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돌프 히틀러의 그림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아돌프 히틀러의 그림

1933년부터 1945년 자살할 때까지 나치 독일의 독재자였던 아돌프 히틀러는 화가이기도 했다.[1] 에서 히틀러가 지낸 1908년부터 1913년까지 전문 예술가로서 생계를 유지했고 수백 개의 작품을 제작했지만 상업적으로 성공하지는 못했다. 그의 그림 중 일부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수만 달러에 경매에서 판매되었으며, 다른 일부 그림들은 미국 육군에 압수되어 미국 연방 정부가 소유하고 있다.

Thumb
1912년 히틀러가 그린 빈 국립 오페라 극장의 모습.

스타일과 영향

히틀러가 그리기 선호했던 주제는 건축이었으며, "전통적인 스타일의 혼합물"을 사용하여 이를 표현했다.[2] 히틀러의 그림은 더 발전하는 대신, 주로 19세기 다른 예술가의 작품을 모방했고[3] 그리스-로마 고전주의, 이탈리아 르네상스, 신고전주의 등에서 영감을 얻었다. 히틀러는 예술이 보여주는 기술적 능력과 이해할 수 있는 상징적인 것들을 좋아했다.[4]

연대

예술적 욕구

히틀러는 1925년 자서전인 《나의 투쟁》에서 젊은 시절에 전문 예술인이 되고 싶었지만 빈 미술 아카데미의 입학 시험에서 떨어져 꿈이 산산조각 났다고 표현했다.[5] 히틀러는 1907년과 1908년 두 번이나 아카데미에서 탈락했다. 첫 번째 시험에서 히틀러는 지정된 상징적이거나 성경적인 장면 두 개를 3시간씩 두 차례에 걸쳐 그리는 예비 시험에 합격했다. 두 번째 시험에서 심사위원에게 미리 준비한 포트폴리오를 제공하는 것이었는데, 히틀러의 작품은 머리를 너무 작게 표현했다는 지적을 받았다.[6] 아카데미는 히틀러가 그림보다 건축에 더 재능이 있다고 판단했으며,[7] 그의 상황을 이해하고 히틀러가 재능이 있다고 생각한 심사위원 한 명이 아카데미 건축학부에 지원하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그러려면 중퇴했고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중등학교 과정을 이수해야 했기 때문에 히틀러는 거절했다.[8] 이후 히틀러는 화가가 되었고 건축은 하지 않았지만, 그림을 "단순한 생계형 작업"으로 여기게 되었고 건축을 자신의 진정한 사명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9]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한 달 전인 1939년 8월, 《영국 전쟁 청서》에 실린 내용에 따르면, 히틀러는 영국 대사 네빌 헨더슨에게 "저는 정치인이 아니라 예술가입니다. 폴란드 문제가 해결된다면 예술가로서 삶을 마감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7][5]

빈 시기

1908년부터 1913년까지 히틀러는 전문 예술가로서 빈약한 생계를 유지했다.[9] 히틀러는 21세의 나이인 1910년 첫 자화상을 그렸고, 이 그림은 1945년 독일 에센에서 미국 육군 상사 윌리 J. 맥케나에 의해 발견되었다.[10]

Thumb
캔버스에 유화, 《성모 마리아와 성자 예수 그리스도》, 1913년[11]

오스트리아 사업가이자 젊은 히틀러의 빈 시절 사업 파트너였던 사무엘 모겐스턴은 히틀러의 그림 중 많은 것을 구매했다. 모겐스턴은 히틀러가 1910년대 초인 1911년이나 1912년 처음 자신의 유리 가게에 찾아와 자신의 그림 3개를 주었다고 말했다. 모겐슈턴은 고객에 대한 자세한 기록을 보관했고, 이를 통해 히틀러의 그림을 구매한 사람들을 찾을 수 있었으며, 구매자의 대부분이 유대인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모겐슈턴에게 중요한 고객이었던 요제프 핑골트라는 변호사는 히틀러가 그린 빈의 옛 그림을 구매했다.[12]

갤러리

각주

참고 문헌

추가 읽기

외부 링크

Loading related searches...

Wikiwand - on

Seamless Wikipedia browsing. On steroid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