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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독립운동가 (1876–1930)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장인환(張仁煥, 1876년 3월 10일∼1930년 5월 22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1][2]
평안남도 대동군(현 평양직할시) 태생으로, 어려서 고아가 되어 어렵게 자랐다. 숭실학교를 졸업한 이후, 1905년 하와이로 이민을 떠났고 1906년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했다.
장인환은 독립운동을 위해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독립운동단체인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의 회원이 되었다. 1908년 친일파 미국인으로 조선통감부와 밀착해 있던 대한제국 외교고문 더럼 스티븐스(d.w.stevens)가 샌프란시스코에서 기자들에게 을사늑약을 비호하고 한국을 비판하는 발언을 하였고 미국의 각 신문사에 발표되었다. 이에 인근 지역에 거주하던 미주 한인 대표들이 스티븐스를 만나 항의하였으나 스티븐스는 이완용을 충신이라 하고 한국의 인민이 우매하여 독립의 자격이 없다는 등 궤변을 하여 한인들에게 폭행을 당했다. 스티븐스의 친일 발언을 전해들은 장인환은 격분하여 그를 저격하기로 결심했다.
3월 23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워싱턴 D.C.으로 떠나는 길의 스티븐스를 공격하려 하던 중 같은 목적으로 대기하던 전명운이 먼저 스티븐스와 격투를 벌였다. 그는 권총 세발을 발포하였는데, 한발은 전명운의 어깨에 잘못 맞았고 나머지 두발을 맞은 스티븐스는 중상을 입어 이틀 후 사망했다.
한인 사회에서 선임해 준, 당시 그의 재판을 맡은 네이선 코플런(Nathan Coughlan) 변호사는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애국적 정신병(patriotic insanity) 이론을 근거로, "이 사건은 일종의 정신 질환 상태에서 저지른 것이므로 범죄가 될 수 없다" 고 항변했다.[3]
그는 경찰과 법정에서 다음과 같은 진술서를 제출하였고, 자신의 행동이 정당했다고 주장하였다.
내가 그를 죽이지 않아야 할 이유가 뭐요? 수십만명이 그의 계획 때문에 죽어갔소. 그러니 나는 내 조국을 위해 그를 쏜 것이요.
— 장인환[4]
나는 투옥되느니 차라리 죽음으로 순국하고 싶소. 나는 조국에 대한 나의 의무를 다했고 법이 나를 어찌할지는 관심이 없소.
— 장인환[5]
재판 결과 금고 25년형을 선고 받았으나 10년 만인 1919년 가출옥하였다.
1927년 귀국하여 평양에서 결혼도 하였으나 일제의 감시로 혼자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갔다. 병고에 시달리다가 1930년 자살하였다.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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