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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서 제도는 전근대 동아시아 사회에서 적자와 서자를 차별 구분하는 사회 제도이다.
고려시대에는 두 명의 정실 부인 외에 첩을 두고 서자를 두는 문화가 있었다. 그러나 서자를 적자와 다른 존재로 차별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 태종 때였다.
태조 이성계는 개국에 막대한 공을 세운 방원을 비롯한 본 부인 한씨의 자식들을 제외하고 계비 강씨의 아들인 방석을 세자로 삼았다.[1] 이에 정안대군 이방원은 불만을 품고 세자인 방석과 그 옹호 세력인 서얼 출신의 정도전 등을 힘으로 몰아냈다.
이방원은 둘째 형 영안대군 이방과를 왕으로 앉히면서, 그 교지에 ‘간신 정도전 등이 서얼을 세워 후사를 삼아 어른과 아이의 차례를 뒤엎고 적서의 구분을 어지럽히려 하였다’(태조실록 15년 9월 정해 조)라고 쓰게 하였다.[1] 이것이 적, 서를 구분 지은 최초의 기록이다.[1] 이방원은 “적서의 구분을 분명히 하였다”라고 공언하였고, 방석 형제를 서얼이라고 불렀다.[1][2] 즉위 후, 태종은 서자들의 관직 임용 자체를 제한했는데 이때 만들어진 서자 차별 규정은 1894년까지 지속된다.
적서 차별을 근거로 만들어진 규정이 바로 1415년(태종 15년) 제정된 서얼 금고령이었다. 그리고 성종 때에는 이를 명문화하여 경국대전에 반포한다.
이는 후일 정조가 부분 철폐하여 규장각에 등용하고, 흥선대원군에 의해 완전히 철폐된 뒤에도 계속 존재하였다. 갑오경장으로 관직 임용에서의 서자들에 대한 불이익은 사라졌지만 서자를 차별하는 사회적인 관습은 1971년까지 존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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