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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에노 히로모토(일본어: 大江広元)[3]는 헤이안 시대 말기에 태어나 가마쿠라 막부 초기까지 활동한 구교(公卿)이다.
오에노 히로모토 大江広元 | |
오니와 마나부(大庭学) 作 『오에노 히로모토 초상』 (모리박물관[2] 소장) | |
신상정보 | |
시대 | 헤이안 시대 말기 - 가마쿠라 시대 초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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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148년(규안 4년) |
사망 | 1225년(가로쿠 원년) 음력 7월 16일 |
개명 | 나카하라노 히로모토(中原広元)→오오에노 히로모토(大江広元)→가쿠가(覚阿, 법명) |
관위 | 최종 정4위하(正四位下) 다이젠다이부(大膳大夫) 겸 무츠노카미(陸奥守), 역대 누이도노인(縫殿允),소게키(少外記),묘호하카세(明法博士),켄비이시(検非違使),사에몬타이(左衛門大尉),까몬노카미(掃部頭),효고노카미(兵庫頭) 거침 |
씨족 | 오에씨의 조상 |
부모 | 아버지: 후지와라노 미쓰요시(藤原光能),오오에노 고레미쓰(大江維光),나카하라노 히로스에(中原広季) 설이 분분함, 어머니: 정보없음 |
형제자매 | 형:치카요시(親能) 동생:아키히로(章弘) |
배우자 | 정실 : 타다 히토쓰나(多田仁綱)의 딸 |
자녀 | 아들: 치카히로(親広),나가이 도키히로(長井時広),나하 무네모토(那波宗元),모리 스에미쓰(毛利季光),타다나리(忠成),타케토시(尊俊),미즈타니 시게키요(水谷重清), 딸:아스카이 마사쓰네(飛鳥井雅経)의 처, 나카하라노 모로나리(中原師業)의 처, 후지와라노 기미쿠니(藤原公国)의 처 |
묘소 | 가나가와현 각지 소재 |
하급 귀족 출신으로 처음엔 교토 대궐에 말단 관리로 출사했다가 가마쿠라에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를 만나 그의 측근이 됐으며, 교토와 가마쿠라 사이의 조정 역할을 맡았다. 가마쿠라 막부의 창업공신으로서 당시 핵심 정무 기관인 만도코로에서 초대 벳토(別当)직에 올랐다. 먼훗날 전국 시대의 간웅(奸雄) 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가 그의 직계 후손이다.
가마쿠라 막부의 창업공신인 히로모토의 정확한 출신은 설이 분분하다. 오에 씨 족보(『江氏家譜』)는 후지와라 미쓰요시(藤原光能)의 아들로 생모의 재혼상대인 나카하라노 히로스에(中原広季)에게 양육됐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초기 일본 가계도 모음집인 《손피빈먀쿠》(일본어: 尊卑分脈)에 실린 오에 씨 계보에는 히로모토가 오에노 고레미쓰(大江維光)의 아들로, 나카하라노 히로스에(中原広季)가 양부로 기재돼있다. 반면, 일본 초기 역사서이자 국문학서인 《속군서유종》(일본어: 続群書類従) 속편에 실린 나카하라 씨 계보에는 나카하라노 히로스에가 아버지에, 오에노 고레미쓰가 양부로 기록돼있다.
히로모토가 조정에 출사한 초기에는 '나카하라노 히로모토(일본어: 中原 広元)'라는 이름으로 신하 명단에 올라있다. 오에 씨로 고쳐부른 기록은 만년인 겐포 4년(1216년)에 종5위상(従五位上) 품계인 무쓰노카미(陸奥守)로 임관했을 때였다. 히로모토는 조정에 개명 신청을 상주했던 모양으로, 아즈마카가미에는 윤달 6월 14일 히로모토가 상소문에 양부 히로스에에게 받은 은혜가 크고 깊으나, 본가인 오에 씨의 쇠퇴를 보고 있기가 딱하여 생부 고레미쓰의 뒤를 이으려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4].
히로모토의 친형인 나카하라노 지카요시(中原親能)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 친분이 깊어 일찍부터 교토를 떠나 요리토모의 밑으로 들어갔다. 1183년(주에이 2년) 음력 10월에 치카요시는 미나모토노 요시쓰네(源義経)의 군세와 함께 상경 후 다이라 씨를 몰아냈고, 이듬해인 1184년(엔랴쿠 원년) 정월에 요리토모의 대관으로서 정이대장군 대관식을 치렀다. 귀족 신분으로서 자신의 주군인 장군과 여타 교토 귀족 구교(公卿)들 사이의 교섭을 주선했다.
이런 친형의 인연으로 히로모토도 요리토모와 함께 가마쿠라에 내려가 구몬도코로(公文所)의 벳토(別当)직에 제수되었다. 요리토모가 대장군에 오른 후 정2품 우대장(右大将)에 올라 개인 정무 처리기관이였던 구몬도코로를 만도코로(政所)로 고쳐 장군으로서 정무를 시작했고, 히로모토는 별당직에 유임되어 주로 교토와 가마쿠라 사이의 교섭을 맡았다. 그외 분야에도 여러 가지 실무를 맡아 처리했다. 아즈마카가미[5]에 따르면 요리토모가 지방 슈고직(守護職), 지토(地頭) 등 중앙집권 체제로서의 임명 지방관직을 설치했던 것도 히로모토의 제안이었다 한다[6].
1199년(쇼지 원년) 요리토모가 급서하자 요리토모의 부인인 호조 마사코, 싯켄 호조 도키마사와 손잡고 2대 쇼군 미나모토노 요리이에를 막부 정치에서 배제시키는 데 성공했다. 3년 후 무리한 정치적 행동을 연발하던 요리이에가 병석에 눕자 자신의 집으로 빼돌려 유폐시키고 결국 주살, 3대 쇼군 미나모토노 사네토모를 옹립했다. 조큐의 난 때는 장남 오오에노 치카히로(大江親広)와 부자의 연을 끊고 적이 되기도 했다. 당시 아즈마카가미 기록에서는 히로모토가 주전론을 펼친 호조 마사코에게 협조, 교토 조정과 싸움에 주저하는 고케닌(御家人)들을 부추켜 승리를 일궈낸 장본인 중 하나로 기록돼 있다[7]. 장남은 막부에 등을 돌리고 교토 조정의 편에 섰다가 패배후 변방으로 쫓겨갔다.
'와다 전투'때는 군사 모집과 영지 분배에 관해 히로모토가 싯켄(執権) 요시토키와 함께 고케닌들 명의로 연판장을 돌렸던 것이 남아있다[8]. 그는 막부 창업에 뒤늦게 참가한 후발 주자였지만 막부가 가지지 못한 교토 귀족들과의 독자적인 연락망을 가지고 있어, 단순히 하급 관리에 그치지 않고 정책 결정 및 시행에 있어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었다. 그가 정2품 요리토모를 제외하고 어떤 가마쿠라 막부 인사들보다도 품계가 높았던 것이 그 예다. 요리토모의 친동생 노리요리나 요리토모의 장인 호조 도키마사같이 여타 막부 요인 등도 잘해봐야 종5위하라는 낮은 품계에 머물렀던 반면, 그만은 대번에 정5품 품계를 받았었다. 요리토모 사후, 최고 실권자인 싯켄 호조 요시토키를 웃도는 정4품 품계를 받아 명목상으로는 쇼군 다음가는 지위를 갖게 되었다. 에도 시대의 학자 아라이 하쿠세키는 《독사여론》에서 오에노 히로모토는 집안 대대로 조정의 신하였으면서 요리토모를 도와 막부 창설에 공헌하였고, 나아가 호조 도키마사가 이치만을 죽일 때나 요시토키가 막부를 장악하는 과정에서 히로모토가 늘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어 자신의 이익을 쌓았다며, 히로모토가 조정에만 반역한 것이 아니라 요리토모에게도 반역한 자이고 그 아첨과 간사한 지혜는 요시토키에 버금간다고 혹평했다(하쿠세키는 요시토키를 두고 "일본 역사를 통틀어 찾아볼 수 없는 소인배"라고 지독하게 혹평하였다).
그 외 미카와 국(三河国)(지금의 아이치현)의 사카이(酒井)씨, 이나바국(因幡国)[13]의 이나바 모리 씨(因幡毛利氏), 이즈모국의 다코(多胡) 씨 등등 오에노 히로모토(大江広元)를 조상으로 하는 후손들이 많다. 물론 진위 여부는 논란이 많다. 대개 그의 후손들은 모토 「元」 나 히로 「広」 글자 등을 넣어 이름을 짓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하 음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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