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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5년 일본 에도 지방에서 발생한 지진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안세이 에도 지진(安政江戸地震)은 에도 시대 후기인 1855년 (안세이 2년) 11월 11일(음력 10월 2일) 밤 10시 즈음 간토 지방 남부에 발생한[1] 규모 M6.9의 대지진이다. 다른 안세이 시대에 발생한 지진과 함께 묶어 특별하게 안세이 대지진(安政の大地震)으로 불리기도 한다.[2][3][4] 또한 이 지진의 피해는 1923년의 간토 대지진과 구별하기 위하여 1855년 간토 대지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미나미칸토 직하지진의 일종이다.
본진 | |
---|---|
현지일 | 1855년 11월 11일 |
현지시간 | 오후 10시 (JST) |
규모 | 일본 기상청 규모 M 6.9-7.4 |
최대 진도 | 일본 기상청 진도 계급 진도 6 : 에도 |
진앙 | 일본 에도 북위 35° 39′ 0″ 동경 139° 48′ 0″ |
종류 | 직하형지진 |
피해 | |
피해 지역 | 일본 간토 지방 |
지진해일 | 미미하거나 거의 없음 |
사상자 | 사망자 4천명-1만명 추정 |
에도 내 스미다강 동쪽(현 고토구)에서 가장 강한 흔들림을 느꼈다. 스미다강과 에도가와강 사이 낀 충적지대가 흔들림을 증폭시킨 것으로 추정된다.[5][6] 진도6 이상의 흔들림을 느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은 에도 일부 지역으로 한정되었으나, 진도4 이상의 흔들림을 느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은 도호쿠 지방 남부에서 도카이 지방까지 영역이다.[7]
근대적인 지진 관측이 이뤄지기 전에 일어난 역사지진이기 때문에 진원이나 지진 발생 구조에 대한 다양한 학설이 존재하는데, 일본 각지의 지진피해 자료 및 전조 현상 기록을 통해 북아메리카판 내부 지각 지진(대륙판 내 지진)이라는 설, 북아메리카판 아래로 섭입하는 필리핀해판 사이 지역에서 일어난 판 경계간 지진이라는 설, 필리핀해판 내부의 슬래브 내 지진이라는 설, 북아메리카 판 아래로 섭입하는 태평양판 사이 지역에서 일어난 판 경계간 지진이라는 설 등이 있다. 진원지는 도쿄만 북부, 아라카와강 하구, 지바현 서북부 등 다양한 설이 있다.
진원 깊이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하는데, 깊이 40km 미만의 얉은 지역에서 일어난 규모 M6.9의 지진이라는 설,[8] 필리핀해판 상부에서 일어난 판 경계형 지진으로 깊이가 매우 얉다는 설,[9] 고기록에 나타난 초기 미동이 약 10초가량 되었다는 점으로 깊이가 100km 가까이 된다는 설[10] 등이 존재한다.
2007년 연구 결과에서는 도쿄만 북부의 이치카와시 부근 깊이 70km 지점에 있는 침강한 필리핀해판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11]
도호쿠 및 신에쓰 북부까지 진도 분포를 넓혀 계산한 결과 필리핀해판 내부 지진인 2005년 지바현 서북부 지진(깊이 76km, 규모 M6)과 유사점이 크며 같은 지진의 깊이를 60km로 해 시뮬레이션 했을 때 스미다강 하구 인근의 활단층을 진원으로 했을 때 일어나는 간토 각지의 진도 분포 어긋남이 해결되고 문헌상과 거의 비슷한 진도 분포가 나온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12][7]
1951년 히로시 교수는 현 도쿄 아다치구 근처를 진원으로 잡고 Mk=4로 계산했을 때 규모가 대략 M6.9가 된다고 추정했다.[13] 2003년 우사미 교수는 M7.0-7.1 정도라고 추정했다.[14] 2001년 히키다 교수는 강진동 시뮬레이션을 통해 규모가 M7.4 정도라고 추정했다.[15]
에도 막부 말기 시절에 일어난 지진이라 다른 역사지진에 비해 기록이 매우 많이 남아 있다.[16][17][18][19][20] 다음은 일본 각지에서 느낀 추정 진도 기록이다.
가도 | 추정 진도[14] |
---|---|
기나이 | 교토(e), 이케다(e), 오사카(E) |
무사시국 | 한조몬(6), 요쓰야(6), 오가와마치(6), 다이묘코지(6), 간다(6), 유시마(6), 산다(6), 쓰키지(6), 가메아리(6), 오야타(6), 미쓰미네(E), 오메(4), 이쓰카이치(4), 하치오지(E), 히노(E), 다나시(4), 오노지(E), 소카(6), 히코이토(6), 고시가야(5), 도코로자와(4), 지치부(E), 고제토(E), 모로야마(5), 가와고에(5), 시키(6), 와라비(6), 우라와(6), 오미야(5), 오케가와(5), 고노스(5), 후키아게(6), 구마가야(5), 삿테(6), 구리하(6), 쓰루미(6), 가나가와(6) |
도카이도 | 다카하기(E), 가미이즈시마(6), 미무라(6), 오노(5), 조시(e), 가부라기(E), 후카와(6), 후사(6), 아비코(5), 마쓰도(6), 사쿠라(5), 나리타(5), 나루토(5), 헤타(5), 와카야마(E), 가쓰우라(5), 보소진야(5), 기라사즈(6), 소데가우라(6), 쓰루마키(6), 사기누마(5), 가미미야다(6), 자이모쿠자(6), 도쓰카(5) - 후지사와(6) - 히라쓰카(5), 가미미조(5), 가쓰누마(E), 고후(E), 자엔(E), 하코네(5), 아시가라(4), 아지로(E), 시모다(E), 니지마섬(5), 누마즈(e), 후추(e), 아라이(e), 도요카와(E), 도요하시(e), 니시오(e), 쓰(e), 이세(e) |
도산도 | 하치노헤(e), 아오모리(e), 히로사키(e), 요코테(e), 오이시다(e), 나가이(e), 이시노마키(E), 센다이(e), 후쿠시마(E), 아이즈(S), 모리야마(S), 야부키(4-5), 나스(E), 우쓰노미야(E), 닛코(5), 덴메이(4-5), 아카시로(5), 나가이(E), 나가노(E), 우에다(5), 우스다(E), 스와(E), 고마가네(e), 마고메(E), 게조(e), 가미이시즈(e), 오미하치만(e) |
호쿠리쿠도 | 시바타(E), 오코즈(e), 쓰케(e), 우마야(e), 이토이가와(e), 히미(e), 오노(e) |
산인도 | 미야즈(E) |
산요도 | 오카야마(e), 가사오카(e) |
S: 강한 지진(≧4), E: 대지진(≧4), M: 중규모 지진(2-3), e: 소규모 지진(≦3) |
피해 지역은 에도를 중심으로 한 간토평야 남부 지역으로 국한되었으나 대도시인 에도의 피해는 극심했다. 지진 피해는 연약 지반인 충적층의 두께에 비례했는데 무사시노 고원이 있는 야마테 지역이나 매몰된 충적 고원이 바로 지표 아래에 있는 니혼바시 지구 대부분 및 긴자 지역은 번주나 지주 집이 반파에서 그치는 등 진도 5강 정도의 흔들림이 느껴져 피해가 적었으나 시타마치, 특히 간척한지 얼마 되지 않은 스미다강 동쪽의 후쿠가와나 아사쿠사의 요시와라 지역은 진도 6약 이상의 흔들림이 느껴졌으며 피해도 매우 컸다. 또한 히비야에서 황거외원, 오테마치, 간다진보초 등 저지대 습지를 매립한 지역도 번주 집이 완전 붕괴된 기록이 남아있는 등 피해가 매우 컸으며 진도 6약 이상의 흔들림이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후쿠이현 및 오사카부 일부 지역에서도 진도 4-5 정도의 흔들림이 있던 지역이 있어 이상진역 현상이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21]
고이시카와의 미카와번의 저택도 붕괴되었으며 미토번주인 도쿠가와 나리아키의 심복이자 '미토의 료타'라고 불렸던 도다 주우다유, 후지타 도코 등이 사망해싿.[4] 또한 나리아키의 사위인 모리오카번의 번주 난부 도시히사도 부상을 입었다. 지도자를 잃은 미토번은 내부 항쟁이 격화되었으며 이는 안세이 7년(1860년) 사쿠라다문 밖의 변으로 이어졌다.[22]
에도성과 막부 수뇌부의 여러 저택들도 큰 피해를 입어 정이대장군 도쿠가와 이에사다 가문들은 일시적으로 후키아게 교엔으로 피난을 갔다. 에도 막부는 전년도의 안세이 도카이/난카이 지진으로 인한 각 번의 부흥 자금 대출, 복구 사업 지출과 지진 피해를 입은 무사 및 고위층 피해자 지원 등으로 인한 막대한 자금 소모로 에도 시중의 부흥을 위해 고리대 지출이 끼어 에도 막부 말기 혼란한 상황에 에도 지진으로 재정 악화가 심화되었다.[22]
각 마을별 사망자는 음력 10월 6일 막부에서 처음 공식 조사로 보고된 수치로 4,394명이었다.[23] 10월 중순 2차 조사에서는 4,741명 사망, 붕괴 가옥 14,346채로 보고되었으며 사원령 지역, 보다 넓은 주택을 가지고 있어 특히 피해가 컸던 무사 가문 주택을 포함하면 사망자는 1만명 이상일 것으로 추정된다.[14]
지진 직후 30여 곳에서 불이 났으나 아침부터 가랑비가 내리고 미풍이 불었기 때문에 대규모로 화재가 번지지는 않았고 다음 날 오전 10시 경에는 전부 진화되었으나 대략 1.5km2 영역이 불에 탔다. 고기록 일부에서는 2.2km2로 기록되어 있는 자료도 있으나 재계산 결과 1.5km2 영역으로 파악되었다.[20] 하타모토 및 오이에닌의 저택은 80% 넘게 소실되거나 지진으로 붕괴, 파손되는 피해를 입었다. 가메아리에서는 논밭에 작은 산이나 늪이 생기는 피해가 발생했으며 그 면적이 3만 섬에 달했다.[24]
에도 지진으로 쓰나미가 일어났다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지만, 지진의 진동으로 강이나 도랑의 물이 흔들리고 튀는 세이시 비슷한 현상은 여럿 기록되었다.[25]
안세이 시대에는 1854년 12월 23일에 안세이 도카이 지진(M8.4)이, 32시간 후인 12월 24일에는 안세이 난카이 지진(M8.4)이 발생하였으며 여기에 안세이 에도 지진을 더해 안세이 3대 지진이라 불린다. 이 외에 1854년 이가우에노 지진, 1858년 히에쓰 지진 등 안세이 연간 연달아 일어난 대지진을 묶어 안세이 대지진이라 일컫는다.[26]
이들 지진은 가에이 연간에 일어난 지진이나[27] 천재지변 및 궁궐 화재, 페리 원정 사건 등의 이유로 연호를 개원하여 1854년을 원년으로 안세이로 바꿨기 때문에 '안세이 지진'이라 불린다.[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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