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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 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러시아어: Генеральный секретарь Центра́льный комите́т Коммунистическая партия Советского Союза 게네랄니 세크레타리 첸트랄니 코미테트 콤무니스티체스카야 파르티야 소베츠코보 소유자[*])은 소련 공산당의 제1 지도자로써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최고 지도자였다.
1924년까지의 소련의 국가원수는 최고 소비에트 상임간부회 주석, 정부수반은 인민위원평의회 주석 및 그 후신인 소련 각료평의회 주석이었다. 서기장은 1917년 설치된 "기술서기"를 그 시초로 하며, 이후 1918년 "서기국 주석"으로, 1919년 "책임서기"로 직함을 변경하였고, "서기장" 직함은 1922년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 1923년까지 소련 및 소련 공산당의 최고 지도자는 인민위원평의회 주석 블라디미르 레닌이었다. 1924년 블라디미르 레닌이 사망한 이후 당시 서기장이던 이오시프 스탈린은 소련 공산당의 모든 권력 정점에 섰고, 이에 따라 전 연방 공산당의 서기장이 곧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1953년에서 1966년 사이 재임한 니키타 흐루쇼프는 "서기장" 대신 제1서기(러시아어: Первый секретарь 페르비 세크레타리[*]) 직함을 사용했으나 흐루쇼프가 실각한 이후 "서기장"으로 다시 복귀되었다.
성명 (생몰연도) |
증명사진 | 재임기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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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중앙위원회 기술서기 (1917년 – 1918년) | |||
엘레나 스타소바 (1873년 – 1966년)[1] |
1917년 4월 – 1918년 | 기술서기 스타소바에게는 네 명의 여직원이 딸려 있었으며, 이들 다섯 여성은 지구당 세포를 관리, 업무를 할당, 회계 내역 기록, 당 예산 분배,[2] 당 구조 정책 공식화, 신임 인력 배치[3] 등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수행했다. | |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국 주석 (1918년 – 1919년) | |||
야코프 스베르들로프 (1885년 – 1919년)[4] |
1918년 – 1919년 3월 16일 | 스베르들로프는 1919년 3월 16일 서기국 주석 재임 중에 사망했다. 재임 기간 동안 정치적 업무보다는 기술적 업무를 담당했다.[5] | |
엘레나 스타소바 (1873년 – 1966년)[1] |
1919년 3월 – 1919년 12월 | 서기국이 해산된 이후 그 후신인 책임서기직이 만들어졌고, 스타소바는 책임서기에 어울리는 인물로는 고려되지 않았다.[6] | |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책임서기 (1919년 – 1922년) | |||
니콜라이 크레스틴스키 (1883년 – 1938년)[7] |
1919년 12월 – 1921년 3월 | 당시 책임서기직은 서기처럼 기능했다. 크레스틴스키는 이미 정치국, 조직국, 서기국에 적을 두고 있었고, 크레스틴스키의 다른 직함들과 비교했을 때 책임서기는 사소한 자리에 불과했다.[8] | |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1890년 – 1986년)[9] |
1921년 3월 – 1922년 4월 | 1921년 3월 열린 러시아 공산당 제10차 대회에서 책임서기로 선출되었다. 대회에서 책임서기가 정치국 총회에 참여해야 한다는 조항이 만들어졌고, 그 덕분에 몰로토프는 정치국 후보위원이 되었다.[10] | |
전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 (1922년 – 1952년) | |||
이오시프 스탈린 (1878년 – 1953년)[11] |
1922년 4월 3일 – 1952년 10월 16일 | 블라디미르 레닌의 사후 서기장에 취임한 이오시프 스탈린은 서기장직을 전연방의 최고 지도자직으로 개편하였다. 1934년 열린 전연방 공산당 제17차 대회에서 이오시프 스탈린은 공식적으로 서기장으로 재선출되지는 않았고[12] 그 뒤로 서기장 직함이 이야기에 오르는 일은 거의 없어졌다.[13] 1922년부터 1953년까지 이오시프 스탈린은 소련 공산당 서기장직과 함께 소련의 최고 지도자직을 역임하였다. 1952년 10월 16일 열린 전연방 공산당 제19차 대회에서 서기장직이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 |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1953년 – 1966년) | |||
니키타 흐루쇼프 (1894년 – 1971년)[14] |
1953년 9월 14일 – 1964년 10월 14일 | 1953년 9월 14일 흐루쇼프는 서기장직을 "제1서기"라는 이름으로 재설치했다. 1957년 제1서기의 권력이 사실상 무한해질 것을 우려한 각료평의회 주석 게오르기 말렌코프에 의해 흐루쇼프는 실각 직전까지 몰렸다.[15] 그러나 정치암투 끝에 말렌코프를 역으로 실각시킨 뒤 흐루쇼프는 제1서기로서 최고권력자가 된다. 1964년 브레즈네프가 흐루쇼프를 실각시키고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16] | |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1906년 – 1982년)[17] |
1964년 10월 14일 – 1966년 4월 8일 | 흐루쇼프가 제1서기 및 주석직에서 실각하게 된 이후 소련 공산당 중앙위 총회는 한 사람이 서기장과 주석을 겸임하는 것을 금지하였고, 따라서 제1서기직은 레오니트 브레즈네프가, 주석직은 알렉세이 코시긴이 맡게 되었다.
1966년 열린 소련 공산당 제23차 대회에서 "제1서기" 직함이 다시 "서기장"으로 환원되었다.[18] | |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 (1966년 – 1991년) | |||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1906년 – 1982년)[17] |
1966년 4월 8일 – 1982년 11월 10일 | 흐루쇼프를 실각시킨 뒤 서기장에 오른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와 주석에 오른 코시긴은 권력을 양분하여 집단지도체제를 형성하였고 때문에 브레즈네프 재임 초기에는 뚜렷한 최고권력자가 없었다.[19] 이후 1970년대가 되면서 브레즈네프의 영향력이 코시긴의 그것을 압도하기 시작했고, 브레즈네프는 급진적 개혁 시도를 거부하면서 서기장의 권한을 다시 확대하였다.[20] | |
유리 안드로포프 (1914년 – 1984년)[21] |
1982년 11월 12일 – 1984년 2월 9일 | 안드로포프는 브레즈네프의 장례식을 준비 및 관리하는 위원회의 의장이 되면서 서기장 후보 물망에 올랐다.[22] 브레즈네프와 동일한 방식으로 국가를 운영하였으나 재임 2년 만에 사망하였다.[23] | |
콘스탄틴 체르넨코 (1911년 – 1985년)[17] |
1984년 2월 13일 – 1985년 3월 10일 | 안드로포프의 후임 서기장으로 선출되었을 당시 체르넨코는 이미 72세였고 건강이 급속히 악화되었다.[24] 체르넨코 역시 브레즈네프와 동일한 방식으로 국가를 운영했는데 1년 만에 사망하였다.[23] | |
미하일 고르바초프 (1931년 – 2022년)[25] |
1985년 3월 11일 – 1991년 8월 24일 | 소련 붕괴 직전인 1990년에 열린 소련 인민대표회의는 1977년 소련 헌법에서 제6조를 삭제할 것을 의결했다. 이는 곧 소련 공산당이 “소비에트 사회를 지도하고 안내하는 힘”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한 것으로서 그 결과 서기장의 권력도 대폭 줄어들었다. 서기장직이 유명무실화된 이후 고르바초프는 대통령 직함으로 나라를 다스렸다.[26] 1991년 8월 쿠데타의 여파로 고르바초프는 같은 달 24일 모든 당직에서 사퇴한다.[27] | |
블라디미르 이바시코 (권한대행) (1932년 – 1994년)[28] |
1991년 8월 24일 – 1991년 8월 29일 | 이바시코는 소련 공산당 제28차 대회에서 부서기장으로 선출되었다. 고르바초프가 사임함에 따라 서기장 권한대행이 되었으나 이 시기에 이르면 소련 공산당은 정치적으로 무력화되어 있었고 8월 29일 공산당이 아예 불법정당으로 금지됨으로써 이바시코의 서기장 임기는 불과 닷새만에 끝났다.[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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