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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제3대왕 (?–57)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 ?~57년, 재위: 24년~57년) 또는 노례이사금(弩禮尼師今)은 신라의 제3대 이사금으로 남해차차웅의 태자이며 어머니는 운제부인(雲帝夫人)이다. 박혁거세의 손자이다.[1] 왕후는 일지(日知) 갈문왕(葛文王)의 딸, 혹은 허루왕(許婁王)의 딸 박씨라는 설이 있지만,[2] 삼국유사에 나오는 사요 갈문왕의 딸일 가능성이 높다. 아들 둘을 두었다. 다른 이름으로는 노례(弩禮), 치리(治理), 치리(齒理), 치리적(治理赤) 등이 있다. 삼국유사에서는 노례이다.
유리이사금 儒理尼師今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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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오릉 | |
제3대 신라 이사금 | |
재위 | 24년~57년 |
전임 | 남해 차차웅(南解次次雄) |
후임 | 탈해 이사금(脫解尼師今) |
부왕 | 남해 차차웅(南解次次雄) |
폐하(陛下) 이사금(儒理尼師今) | |
이름 | |
휘 | 박유리(朴儒理) |
별호 | 미상 |
묘호 | 미상 |
시호 | 미상 |
신상정보 | |
출생일 | 생년 미상(生年 未詳) |
출생지 | 미상 |
사망일 | 57년 |
사망지 | 미상 |
국적 | 신라(新羅) |
왕조 | 신라(新羅) |
가문 | 밀양(密陽) |
부친 | 남해 차차웅(南解次次雄) |
모친 | 운제부인(雲帝夫人) |
배우자 | 이리생부인(伊利生夫人) 사요왕(辭要王) |
자녀 | 일성 이사금(逸聖泥師今) 파사 이사금(婆娑尼師今) 부인 박씨(父人 密陽) |
종교 | 미상 |
능묘 | 미상 |
24년부터 57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24년부터 43년까지 친정하였고 43년부터 57년 붕어할 때까지 매제 석탈해(훗날 탈해이사금)가 대보의 신분으로 대리청정을 하였다.
《삼국사기》는 왕호에 대해 김대문의 말을 인용하기를: "이사금은 방언이니 잇금을 이른다. 이전에 남해가 바야흐로 죽으려 할 즈음 아들 유리와 사위 탈해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죽은 뒤 너희 박 석 두 성씨 가운데 나이가 많은 사람이 왕위를 이을 일이다'라고 하였다."[3] 이때 탈해는 38세였고, 유리의 나이는 기록되어 있지 않아 알 수 없다. 둘은 지혜가 많은 자는 잇금이 많다고 하니, 그것으로 왕위 계승자를 결정하자는 탈해의 제안으로 시험해보니 유리의 이 자국이 더 많아 유리가 왕이 되고 왕호를 이사금이라 하였다.[4]
즉위 이듬해인 25년 친히 시조 묘에 제사를 지내고 죄수를 크게 사면했으며,[5] 28년(즉위 5년)에 홀아비, 과부, 고아, 늙고 병든 이들에 대한 구휼을 실시했다.[6] 이 해에 백성들 사이에서 평안함을 기뻐하며 처음으로 「도솔가(兜率歌)」를 지었으니, 이것이 가악(歌樂)의 시초이다.
즉위 9년에 진한 6부의 이름을 고치고 성씨를 내렸는데, 이 무렵 신라의 진한에서의 영향력이 커졌음을 나타낸다. 또한 <삼국사기>에 따르면 관위 17등급을 정리했는데, 삼국사기에는 17등급이 전부 이때 정해진 것처럼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유리 이사금이 그 기틀을 다지고 후에 제도를 손봐 17등급이 완성된 것으로 생각된다.
36년(즉위 13년) 음력 가을 8월에 낙랑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여 타산성(朶山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7]
37년(즉위 14년) 고구려의 대무신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켰다. 낙랑 사람 5천 명이 와서 투항하였으므로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8]
40년(즉위 17년) 가을 음력 9월에 화려현(華麗縣)과 불내현(不耐縣) 두 현의 사람들이 함께 모의하여 기병을 이끌고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는데, 맥국(貊國)의 우두머리가 곡하(曲河)의 서쪽에서 군사로써 막아 물리쳤다. 유리 이사금은 기뻐하여 맥국과 우호를 맺었다.[9] 그리고, 42년(즉위 19년) 가을 음력 8월에는 맥국의 거수(渠帥)가 사냥하여 얻은 새와 짐승을 바쳤다.[10]
56년(즉위 33년) 음력 여름 4월에 용이 금성의 우물에 나타나고, 얼마 있지 않아 갑작스럽게 비가 서북쪽으로부터 와서 쏟아졌다.
또 그 해 음력 5월에는 바람이 세차게 불어 나무가 뽑혔다.
57년(즉위 34년) 가을 음력 9월에 유리 이사금은 병환이 들자 신료들에게 '탈해는 그 신분이 임금의 척족(戚族)이고 지위가 보필하는 신하의 자리에 있으며 여러 번 공과 명성을 드러내었다. 짐(朕)의 두 아들은 재주가 그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내가 죽은 후에 그로 하여금 왕위에 오르게 할 것이니, 나의 유훈을 잊지 말라.'며 유언을 남겼다. 57년 겨울 음력 10월에 왕이 돌아가시니 사릉원(蛇陵園) 안에 장사지냈다.[11]
이 문단의 내용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2012년 10월) |
전 대 남해 차차웅 |
제3대 신라 국왕 24년 ~ 57년 |
후 대 탈해 이사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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