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의 서간 가운데 하나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베드로의 둘째 편지(영어: second eipistle of peter) 또는 베드로의 둘째 서간 혹은 베드로후서는 신약성경의 서간 가운데 하나이다. 신약성경중 정경으로 인정되기까지 가장 오랜시간이 걸렸다. 예수의 제자인 시몬 베드로가 그 저자로 1장 1절에서 언급하고 있으며 전통적으로 이를 받아들여왔지만, 현대의 성서학자들은 이 서신을 베드로의 추종자 중 한 명 이상이 베드로를 가명으로 사용하여 저술한 위서로 본다.[1][2][3][4][5] 저술 연대는 AD 60~150년으로 추정된다.
초기비판자들은 베드로의 제자들이 베드로의 이름을 빌려서 썼다고 보았다. 그러나 오늘날은 베드로의 첫째 편지와 베드로의 둘째 편지가 글형식에 차이가 나는 것은 베드로가 각기 다른 필사자를 고용했기 때문이라고 보기도 한다.
베드로의 둘째 편지의 서두에는 저자로 사도 베드로의 이름이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고대부터 이 편지의 진정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어 왔으며, 이를 진정한 서신으로 보는 이들도 "신약성경 중에서 가장 저자에 대한 의심을 받았던 책"이라는 점은 인정한다.[6]
의심을 받는 주요 이유 중 하나는 문체이다. 이 편지의 문체는 베드로의 첫째 편지와도 다르며,[주해 1] 헬레니즘적 요소가 용어나 개념에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7][8][9] 또한, 복음서에서 묘사된 베드로의 솔직한 성격과는 달리, 이 편지의 문체는 과장되고 격식을 차린 듯한 느낌을 준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10][11] 이러한 문체는 우회적이고 기교적이며,[12] 장식이 많다는 평가도 있다.[13]
바트 D. 어만은 역사적 인물인 베드로가 글을 쓸 수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사도행전 4장 13절에서 그가 "학문이 없고 무식한 사람"으로 묘사되었거나, 갈릴리의 작은 도시 가버나움 출신의 어부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당시 가버나움은 비교적 작은 규모의 도시였고, 단일 언어를 사용하는 지역으로 문맹률이 높았을 가능성이 크다.[14]
리처드 보컴은 U. 홀츠마이스터의 1949년 연구 데이터를 사용하여 베드로전서와 후서의 어휘 통계적 차이를 분석했다.[15] 연구에 따르면, 베드로전서와 후서에서 38.6%의 단어가 공통되고, 후서에서 나타나는 61.4%의 단어가 고유하며, 베드로전서에서 사용된 단어 중 28.4%가 두 서신에서 공통되지만 71.6%는 베드로전서에만 나타난다. 그러나 이러한 수치는 다른 정통으로 여겨지는 서신들과 비교했을 때, 단순한 통계적 분석만으로 문학적 관계를 입증하기에는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다.[16][17][18][19]
보컴은 또한 "베드로후서의 그리스어 문체는 현대 독자들이 선호하지 않을 정도로 때때로 과장되고 거창하며, 다소 인위적인 수사와 '미끄러운 그리스어'가 특징"이라고 지적했다. 반면 베드로전서는 보다 단순하고 직설적인 문체를 사용한다. 보컴은 이러한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베드로후서가 '아시아적 그리스어(Asiatic Greek)' 전통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을 제시한다.[20] 이러한 차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가 논쟁의 핵심이다. 켈리(Kelly)와 같은 학자들은 이러한 차이점들이 베드로전서와 후서가 동일한 저자에 의해 쓰이지 않았음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21]
이에 대해 진정한 서신이라고 보는 입장에서는, 실루아노에게 구술하여 작성된 베드로의 첫째 편지와 달리, 이 둘째 편지는 베드로가 직접 썼거나 다른 필경자를 통해 작성되었기 때문에 문체가 달라졌을 것이라는 반론을 제기한다.[22] 또한, 갈릴리의 어부였던 베드로가 이러한 헬레니즘 색채가 강한 편지를 쓸 수 없다는 비판에 대해서도, 구약성경의 그리스어 번역본인 70인역에서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 교통의 요지였던 갈릴리에서 헬레니즘 사상을 접했을 가능성,[23] 또는 예수의 승천 이후 각지에서 복음을 전파하며 현지의 용어를 사용했을 가능성[24] 등이 있다는 반박이 제시된다.
또한 복음주의자들은 만약 저자가 베드로의 이름을 도용한 다른 사람이라면, 정직함에 대해 논하는 내용과 모순된다는 지적도 하고 있다.[23] 이에 따라 비좁은 의미의 진필설뿐만 아니라, 비서가 작성했거나 베드로가 남긴 문서를 바탕으로 그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의 지도자가 편집했을 가능성까지 포함하는 광의의 진필설도 제시되고 있다.[25]
그러나 현대에 들어서 베드로의 진정한 서신으로 보는 입장이 소수라는 점은 여러 주석서에서도 인정되고 있다.[23] 비슷한 입장은 역시 진정한 서신설을 채택하는 복음주의의 『에센셜 성서사전』에서도 드러난다.[22] 또한, 가톨릭교회의 페데리코 바르바로도 진정한 서신으로 보았으나, 자유주의 신학자들 대부분이 위서(僞書)로 간주하고 있으며, 이를 진정한 서신으로 적극적으로 증명하기는 어렵다는 점을 인정했다.[26]
한편, 위서로 보는 입장 내에서도 견해 차이가 존재한다. 저자가 자신의 위장이 드러나지 않도록 다양한 전략을 사용했을 것이라는 입장과,[27] 저자의 위장이 당시 사람들에게도 명백했을 것이며 이를 "기만의 의도가 없는 공적인 위서"로 보는 입장도 있다.[28][주해 2] 베드로후서가 유언장 문학(testamentary genre)과 같은 특정 유형의 가명문서(pseudepigraphy)였으며, 이러한 관행이 당시에는 일반적이고 도덕적으로 허용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즉, 제자들이 작성한 작품이 스승의 이름으로 출판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29][30][주해 3]
베드로 후서의 작성 시기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서 다양한 의견이 존재한다. 아래는 주요 학자들의 주장과 그에 따른 추정 시기이다.
본서의 기록에 따르면, 베드로가 죽음을 앞두고 쓴 것으로 되어 있다(1장 14절). 이를 진정한 서신으로 볼 경우, 이러한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 시기는 베드로의 순교 직전으로 추정된다. 가톨릭교회의 페데리코 바르바로는 집필 시기를 66년 말 또는 67년 초로 추정했으며,[57] 복음주의 진영에서도 66년경,[22] 67년경,[58] 68년경이라는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59] 이에 비판적인 자유주의 진영에서는, 만약 60년대에 작성되었다면 당시 초대교회가 겪고 있던 심각한 상황이[주해 4] 문장 속에서 드러나지 않는 점을 문제로 지적한다.[12]
이를 위서(僞書)로 볼 경우, 작성 시기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여러 기록이 제시된다. 그중 하나는 3장 15절과 16절에서 바울의 서신들이 널리 읽히고 있다는 내용이다(후술). 이 구절로 미루어 보아, 본서가 작성된 시기에는 이미 바울의 서신들이 정리되어 구약성경과 같은 권위를 얻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60] 이는 바울이 생존해 있을 때 발생했을 가능성이 낮다는 주장이다.[61][9]
이에 대해 복음주의 진영에서는, 오늘날과 같은 완성된 형태의 바울 서신집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모아진 형태라면 바울 생존 시에도 가능했을 것이라는 반론이 제기되고 있다.[22] 또한, 베드로가 바울이나 바울과 동행했던 실루아노 등과 개인적으로 접촉하며 바울 서신을 알게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는 주장이 제시된다.[23]
두 번째 근거는 3장 3-4절의 내용이다. 여기서 언급되는 "조상들"은 예수를 직접 만난 첫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이들이 이미 죽은 지 상당한 시간이 지난 것으로 서술되고 있는 점에서, 베드로가 직접 쓴 것이라고 보기 어렵고, 이후 시대의 누군가가 작성한 것으로 여겨진다.[62][63][9] 이에 대해 복음주의 진영에서는, 이 "조상들"은 구약성경에서 언급되는 족장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며, 이는 베드로의 진필성을 부정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고 반박한다.[64] 베드로의 진필성을 인정하지 않는 학자들 중에서도 이 "조상들"을 "족장"으로 해석하는 입장을 취하는 이들도 있다.[65]
세 번째 근거는 시제 사용이다. 베드로 후서는 베드로가 살아있던 시기 이후에 등장할 거짓 교사들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이러한 비판은 처음에는 미래형으로 서술되지만, 점차 현재형으로 바뀌고, 마지막에는 완료형으로 서술된다. 이는 저자가 거짓 교사들과 이미 직면해 있으며, 동시대인으로서 그들의 불완전한 위선을 비판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66][67][68] 이에 대해 진정한 서신으로 보는 입장에서는, 일부 미래형 표현은 예수가 예언한 내용을 회상하는 방식으로 쓰인 것이라는 반론이 제기된다.[69]
정확한 작성 시기는 불명확하지만, 자유주의 성서학자들은 대체로 2세기 전반에서[70][71] 중반경에[72][73] 작성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신약성경에 포함된 책들 중 가장 늦게 작성된 책으로 평가되기도 한다.[74][72][75][76]
또한, 2세기에는 『베드로 묵시록』, 『베드로의 설교』, 『베드로 복음서』, 『베드로 행전』 등 베드로의 이름을 차용한 외경들이 다수 집필되었다. 이에 따라 베드로 후서 또한 본래 이러한 외경과 동일한 그룹에 속하는 문서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77][12] 반면, 이를 진정한 서신으로 보는 경우 베드로의 명성이 높았던 만큼 그의 이름을 딴 외경이 많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이것만으로 베드로 후서를 동일한 범주로 볼 수는 없다고 반박했다.[78]
이 서신의 내용과 문체는 베드로전서와 매우 다르다. 이 서신의 저자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와 마찬가지로 문학적 관습에 익숙하며, 바울로 서신이나 마가복음보다 더 고급스러운 코이네 그리스어로 작성되었다.[79] 특히 아시아적 수사학(Asianism)으로 불리는 아시아 지역 특유의 수사 기법인 고르기아스풍(Gorgianic figures)을 사용하고 있으며,[80][81] 이러한 문체는 이그나티우스의 것과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낸 서신과 유사하다.[82] 이러한 점에서 일부 학자들은 베드로전서와 마찬가지로 이 서신도 아시아 소아시아 지역의 이방인 기독교인들을 대상으로 쓰인 것으로 본다.[83][84][85]
이 서신은 구약성경을 11번 인용하고 있다. 특히 3:15-16에서는 바울의 서신을 언급하며, 일부 학자들은 3:10a를 데살로니가전서 5:2, 3:14를 데살로니가전서 5:23과 연결 짓는다.[a]
저자는 복음서 전통과 연결되어 있으며, 주로 예수의 변모사건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면, 1:4는 마가복음 9:1, 1:11은 마가복음 9:1, 1:16, 18은 마가복음 9:2-10, 1:17은 마태복음 17:5, 1:19는 마가복음 9:4와 연관된다.[87] 또한 재림에 대한 약속은 3:10b에서 마가복음 13:31 또는 누가복음 21:33과 연결된다.[88]
유다서와 많은 구절을 공유한다. 다음은 두 서신 간의 유사한 구절이다.[89]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유다서가 더 짧고, 다양한 문체적 특징으로 인해 이 서신이 유다서의 내용을 참고했을 것으로 본다.[89][90] 2:4에서는 타락한 천사들이 감금되어 있는 장소로 타르타로스가 언급된다. 이는 유다서 6절에서도 확장되어 다루어진다. 유다서 6절은 분명히 에녹서를 참조하고 있으며, 리처드 보컴은 2:4가 유다서 6절에 부분적으로 의존하고 있으나, 동시에 시락서 16:7-10, 다마스커스 문서 2:17–3:12, 마카베오기 제3서 2:4–7, 납달리의 유언 3:4–5, 미슈나 산헤드린 10:3 등에서 발견되는 권고적 전통(paraenetic tradition)을 독자적으로 활용했다고 설명한다.[91]
예수의 죽음과 부활 후에 교회 안에서 거짓 선생들이 나타났다. 초대교회에서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도 재림이 일어나지 않자, 일부는 재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태도는 결국 하느님의 모든 약속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거짓선생들의 가르침은 진리가 아니고, 거짓선생들의 삶은 부도덕한 것이 특징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이다. 또한, 거짓선생들의 유혹을 뿌리치고 그리스도 안에 거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베드로는 거짓 가르침에 속지 말라고 하고있다. 언제나 거짓선생들이 나타나서 하느님으로부터 벗어나게 함으로, 주님의 가르침을 기억해서 거짓된 가르침을 물리치라고 교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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