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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제25대 국왕 (?–579)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진지왕(眞智王, ? ~ 579년 8월 24일 (음력 7월 17일), 재위: 576년~579년)은 신라의 제25대 임금이다. 휘는 사륜(舍輪) 또는 금륜(金輪)이다. 진흥왕의 차남이나 장남인 형 동륜태자가 일찍 죽었기 때문에 대신 즉위했다. 어머니는 사도왕후(思道王后)[1], 비는 지도부인(知道夫人)이다. 능은 경주(慶州) 영경사(永敬寺) 북쪽에 있다.
즉위와 동시에 이찬 거칠부를 상대등으로 삼아 국정을 맡겼다.[2] 이듬해에는 왕이 직접 신궁에 제사를 드렸다.[3] 재위 3년(578년) 7월에는 남조의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고 외교 관계를 이어갔다.[4]
백제와는 대결 양상을 이어갔다. 재위 2년인 577년 10월에는 백제가 서쪽 변경을 침입하였다. 이에 왕은 이찬 세종(世宗)을 파견하여 물리치고, 내리서성(內利西城) 등을 쌓아 방비를 굳게 하였다.[5] 그러나 이듬해에는 백제에게 알야산성(閼也山城)을 주었고,[6] 579년 봄에는 백제가 웅현성(熊峴城), 송술성(松述城)을 쌓아 산산성(䔉山城), 마지현성(麻知峴城), 내리서성 등의 길을 끊었다. 그리고 그 해 7월 17일, 왕이 죽고, 시호를 진지(眞智)라 하고 영경사(永敬寺) 북쪽에 장사지냈다.[7]
야사 《삼국유사》에 의하면, 즉위한 지 4년 째 되던 해에 정사가 어지럽고 문란하여 나라 사람들이 그를 폐위하였다. 폐위되기 직전 진지왕은 도화녀(桃花女)를 후궁으로 삼으려 하였으나, 도화녀가 남편이 있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2년 뒤 도화녀의 남편이 죽자, 진지왕의 혼령이 도화녀에게 나타나 둘이 관계를 맺었고, 도화녀는 이후 비형을 낳았다. 이후 비형은 진평왕 대에 관리로 등용된다.
한편, 위서 논란이 있는 야사 《필사본 화랑세기》에는 미실을 왕후로 만드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과 국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였던 것 때문에 미실과 사도태후가 결의하여, 노리부를 앞세워 폐위시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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