逮任)으로 봉하였다.(於是以王車遣使者迎興等, 封興爲功脩任, 匡爲功建公, 曄爲睦脩任, 捷爲睦逮任.)
왕망(王莽)의 육남으로서, 모친은 왕망의 시첩, 증질(增秩)이다. 신나라 때는 공건공(功建公)에 봉해졌다.
자는 자원(子元)으로 하평 2년(河平二年, BC 27) 평아후(平阿侯)에 봉해졌다. 시호는 안(安)이다.
왕담(王譚)의 장남으로, 영시 원년(永始元年, BC 16) 평아후(平阿侯)에 봉해졌다. 원시 3년(元始三年, AD 3), 자살을 강요받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시호는 자(刺)이다.
왕인(王仁)의 장남으로, 원시 4년(元始四年, AD 4)에 아버지 왕인의 평아후 작위를 이었다. 건무 2년(建武二年, AD 26)에 사망하였다. 왕망의 신나라가 망할 때, 피해를 입지 않았다.
자는 자석(子石)으로, 왕인(王仁)의 차남이다. 마원의 조카사위(侄婿)였다. 사례교위(司隷校尉)인 소업(蘇業)과 정홍(丁鴻)의 죄에 연좌되어 낙양에서 투옥돼, 옥사했다.
왕반(王磐)의 아들이다. 왕숙은 패헌왕(沛獻王) 유보(劉輔) 빈객(賓客)이 되어, 여러 왕공제후의 부제(府第)에 출입하였다. 경시제의 아들 수광후(壽光侯) 유리(劉鯉)를 빈객으로 두어 총애하였는데, 유리가 유분자(劉盆子)를 원수로 여기자 그를 위하여 손을 써, 빈객들로 하여금 그의 형인 식후(式侯) 유공(劉恭)을 살해했다. 광무제(光武帝)는 패헌왕을 하옥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를 용서하였으나, 조서를 내려, 왕숙을 비롯한 패헌왕의 빈객 수천 명을 주살하였다.
왕담(王譚)의 차남으로, 전한 애제(哀帝)가 태자(太子)일 때 서자(庶子, 태자부의 사무를 담당하는 직책)가 되었다. 왕거질은 애제가 즉위한 뒤에도 꾸준하게 애제의 신뢰를 얻어 관직이 시중(侍中)·기도위(騎都尉)에 이르렀다.
왕담(王譚)의 삼남으로, 소함(蕭咸)의 딸과 결혼하였다. 직책이 중상시(中常寺)에 이르렀으나, 왕망이 선양을 받아, 신나라를 세운 뒤에 왕굉은 자신인 왕망에게 살해당할까 두려워 독약을 지니고 다녔다. 그 후, 왕망이 패망하자, 경시제에게 항복했다.
왕담(王譚)의 사남으로, 왕망의 신나라에서 안정군(安定郡) 대윤(大尹)이 되었다. 경시 원년(更始元年, AD 23) 7월, 외효(隗囂)는 왕향의 항복을 받기 위해 서신을 수차례 보냈으나, 왕향은 항복하지 않았다. 이에 외효는 안정군을 공략하였고 왕향을 사로잡아 처형하였다. 그러자 안정군 전체가 외효에게 항복하였다.
자는 소자(少子)으로 하평 2년(河平二年, BC 27) 안성후(安成侯)에 봉해졌다. 시호는 공(共)이다.
자는 자하(子夏)으로 하평 2년(河平二年, BC 27) 성도후(成都侯)에 봉해졌다. 시호는 경성(景成)이다.
자는 자숙(子叔)으로 하평 2년(河平二年, BC 27) 홍양후(紅陽侯)에 봉해졌다. 시호는 황(荒)이다.
홍양황후(紅陽荒侯) 왕립(王立)의 장남으로, 원시 4년(元始四年, AD 4)에 아버지 왕립의 홍양후(紅陽侯) 작위를 습하였다. 신나라가 멸망하자, 대가 끊어졌다.
신나라의 상산군(常山郡, 전한(前漢)의 중산국(中山國)이다.)의 대윤(大尹, 신나라 때는 태수(太守)를 대윤이라 불렀다.)이었는데,후에 후한 세조(世祖) 광무제(光武帝)에 귀순하여 장군이 되었으나,얼마 후 전사했다.
왕단(王丹)의 아들이다. 후한 세조(世祖) 광무제(光武帝) 건무 원년(建武元年, AD 25), 광무제가 왕단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겨,그의 아들 왕홍(王泓)을 무환후(武桓侯)로 봉하였다.
자는 치경(稚卿)으로 하평 2년(河平二年, BC 27) 곡양후(曲陽侯)에 봉해졌다. 시호는 양(煬)이다. 왕근이 죽은 뒤, 곡양후 작위는 폐지되었다. 신나라가 세워지자, 왕망(王莽)이 왕근의 은혜를 잊지 않고 천봉 5년(天鳳五年, AD 18)에 그에게 직도공(直道公)의 작위와 양(讓)이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
전한(前漢) 곡양양후(曲陽煬侯)이자, 신(新) 직도양공(直道讓公)인 왕근(王根)의 아들로, 왕망(王莽)이 왕근의 은혜를 감사하여 천봉 5년(天鳳五年, AD 18)에는 왕섭을 직도공(直道公)에 봉하고 위장군(衛將軍)으로 삼았다. 지황 4년(地皇四年, AD 23) 6월에 술사(術士) 서문군혜(西門君惠)이 도참(圖讖)을 두고 "성발(星孛, 살별)이 궁실을 없애고, 유씨가 마땅히 다시 일어날 것인데, 국사공(國師公, 유흠(劉歆)을 일컫는데, 유흠은 전한 건평 원년(建平元年, BC 6)에 유수(劉秀)로 이름을 바꾸었다.)의 성명이 이러합니다."(星孛掃宮室, 劉氏當復興, 國師公姓名是也.)라고 하자, 왕섭은 이를 믿고 국사공 유수(劉秀), 대사마 동충(董忠) 그리고 사중대췌(司中大贅)인 기무후(起武侯) 손급(孫伋)과 결의하여 군대로 왕망을 협박하여 항복을 받고는 경시제(更始帝) 유현(劉玄)에게 투항하여, 일가를 보전하려 하였다. 그러나 손급이 변심하여 왕망에 몰래 고변하여 모든 일이 드러나자, 국사공 유수(劉秀)와 직도공(直道公) 왕섭은 자결하였고 동충은 왕망에게 끌려가 목이 베여지고 그 일족은 주멸되었다.
자는 계경(季卿)으로 하평 2년(河平二年, BC 27) 고평후(高平侯)에 봉해졌다. 시호는 대(戴)이다.
고평대후(高平戴侯) 왕봉시(王逢時)의 아들로, 전한 원연 원년(元延元年, BC 12)에 왕봉시가 죽자, 작위를 이었다.
왕하(王賀)의 차남이다. 전한 고종(高宗) 원제(元帝) 초원 2년(初元二年, BC 47) 4월, 원제가 그를 불러, 장락위위(長樂衛尉)로 삼았다.
왕홍(王弘)의 아들로, 홍가 원년(鴻嘉元年, BC 20), 안양후(安陽侯)에 봉해졌고 영시 2년(永始二年, BC 15)에 죽었다. 시호는 경(敬)이다.
왕음(王音)의 아들로, 성격이 매우 엄정하였으며, 전한 애제 시기에는 부마도위(駙馬都尉) 겸 태복(太僕) 안양후(安陽侯)가 되었고 평제 시기에는 거기장군(車騎將軍 )이 되었다. 왕망(王莽)이 그를 심복으로 생각하여, 만호(萬戶)에 봉하고 태보(太保)로 삼았다. 왕망이 광척후(廣戚侯) 유현(劉顯)의 아들인, 유자(孺子) 유영(劉嬰)을 옹립하자, 태부좌보(太傅左輔)가 되었다. 왕망이 선양을 받아 신나라를 건국한 뒤, 왕순을 대사(太師) 안신공(安新公)에 봉했다.
왕순(王舜)의 장남으로, 천봉 3년(天鳳三年, AD 16)에 아버지 왕순(王舜)이 죽자, 안신공(安新公)의 자리를 이었다. 지황 4년(地皇四年, AD 23) 9월, 경시제(更始帝) 유현(劉玄)의 군대가 상안(常安)에 입성하였다. 왕망(王莽)이 살해된 뒤에, 신도건(申屠建)이 승상 유사(劉賜)로 하여금 오위중성장군(五威中城將軍) 설부후(說符侯) 최발(崔發)을 참수하자, 안신공 왕연과 위장군(衛將軍) 설덕후(說德侯) 왕림(王林) 형제, 좌대대부(左隊大夫) 왕오(王吳), 입국장군(立國將軍) 조굉(趙閎), 영시장군(寧始將軍) 화평후(和平侯) 사심(史諶)이 경시제에게 투항했다. 그러나 모두 신도건에게 살해되었다.
왕순(王舜)의 차남으로, 전한 거섭 원년(居攝元年, AD 6), 자신은 동심후(同心侯)에, 동생 왕림(王林)은 설덕후(說德侯)에 봉해졌다. 신 천봉 3년(天鳳三年, AD 16)에 아버지 왕순(王舜)의 직위인 태사장군(太師將軍) 자리를 맡았다. 지황 3년(地皇三年, AD 22), 적미의 세력이 강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왕망은 정예병 10만을 왕광과 경시장군(更始將軍) 염단(廉丹)에게 맡겨 적미(赤眉)를 토벌하려 하였으나, 성창(成昌)에서 동헌(董憲)에게 대패하였고 염단은 인수(印緩)와 부절(符節)을 왕광에게 넘기고 도주하게 한 뒤, 자신은 남아서 싸우다 죽었다. 왕광은 낙양으로 도주하여, 국장(國將) 미신공(美新公) 애장(哀章)과 함께 낙양을 수비했다. 그러나 경시제가 보낸 정국상공(定國上公) 왕광(王匡)의 공격을 받아, 지황 4년(地皇四年, AD 23) 9월에 낙양성이 함락되자, 왕광과 애장은 항복하였다. 그러나 완(宛)으로 압송되어 모두 경시제에게 참수됐다.
왕순(王舜)의 삼남으로, 전한 거섭 원년(居攝元年, AD 6), 자신은 설덕후(說德侯)에, 작은 형인 왕광(王匡)은 동심후(同心侯)에 봉해졌다. 지황 4년(地皇四年, AD 23) 9월, 경시제(更始帝) 유현(劉玄)의 군대가 상안(常安)에 입성하였다. 왕망(王莽)이 살해된 뒤에, 신도건(申屠建)이 승상 유사(劉賜)로 하여금 오위중성장군(五威中城將軍) 설부후(說符侯) 최발(崔發)을 참수하자, 위장군 설덕후 왕림과 그의 큰형 안신공(安新公) 왕연(王延), 좌대대부(左隊大夫) 왕오(王吳), 입국장군(立國將軍) 조굉(趙閎), 영시장군(寧始將軍) 화평후(和平侯) 사심(史諶)이 경시제에게 투항했다. 그러나 모두 신도건에게 살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