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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배우 (1906–1955)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이금룡(李錦龍, 일본식 이름: 香山長春[1], 1906년 6월 16일 ~ 1955년 4월 3일)은 한국의 영화 배우이다. 본명은 이금룡(李金龍)이다.
배재학당을 수료하고 조선배우학교에서 연기 공부를 시작했다. 조선배우학교가 폐교한 뒤 1926년에 조선키네마에 입사해 본격적으로 영화계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1927년 나운규가 나운규프로덕션을 세우고 창립작으로 제작한 《잘 있거라》(1927)에서 부호이자 색마인 민범식 역으로 데뷔하여 나운규프로덕션에서 활동했다. 나운규와는 《아리랑》(1926)을 찍은 조선키네마 시절부터 함께한 사이였다.[2] 《아리랑》에 단역으로 출연했다는 기록도 있으나, 본인의 회고에서는 《아리랑》이 개봉된 뒤 조선키네마에 입사한 것으로 되어 있다.
반일 정서를 담아 정치색이 짙은 영화였던 《들쥐》(1927)[3]와 《사랑을 찾아서》(1928)에 출연했으며, 《사랑을 찾아서》에서 노역인 나팔수 역을 맡은 이래 노역을 전담했다. 이금룡은 나운규프로덕션의 전 작품에 출연한 핵심 배우였다.
그러나 1929년 경부터 불황과 함께 경영이 어려워지면서 중심 인물인 나운규와 동인들 사이의 불화가 불거졌다. 이때 이금룡을 비롯한 여러 동인들이 나운규를 비판하고 나운규프로덕션을 탈퇴하였다. 1930년에는 자신이 시나리오를 쓴 《어사 박문수전》을 연출했으나, 이 영화가 흥행에 실패한 이후 영화 배우로만 활동했다.
1932년부터 약 3년 동안의 공백기를 가진 뒤 안종화의 《역습》에 출연하면서 복귀했다. 이후 활발한 활동으로 1930년대 후반을 대표하는 배우 중 한 명이 되었다. 무성 영화 배우 가운데 발성 영화 등장 이후까지 살아남은 배우이기도 하다. 박기채가 이금룡을 가리켜 겸손하고 온후한 성품이며 과묵하다고 평한 인물평이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 말기에 《지원병》(1941), 《젊은 모습(일본어: 若き姿)》(1943), 《병정님》(1944) 등 친일 영화에 출연하여,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연극/영화 부문에 포함되었다.
이규환 감독의 흥행작 《춘향전》(1955)에서는 변사또 역을 맡았고, 마지막 출연작은 홍성기 연출의 멜로 영화 《열애》(1955)이다. 《열애》 촬영 도중 사망한 그를 기려 동료들이 민간영화상인 금룡상을 제정해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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