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국

1022년까지 존재했던 한국의 왕조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우산국(于山國)은 원삼국시대[2]부터 고려시대 초기[3]까지 현재의 경상북도 울릉군울릉도와 부속섬을 다스리던 나라다.

간략 정보 우산국, 정치 ...
우산국
于山國
신라의 조공국
(512년 6월~930년 8월)
고려의 조공국
(930년 8월~1022년)
?~1022년
정치

 ?~?

우해왕[1]
역사
  512년 6월
 • 930년 8월
 • 1018년 11월
 • 1022년
신라에 복속
고려에 복속
여진족 해적의 침입
고려에 흡수
기타
현재 국가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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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역사서에 첫 등장

244년 왕기위궁을 토벌하러 옥저 동해안에 도착했고 노인에게 동해에 사람이 사느냐 물으니 바다 동쪽에 섬이 있고 사람이 살고 있으나 여자만 있고 해마다 칠월이 되면 소녀를 가려 뽑아서 바다에 빠뜨린다고 하였다.[4] 그리고 섬에서 쓰는 언어가 옥저와 다르다고 설명한다.[5]

대마도 왜국과 결혼동맹

구전되어 오는 설화 속에 우산국의 마지막 왕인 우해왕과 왕비 풍미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6]

신라의 복속

고구려의 교역 항로에서 요충지였던 우산국을[7] 신라 장군 이사부가 정벌할 때, 무력에 의한 항복보다는 교묘한 계책을 써서 항복을 받으려고 하는 계획을 세웠는데 나무 사자를 만들어 배에 나눠 싣고 우산국 해안에 이르러 "만일 항복하지 않으면 이 맹수를 놓아 모두 밟아 죽이겠다."라고 하자 512년 6월에 항복해 해마다 토산물을 공물로 바치기로 하였다.[8] 이 시기는 신라가 북상하여 하슬라주를 설치하고 군주가 통치하는 시점으로, 이사부의 직함이 실직주 군주에서 하슬라주 군주로 바뀌고 하슬라주 군주 이사부가 우산국을 복속하게 된다.[9]

신라에서 통행 금지

7세기에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가 왜로 가는 해상 항로를 장악하여 승려의 통행만을 허락하였다.[10] 이로 인해 백제, 고구려, 왜국의 배가 자유롭게 신라 연안을 항해할 수 없게 되었다.[10]

고려에 복속 그리고 여진족 해적의 침입과 멸망

930년 우산국은 백길(白吉), 토두(土豆)를 보내 토산물을 바치면서 복속을 원했고 태조는 두 명에게 관직을 내렸다.[11]

1018년(현종 9년) 고려는 우산국이 동북여진의 침략을 받아 농사를 못하게 되자, 이원구(李元龜)를 보내 농기구를 보냈고[12] 1019년(현종 10년) 여진족으로부터 도망쳐온 자들을 모두 돌아가게 했다.[13] 1022년(현종 13년) 우산국 백성 중 여진족에게 노략질 당하여 망명온 자들을 예주에 거주하게 하고 호적에 편입되면서[14] 멸망하였다.

같이 보기

각주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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