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에노 히로모토(일본어:大江広元)[3]는 헤이안 시대 말기에 태어나 가마쿠라 막부 초기까지 활동한 공경(公卿,일본 귀족)이다. 하급 귀족 출신으로 처음엔 교토 황궁에 말단으로 출사했다가 가마쿠라에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를 만나 그의 측근이 됐으며, 막부와 황실 사이의 조정 역할을 맡았다. 가마쿠라 막부의 창업공신으로서 당시 핵심 정무 기관인 만도코로에서 초대 별당(別当)직에 올랐다. 먼훗날 전국 시대의 간웅(奸雄) 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가 그의 직계 후손이다.
가마쿠라 막부의 창업공신인 히로모토의 정확한 출신은 설이 분분하다. 오에 씨 족보(『江氏家譜』)는 후지와라 미쓰요시(藤原光能)의 아들로 생모의 재혼상대인 나카하라노 히로스에(中原広季)에게 양육됐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초기 일본 가계도 모음집인 존비분맥(일본어:尊卑分脈)에 실린 오에 씨 계보에는 히로모토가 오에노 고레미쓰(大江維光)의 아들로, 나카하라노 히로스에(中原広季)가 양부로 기재돼있다. 반면, 일본 초기 역사서이자 국문학서인 군서유종(일본어:続群書類従) 속편에 실린 나카하라 씨 계보에는 나카하라노 히로스에가 아버지에, 오에노 고레미쓰가 양부로 기록돼있다.
히로모토가 조정에 출사한 초기에는 '나카하라노 히로모토(일본어:中原 広元)'라는 이름으로 신하 명단에 올라있다. 오에 씨로 고쳐부른 기록은 만년인 겐포 4년(1216년)에 종5위상(従五位上) 품계인 무쓰노카미(陸奥守)로 임관했을 때였다. 히로모토는 조정에 개명 신청을 상주했던 모양으로, 아즈마카가미에는 윤달6월 14일 히로모토가 상소문에 양부 히로스에에게 받은 은혜가 크고 깊으나, 본가인 오에 씨의 쇠퇴를 보고 있기가 딱하여 생부 고레미쓰의 뒤를 이으려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4].
히로모토의 친형인 나카하라노 치카요시(中原親能)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 친분이 깊어 일찍부터 교토를 떠나 요리토모의 밑으로 들어갔다. 1183년(주에이 2년) 음력 10월에 치카요시는 미나모토노 요시쓰네(源義経)의 군세와 함께 상경 후 다이라 씨를 몰아냈고, 이듬해인 1184년(엔랴쿠 원년) 정월에 요리토모의 대관으로서 정이대장군 대관식을 치렀다. 귀족 신분으로서 자신의 주군인 장군과 여타 교토 귀족 공경(公卿)들 사이의 교섭을 주선했다.
이런 친형의 인연으로 히로모토도 요리토모와 함께 가마쿠라에 내려가 구몬도코로(公文所)의 별당(別当)직에 제수되었다. 요리토모가 대장군에 오른 후 정2품 우대장(右大将)에 올라 개인 정무 처리기관이였던 구몬도코로를 만도코로(政所)로 고쳐 장군으로서 정무를 시작했고, 히로모토는 별당직에 유임되어 주로 교토와 가마쿠라 사이의 교섭을 맡았다. 그외 분야에도 여러 가지 실무를 맡아 처리했다. 아즈마카가미[5]에 따르면 요리토모가 지방 슈고직(守護職), 지토(地頭) 등 중앙집권 체제로서의 임명 지방관직을 설치했던 것도 히로모토의 제안이었다 한다[6].
1199년(쇼지 원년) 요리토모가 급서하자 요리토모의 부인인 호조 마사코, 싯켄호조 도키마사와 손잡고 2대 쇼군미나모토노 요리이에를 막부 정치에서 배제시키는 데 성공했다. 3년 후 무리한 정치적 행동을 연발하던 요리이에가 병석에 눕자 자신의 집으로 빼돌려 유폐시키고 결국 주살, 3대 쇼군미나모토노 사네토모를 옹립했다. 조큐의 난 때는 장남 오오에노 치카히로(大江親広)와 부자의 연을 끊고 적이 되기도 했다. 당시 아즈마카가미 기록에서는 히로모토가 주전론을 펼친 호조 마사코에게 협조, 교토 조정과 싸움에 주저하는 고케닌(御家人)들을 부추켜 승리를 일궈낸 장본인 중 하나로 기록돼 있다[7]. 장남은 막부에 등을 돌리고 교토 조정의 편에 섰다가 패배후 변방으로 쫓겨갔다.
'와다 전투'때는 군사 모집과 영지 분배에 관해 히로모토가 싯켄(執権) 요시토키와 함께 고케닌들 명의로 연판장을 돌렸던 것이 남아있다[8]. 그는 막부 창업에 뒤늦게 참가한 후발 주자였지만 막부가 가지지 못한 교토 귀족들과의 독자적인 연락망을 가지고 있어, 단순히 하급 관리에 그치지 않고 정책 결정 및 시행에 있어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었다. 그가 정2품 요리토모를 제외하고 어떤 가마쿠라 막부 인사들보다도 품계가 높았던 것이 그 예다. 요리토모의 친동생 노리요리나 요리토모의 장인 호조 도키마사같이 여타 막부 요인 등도 잘해봐야 종5위하라는 낮은 품계에 머물렀던 반면, 그만은 대번에 정5품 품계를 받았었다. 요리토모 사후, 최고 실권자인 싯켄 호조 요시토키를 웃도는 정4품 품계를 받아 명목상으로는 쇼군 다음가는 지위를 갖게 되었다. 에도 시대의 학자 아라이 하쿠세키는 《독사여론》에서 오에노 히로모토는 집안 대대로 조정의 신하였으면서 요리토모를 도와 막부 창설에 공헌하였고, 나아가 호조 도키마사가 이치만을 죽일 때나 요시토키가 막부를 장악하는 과정에서 히로모토가 늘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어 자신의 이익을 쌓았다며, 히로모토가 조정에만 반역한 것이 아니라 요리토모에게도 반역한 자이고 그 아첨과 간사한 지혜는 요시토키에 버금간다고 혹평했다(하쿠세키는 요시토키를 두고 "일본 역사를 통틀어 찾아볼 수 없는 소인배"라고 지독하게 혹평하였다).
'성인이 된 후로 눈물을 흘린 적이 없다(「成人してから後涙を流したことがない」)'고 만년에 담담히 술회했다 한다[9]. 히로모토가 정보다는 냉정한 이성에 의해 움직이는 인물이었음을 반증하는 예로 많이 거론된다.
가마쿠라에 오에노 히로모토의 묘가 남아있으나, 실은 에도 시대(江戸時代)에 무명의 조슈 번사(長州藩士)에 의해 추모의 의미로 만들어진 허묘(虛墓)라고 한다. 조슈 번의 도자마 다이묘인 모리(毛利) 씨의 조상이 바로 오에노 히로모토로, 주군의 조상에 대한 존경을 표시할 목적이었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가마쿠라 지방의 전설에 따르면 가마쿠라 시 주변 12곳의 산에 지어진 오륜탑(五輪塔)이 본래 히로모토의 유해를 나눠 안치한 묘라고 전해진다.
장남 치카히로(親広)는 히로모토에 이어 만도코로 별당을 지냈고 교토슈고등 막부 요직을 두루 역임했지만, 위에서 기술한대로 조큐의 난 때 히로모토와 절연하고 교토 조정 편에 섰다가 막부 세력에 패배, 데와국 사가와(寒河江) 장원에 숨었다. 그의 후손들은 사가와(寒河江)씨가 되었다[10].
차남 나가이 도키히로(長井時広)는 빈고슈고(備後守護)에 올랐고 형 치카히로가 쫓겨난 이후 오에 씨의 적통을 이었다. 아들인 야스히데부터 효조슈에 올라 막부의 중요 사안들을 처리했다. 히로모토의 고손자인 무네히데(宗秀)는 요리아이슈(寄合衆)에도 임명되어 아즈마카가미의 편집자 중 하나가 되었다.
삼남 무네모토는 기록이 없으나 그의 아들 마사시게(政茂)는 1239년에 좌근위감(左近将監), 1241년에 종5위하(従五位下) 품계에 올랐다. 1254년에는 종5위상 히키즈케슈(引付衆)에 올랐다.
사남 모리 스에미쓰(毛利季光)는 1216년인 16세 때 이미 종5위하 품계에 올랐다. 1233년 음력 11월 3일에는 효조슈에 올랐다. 1247년의 호지 전투(宝治合戦)에는 미우라 야스무라의 원군으로 나섰다가 패전, 미우라 일족과 함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의 위패를 모신 불당에서 자결했다. 그래도 그의 4남 모리 쓰네미쓰(毛利経光)가 에치고(越後)에 따로 떨어져 살았던 덕에 홀로 살아남아 영지를 인정받고 대를 이었다. 쓰네미쓰의 차남 모리 도키치카(毛利時親)가 남북조 시대에 남조(南朝) 편에 서서 아키(安芸) 요시다(吉田) 장원을 하사받았고, 센고쿠 시대의 간웅(奸雄) 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가 그의 직계 후손이다[11]. 도키치카의 아들 대에는 에치고(지금의 니가타현) 동부의 유력 호족인 에치고 기타조 씨(越後北条氏)[12] 도 나왔다.
5남 다다나리(忠成)는 1227년에 종5위하 품계에 올랐고 그 후 종4위하까지 올랐다. 1245년에 효조슈가 됐지만 호지 전투에서 바로 손윗형님인 스에미쓰와 함께 거병했다가 실패, 도주했다. 얼마안가 관직삭탈이 된다.
그 외 미카와 국(三河国)(지금의 아이치현)의 사카이(酒井)씨, 이나바국(因幡国)[13]의 이나바 모리 씨(因幡毛利氏), 이즈모국의 다코(多胡) 씨 등등 오에노 히로모토(大江広元)를 조상으로 하는 후손들이 많다. 물론 진위 여부는 논란이 많다. 대개 그의 후손들은 모토 「元」 나 히로 「広」 글자 등을 넣어 이름을 짓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러나 1960년에 이시모다 쇼(石母田正)가 여기에 대해 상세히 분석하면서, 히로모토의 헌책이라는 것이 사실은 가마쿠라 후기에 하나의 설로서 제시된 것이 통설로 자리잡은 것이 아닌가 지적했다. 여기서 논쟁이 크게 일어나 이시이 스스무(石井進)의 '일본역사 제7권(『日本の歴史 7) 가마쿠라 막부 편, 천하의 구사야리(天下の草創) p187-p195 에 실린 내용에선 히로모토의 지방관 설치 헌책 내용은 빠져 있다. 대신 히로모토가 했던 것으로 확인되는 권문세가(権門勢家)들의 지위고하에 따라 병량미를 공정하게 내야한다는 등의 사실적 헌책만이 실려 있다. 그 내용으로는,
병량미는 전국평균(諸国平均)이 아닌 긴키 다섯지방(五畿), 산닌(山陰), 산요(山陽), 난카이(南海), 사이카이(西海) 지방으로 세분하여 징수할 것
미나모토노 요시쓰네와 유키이에의 수색 및 체포 명목으로 지역단위로 고쿠치토(國地頭)와 총추포사(総追捕使)를 차출하도록 할 것
다이라 정권 때 설치된 치토우를 개정하기 위해, 요리토모가 1190년 상경하여 고시라카와 법황(後白河法皇) 및 섭정인 구조 가네자네(九条兼実)와 협의하에 전국 슈고(守護)직 설치와 행정관인 부교(奉行)의 권한을 설정할 것(岩波講座『日本通史巻8 中世2』 p61-p63)
센고쿠 시대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흔히 알고 있는 센고쿠 다이묘 호조 씨는 사가미호조 씨로 따로 분류한다. 사가미 호조 씨는 헤이시의 후손으로 히로모토의 후손인 에치고의 기타조 씨와 동성이본이다. 에치고 기타조 씨는 시바타(新發田) 씨를 근거지로 나가오 씨와 우에스기 씨의 중신을 지냈다. 에치고의 기타조와 사가미 호조 두 집안은 적대 관계로 얽혀있었고 혈연 관계는 아니었다. 특히 사가미 호조 씨와 이름도 같고 같은 지역 기반으로 활동 시대가 전혀 다른 가마쿠라 막부의 싯켄 집안 호조(北條)씨와 구별하기 위해 사가미 호조씨를 특히 고호조(後北條) 씨로 구분하기도 한다. 호조 소운과 호조 우지야스 등이 사가미 호조 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