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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량부(經量部, 산스크리트어: Sautrāntika 사우트란티카, 팔리어: Suttavāda 숫타바다)는 인도의 부파불교의 한 부파이다. 설일체유부에서 갈라져 나온 부파로,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가 3장(三藏) 가운데 논장[論] 즉 아비달마를 중시했음에 비해 경장[經]을 정량(正量: 지식의 바른 근거)으로 삼아 의지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경량부'라고 스스로 칭하였다.[1][2][3]
약칭으로 경부(經部)라고도 하며, 별칭으로 비유부(譬喻部)[4] · 상속부(相續部) · 설경부(說經部) · 설도부(說度部) · 설전부(說轉部) · 수다라론(修多羅論) · 수투로구(修妬路句) 또는 승가란제가(僧伽蘭提迦)라고도 한다.[5]
세우(世友: 1~2세기[6][7])의 《이부종륜론(異部宗輪論)》에 의거하여 경량부가 기원전 1세기에 설일체유부에서 분리하여 성립되었다고 전통적으로 여겨왔는데, 현대의 학자들은 경량부가 기원후 1세기경부터 나타난 비유자(譬喩者) 또는 비유사(譬喻師)라고 불린 설일체유부 내의 이견을 가진 그룹에서 기원하며, 이 그룹에 속한 논사인 쿠마랄라타(Kumāralāta: 3세기 말경)를 거쳐 그의 제자인 슈리라타(Śrīlāta)에 의해 설일체유부에서 분리하여 기원후 4세기경에 경량부가 성립된 것으로 본다.[2][3]
세우(世友: 1~2세기)의 저술을 현장(玄奘: 602~664)이 한역한 《이부종륜론(異部宗輪論)》에는 경량부라는 명칭이 등장하는데, 이 논서에 따르면 경량부는 불멸(佛滅) 후 4백년 초에 설일체유부에서 분파하였다.
至第四百年初。從說一切有部。復出一部。名經量部。亦名說轉部。自稱我以慶喜為師。
[불멸 후] 4백 년 초에 이르러서 설일체유부로부터 다시 한 부가 나왔으니 이름이 경량부(經量部) 또는 설전부(說轉部)라고도 이름하였으며 자칭 “우리는 경희(慶喜)로써 스승[師]을 삼는다”* [주해]고 하였다.* [주해] 경희(慶喜)는 고타마 붓다의 10대제자 가운데 한 명의 이름인 아난다(Ānanda)의 한역어이다.[8] 여기서는 비유로서, 결집시 아난다가 독송한 것을 뜻한다. 즉 논장이나 율장이 아닌 경장을 뜻한다. 그리고 스승[師]은 정량(正量) 즉 지식의 바른 근거를 뜻한다.
述曰此師唯依經為正量。不依律及對法。凡所援據以經為證。即經部師。從所立以名經量部。亦名說轉部者。此師說有種子。唯一種子。現在相續。轉至後世。故言說轉。至下當知舊云說度部。然結集時尊者慶喜專弘經藏。今既以經為量故。以慶喜為師。從所立為部名。滿慈弘宣對法。近執弘毗奈耶。既不依於對法及律故。今唯以慶喜為師也。
술하여 말하겠다. 이 사(師)들은 오직 경(經)을 의지하여 정량(正量)으로 삼았고 율(律)과 대법(對法: 논)에는 의지하지 않았다. 대체로 도움을 받고 근거가 되는 곳으로서 경(經)을 증거로 삼았기 때문에 곧 경부사(經部師)인 것이며, [이렇게] 세운 바를 따라서 경량부(經量部) 또는 설전부(說轉部)라고 이름한 것이다. 이 사(師)에서는 말하기를, 종자(種子)가 있는데 오직 하나의 종자가 현재에서 상속하여 후세까지 전지(轉至)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설전(說轉)이라고 말한 것이다. [전하여] 아래로 이르므로, 이 때문에 옛날에는 설도부(說度部)라고도 칭했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결집시 경희(慶喜: 아난다) 존자가 경장(經藏)을 널리 전담하였는데 지금에서는 이미 경(經)을 량(量: 지식의 근거)으로 삼는 것이므로 따라서 경희(慶喜: 아난다)를 스승[師]으로 삼는[다고 말하는] 것이며, [이렇게] 세운 바를 따라 부파(部)의 이름으로 삼은 것이다. 만자(滿慈: 부루나)는 대법(對法: 논)을 널리 선양하였고 근집(近執: 우파리)은 비나야(毗奈耶: 율)를 널리 선양하였다. 이미 대법에도 율에도 의지하지 않으므로 지금에서는 오직 경희(慶喜: 아난다)를 스승[師]으로 삼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 《이부종륜론술기》. 한문본 p. 577 (b17-b23).
세우의 논서에 대한 현장의 한역 《이부종륜론》과 이 논서에 대한 규기(窺基: 현장의 제자)의 주석서인 《이부종륜론술기(異部宗輪論述記)》의 이러한 내용에 근거하여 경량부가 불멸(佛滅) 후 4백년 초, 즉, 기원전 1세기에 성립되었다고 전통적으로 여겨왔다.[2]
위의 전통적 견해와는 달리, 현대의 학자들은 기원후 1세기경에 설일체유부 내에서 정통파 그룹과는 다른 견해를 가진 그룹으로 비유자(譬喩者, Dārṣṭāntika) · 비유사(譬喻師) 또는 설전사(說轉師)라고 불린 그룹이 있었으며, 이 그룹에서 경량부가 유래한 것으로 본다. 이 그룹의 명칭을 비유자 또는 비유사라고 한 이유는 비유(譬喻)를 사용하여 논의나 설법을 전개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2][3]
즉, 카니슈카(Kanishka 迦腻色伽 가니색가: 재위 127~151)왕 때 카슈미르계 정통 설일체유부의 대표 논서인 《아비달마대비바사론》(2세기 중반에 성립[9])이 성립될 때 이 논서의 계통에 속한 이들과는 의견이 달랐던 즉 비바사사(毘婆沙師: 대표적인 인물은 세우와 협존자[9]) 그룹과는 의견이 달랐던 비유자 그룹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 비유자 그룹에 속한 대표적인 논사는 《아비달마대비바사론》 성립 시기보다 더 후대의 3세기 말경의 쿠마랄라타(Kumāralāta 또는 Kumāralabdha, 鳩摩羅馱 구마라타, 鳩摩邏多 구마라다)이다.[10][11][12] 그는 설법을 함에 있어 비유(譬喻)를 많이 사용하였기 때문에 특히 비유사(譬喻師)라고 불렸다.[4] 그를 거쳐서 그의 제자인 슈리라타(Śrīlāta, 室利羅多 실리다라)에 의해, 비바사사 그룹이 정통파 그룹으로 여겨지고 있던 당시의 설일체유부에서 분리하여 기원후 4세기경에 경량부가 성립된 것으로 현대의 학자들은 보고 있다.[2] 한편, 슈리라타를 경량부의 개조로 보는 견해와는 다소 다른 견해로, 쿠마랄라타가 경량부의 개조이며 슈리라타가 중흥조인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10]
이러한 현대의 기원설과 관련하여, 카슈미르계 정통 설일체유부의 대표 논서인 《아비달마대비바사론》(2세기 중반에 성립)에서는 자파내의 이설을 가진 이로서 경량부 계통에 속한 이의 견해를 말할 때 비유자(譬喩者)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으며, 또한 《아비달마대비바사론》의 강요서이면서 또한 경량부 등의 교학을 참조하여 설일체유부의 교학을 비판적으로 집대성한 논서인 세친(316?-396?)의 《아비달마구사론》(4세기 중반에 성립)에서도 경량부의 견해를 언급할 때 비유자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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