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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고좌(百高座), 백고좌법회(百高座法會) 또는 인왕백고좌도장(仁王百高座道場)은 신라 때의 국가적인 불교 행사의 하나이다.[1]
《인왕반야바라밀경》에 근거하여 국토를 진호하기 위해서 열었던 대법회로 여기서는 백불상(百佛像), 백보살상(百菩薩像) 및 4부(四部) 7중(七衆)을 모시고 《인왕경》을 강독하였다고 한다.[1]
이 행사는 진흥왕 12년에 혜량(惠亮)이 시작한 후로 신라 말기까지 계속되어 불력에 의한 국가 진호(鎭護)를 기원하였다.[1]
백고좌법회는 구마라습이 번역한 《불설인왕반야바라밀경(佛說仁王般若波羅密經)》 2권을 소의경전으로 하여 내란과 외우를 방어 · 제거하고 국가를 안태하게 하기 위하여 호국적 불교 신앙에 의한 100의 불상과 100의 보살상, 100의 사자좌(師子座)를 마련하고 100명의 법사를 초청하여 《인왕반야경》을 강독하는 도장의식이다.[2]
특히, 신라 승려들의 《인왕반야바라밀경》에 대한 연구는 대단하여 원측(圓測)의 《인왕반야경소》 6권, 태현(太賢)의 《인왕반야고적기(古迹記)》 1권, 현범(玄梵)의 《인왕반야경소》 2권, 예원(禮元)의 《인왕경주(注)》 4권이 있다.[2]
백고좌법회는 그 명칭이 다양하였다.[2] 인왕도장 · 인왕경도장 · 인왕백좌도장 · 백고좌인왕도장 · 백고좌회 · 백고좌도장 · 백좌인왕회 · 백좌인왕경도장 · 백좌인왕도장 · 백좌회 · 백좌도장 · 백좌법석 등으로 불렸다.[2]
한국에서 처음으로 백고좌법회가 개설되기는 신라 진흥왕 12년(511)이다.[2]
진흥왕 12년에 고구려 승 혜량(惠亮)이 귀화하였다.[2] 왕은 귀화승 혜량에게 승통(僧統)이란 신라 승관제도에 있어서 최고의 직위를 내렸다.[2] 그해 혜량은 처음으로 백고좌법회와 팔관회(八關會)를 개설하였다.[2]
신라에서 개설된 백고좌법회는, 그것이 정기적으로 혹은 연차적으로 열렸는지, 아니면 부정기적으로 개설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도합 10회에 걸쳐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2]
613년 7월에 수나라 사신 왕세의(王世儀)가 왔을 때 황룡사에 백고좌를 개설하고, 원광(圓光)법사 등을 초치하여 경설하였으며, 636년 3월 와병중인 선덕여왕의 치유를 위하여 황룡사에 백고좌를 시설하여 승(僧) 100명을 득도케 하였고, 877년에도 헌강왕이 백고좌법회를 마련하였다고 하니 부정기법회의 인상을 준다.[2]
이와 같은 법회는 신라 민중과 내면적인 관계를 맺은 것이 아니라 왕이나 귀족들을 위한 강설법회 형식을 띤 것이었으며, 국가 안위를 위한 일종의 호국(護國)의식 행사에 지나지 않았다.[2] 또한 구마라습 번역의 《불설인왕반야바라밀경》이 소의 경전이었으므로 고려 불교에 상당히 가미되었던 밀교적인 성격이 배제된 것이 신라 백고좌법회의 특징이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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