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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천의왕 유지(菑川懿王 劉志, ? ~ 기원전 130년)는 중국 전한의 황족·제후왕으로, 전한 고조의 손자며 제도혜왕 유비의 아들이다. 오초칠국의 난 당시에는 제북왕이었고, 가담하지 않아 치천왕으로 이봉되었다.
문제 4년(기원전 176년), 제북왕 유흥거가 반란을 일으켰다 자살한 이듬해에, 문제에게서 형제들과 함께 열후로 봉해져 안도후(安都侯)가 되었다.[1][2][3][4] 문제 16년(기원전 164년), 전년 제문왕 유칙이 후사 없이 죽어 폐지된 제나라를 일곱으로 나누어 제도혜왕의 아들들과 성양공왕을 봉하면서 제북나라 왕이 되었다.[5][3][4] 제북왕은 재위 4년(기원전 161년), 5년(기원전 160년), 10년(기원전 155년) 세 차례 입조했다.[5]
경제의 시대에 조조를 주축으로 하여 조정에서 제후왕의 영지를 줄이는 정책을 펴자, 이에 반발한 오왕 유비가 교서왕 유앙을 한편으로 꼬드겼고 유앙은 일곱 제나라 중 성양나라를 제외한 여섯 나라에 사람을 보내 거사에 함께하도록 권했다. 제북왕도 처음에는 이에 동참하겠다고 했으나, 아직 성이 무너진 것을 다 보수하지 못했다 하여 낭중령의 겁박을 받아 군대를 일으키지 못했다.[6] 반란에 가담했다 철회한 제나라 효왕이 진압군의 추궁에 못 이겨 자살하자 자신도 자살해 처자나마 지키고자 했는데, 제나라 사람 공손확(公孫玃)이 반란 진압에서 큰 공을 세운 양나라 효왕을 설득해 보자고 해 공손확을 양효왕에게 보냈다. 공손확은 양효왕을 치켜세우고 제북왕이 감히 반란군과 맞서 싸우지 못하는 이유를 변호했고, 양효왕은 기뻐해 조정에 제북나라의 변명을 전했다.[7] 조정에서는 제북왕이 자국을 지키며 병사를 내지 않았다 하여, 제북왕은 반란 권유를 받은 여섯 나라의 왕 중 홀로 살아남았으며, 자살한 치천왕 유현을 대신해 치천왕으로 옮겼다.[3][5][4]
치천왕이 되어서는 16년(기원전 144년)·17년(기원전 143년)·22년(기원전 138년) 세 차례 입조했다.[5] 11년을 제북왕으로, 24년을 치천왕으로 총 35년간 왕을 지내다가 기원전 130년에 죽었다.[4][3][5]
치천의왕의 아들들은 왕이 된 태자 치천정왕을 제외하고 모두 원삭 2년(기원전 127년) 5월 을사일에 후작으로 봉해졌다.[2] 용구후 유대는 사기에서는 강도역왕의 아들이라고, 한서에서는 치천의왕의 아들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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