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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축구인 (1944-2008)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박수일(한국 한자: 朴秀一, 1944년 4월 25일 ~ 2008년 1월 10일)은 대한민국의 전 축구 선수이자 축구 감독이며, 포지션은 공격수였다. 선수 시절 과감한 돌파력 및 결정적 기회를 창출하기 위한 끊임없는 기동력에 강점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1][2][3][4] 또한 숭실대학교 감독 재임 시절 최진철 등 여러 스타 선수들을 지도했으며, 특히 공격수였던 최진철을 수비수로 포지션 변경시킨 것으로 유명하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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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정보 | ||||||
로마자 표기 | Park Soo-il | |||||
출생일 | 1944년 4월 25일 | |||||
출생지 | 일제강점기 경기도 | |||||
사망일 | 2008년 1월 10일 | (63세)|||||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 |||||
키 | 166cm | |||||
포지션 | 감독 (과거 공격수) | |||||
청소년 구단 기록 | ||||||
??? | 한양공업고등학교 | |||||
대학팀 기록 | ||||||
연도 | 팀 | 출전 | (득점) | |||
??? | 국민대학교 | |||||
구단 기록* | ||||||
연도 | 구단 | 출전 | (득점) | |||
1964-1966 1967-1969 1969-1972 1973-1977 |
금성방직 축구단 해병대 축구단 외환은행 축구단 포항제철 축구단 | |||||
국가대표팀 기록‡ | ||||||
1964 1965-1971 |
대한민국 U-20 대한민국 |
21 (3) | ||||
지도자 기록 | ||||||
1978-1980 1981-1985 1986-1991 1988 1992 2000-2002 2003-2008 |
포항제철 축구단 (트레이너) 포항제철 축구단 (코치) 숭실대학교 대한민국 B 한국대학축구연맹 (이사) 한국초교축구연맹 (부회장) 포항 스틸러스 (스카우트) 대한축구협회 (이사) | |||||
* 구단의 출전횟수와 득점기록은 정규 리그의 공식 리그 경기 기록만 집계함. 또한 출전횟수와 득점기록은 2003년 1월 1일 기준임. ‡ 국가대표팀의 출전횟수와 득점기록은 2003년 1월 1일 기준임. |
일제강점기 당시 경기도 출신으로[6] 한양공업고등학교 재학 시절 핵심 선수로 활약했으며, 1962년 아시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태국 대표팀과 한양공업고등학교의 친선경기에 출전하였다.[7][8] 이후 1964년 금성방직 축구단에 입단하였고, 1965년 전국실업축구연맹전 추계 대회에서는 육군 병참단 축구단과의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터뜨리는 등 뛰어난 활약을 펼쳐 팀의 공동 우승에 공헌하였다.[9] 그 뒤 1966년에는 '서울선발팀'의 일원으로 'JP컵 한중일 축구대회'에 참가해 중화민국의 쥐광 팀을 상대로 득점에 성공하는 등 팀의 대회 우승에 일조했으며,[10][11] 같은 해 열린 한양공업고등학교와 동북고등학교의 OB 올스타전에 출전하였다.[12]
이후 1967년 해병대 축구단에 입대했으며, 1969년 해병대에서 제대해 외환은행 축구단으로 이적하였다. 그리고 1970년 금융단축구협의회에서 조직한 금융단 축구 대표팀의 일원으로 선발되었으며,[13] 동남아시아 순회 경기에서 싱가포르의 군경합동팀, 일본의 청소년 대표팀을 상대로 득점을 올리며 좋은 모습을 보였다.[14][15] 또한 그 해 전국축구선수권대회 8강전에서 벌어진 산업은행 축구단과의 3차 연장전에서 동점골을 기록해 팀의 추첨승에 기여했으나,[16] 팀은 육군 축구단과의 4강전에서 패배해 결승 진출에 실패하였다. 그 뒤 1971년 국무총리배 금융단 축구대회에서 몇 차례 공격 포인트를 기록해 팀의 대회 우승에 일조했으나,[17][18] 전국실업축구연맹전 춘계 대회 당시 신탁은행 축구단과의 경기 도중 관중석의 관중들과 실랑이를 벌이는 비매너 행위를 한 것을 사유로 한국실업축구연맹으로부터 경고 처분을 받았다.[19][20] 이후 1972년 국무총리배 금융단 축구대회에서 몇 차례 득점을 올리는 등의 활약을 펼쳤으나 팀은 주택은행 축구단과의 4강전에서 패배해 결승 진출에 실패했으며,[21][22] 전국실업축구연맹전 추계 대회 당시 국민은행 축구단과의 경기에서 득점포를 쏘아올렸으나 팀은 결승 리그에 올라가지 못했다.[23]
그 뒤 1973년 5월 3일 포항제철 축구단이 정식으로 창단하자 원년 멤버로 합류했으며,[24] 그 해 제철소 준공 기념으로 열린 신일본제철 축구단과의 '한일 친선 실업축구대회'에서 팀의 선제골에 관여하는 등 인상적인 활약을 보였다.[25] 그리고 1974년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 당시 성균관대학교와의 결승전에서 이회택의 결승골을 어시스트하는 등 팀이 우승을 차지하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26][27] 얼마 뒤 '실업 올스타'의 일원으로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상비군과의 시범경기에 출전하였다.[28] 이후 1975년 전국실업축구연맹전 춘계 대회 당시 공군 축구단과의 경기에서 안기헌의 추가골을 어시스트하는 등 좋은 모습을 보이며 팀의 대회 우승에 일조했으며,[29] 같은 해 개최된 '한일 친선 실업축구대회'에서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추가골을 득점하였다.[30] 또한 전국실업축구연맹전 추계 대회 당시 농협 축구단과의 경기에서 김호의 결승골을 어시스트하는 등의 활약을 했으나 팀은 우승에 실패했으며,[31] 시즌 종료 이후 은퇴 계획 없이 다음 시즌을 준비하였다.[32] 그 뒤 1976년 전국실업축구연맹전 추계 대회에서 조홍은행 축구단을 상대로 최상철의 결승골을 어시스트하는 등의 활약을 펼쳤으나 팀은 서울신탁은행 축구단과의 4강전에서 패배해 결승 진출에 실패했으며,[33] 1977년 다른 노장 선수들과 함께 선수 은퇴를 선언하였다.[34]
1964년 아시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에 대한민국 U-20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참가했으며,[35] 태국과의 경기에서 득점과 동시에 패널티킥을 얻어내며 팀의 2-0 승리를 이끄는 등 좋은 활약을 펼쳤으나 대표팀은 말레이시아와의 4강전에서 패배해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36] 그리고 같은 해 국가대표 B팀으로 구성된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 선수 선발 대회에 출전해 좋은 모습을 보였으나, 최종적으로 선발되지 못했다.[37][38]
이후 1965년에는 1966년 FIFA 월드컵 예선을 앞두고 벌어진 제1차 선발전 및 제2차 선발전에서 연달아 소속팀의 우승에 기여하였고,[39][40] 이러한 활약으로 최종 명단에 포함되었으나 대한축구협회 측에서 예선 불참을 결정함에 따라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41][42] 또한 같은 해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에도 선발되었으며,[43] 8월 14일 태국과의 그룹 결정전에 출전하여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 정식으로 데뷔하였다. 그리고 1966년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 선수 후보 명단에 포함되었으나 최종적으로 선발되지 못했으며,[44] 1966년 아시안 게임 선수 선발 대회에서는 인상적인 활약을 선보여 최종 명단에 들어가게 되었다.[45] 하지만 대회 도중 선수촌에서 무단 이탈한 뒤 여자를 동반하고 복귀한 사실이 적발되어 대한축구협회로부터 2년간 선수 자격 정지의 중징계 처분을 받았고,[46] 1년여 뒤인 1967년 상벌위원회의 결정으로 징계가 해제되었다.[47]
그 뒤 1969년에는 유럽 원정 도중 부상을 당하기도 했으며,[48] 1970년 FIFA 월드컵 예선 명단에 들어간 이후 국가대표 B팀과의 평가전에서 정병탁의 선제골을 어시스트하는 등 좋은 모습을 보였다.[49][50] 그리고 일본과의 첫 번째 경기에서 추가골을 득점하는 활약을 보였으나 대표팀은 2-2 무승부를 기록했으며,[51] 얼마 뒤 열린 오스트레일리아와의 두 번째 경기에서 선제골을 기록하는 활약을 펼쳤으나 대표팀은 1-1 무승부로 경기를 마감하며 1970년 FIFA 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하였다.[52]
이후 1970년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이원화 원칙에 따라 국가대표 B팀이 신설되자 박수일은 A팀인 청룡팀에 포함되었으며,[53] 직후 펼쳐진 CR 플라멩구와의 평가전에 출전해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54] 또한 그 해 열린 올라리아 AC와의 평가전에서 팀의 선제골에 관여하는 등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고,[55] 뒤이어 치러진 B 1903과의 2차 평가전에서 선제골을 성공시키며 뛰어난 모습을 선보였다.[56] 그 뒤 같은 해 개최된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에 참가하였고,[57] 싱가포르와의 경기에서 서윤찬의 추가골을 어시스트하는 등의 활약을 하였다.[58] 하지만 인도와의 4강전을 앞두고 위경련이 발병해 치료를 받았으며,[59][60] 결국 그 여파로 4강전 및 버마와의 결승전에는 나서지 못했다. 그리고 얼마 뒤 성사된 SL 벤피카와의 평가전에도 참여했으며,[61] 그 해 이원화 원칙이 다시 폐지되어 국가대표팀이 하나로 통합됨에 따라 박수일은 국가대표팀 예비 명단에 포함되었다.[62] 이후 같은 해 개막한 1970년 아시안 게임 최종 명단에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선발되었으며,[63] 태국과의 경기에서 결승골을 득점하는 등 국가대표팀의 대회 공동 우승에 공헌하였다.[64][65]
그 뒤 1971년 국가대표팀의 중남미 전지훈련 명단에 포함되었고,[66] 아르헨티나 U-23 대표팀과의 평가전에서 만회골을 넣었다.[67] 또한 그 해 개최된 박대통령컵 쟁탈 아시아축구대회에도 참가하였고, 태국과의 경기에서 박이천의 결승골을 어시스트하는 등 좋은 모습을 보여주며 국가대표팀의 우승에 일조하였다.[68] 그리고 얼마 뒤 있었던 던디 유나이티드 FC와의 평가전에 출전해 동점골을 성공시키는 등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으나 팀의 패배를 막지 못했고,[69] 같은 해 열린 1972년 하계 올림픽 예선에도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선발되었다.[70] 하지만 발 부상으로 인해 경기에 투입되지 못했으며,[71][72] 그 여파로 직후 펼쳐진 킹스컵의 최종 명단에서 제외되었다.[73]
선수 은퇴 후인 1980년 포항제철 축구단의 트레이너 신분으로 서독에 파견되어 지도자 연수를 받았으며,[74] 1981년 포항제철의 코치로 한홍기 감독을 보좌하며 팀의 전국실업축구연맹전 추계 대회 우승을 이끌었다.[75] 이후 1982년 팀의 수석 코치 역할을 했던 조윤옥이 팀을 떠나자 그 자리를 대신했으며,[76][77] 그 해 팀의 전국실업축구연맹전 우승을 견인한 뒤 지도자 코치상을 수상하였다.[78] 그 뒤 1983년 열린 올스타전에서 아마추어팀 코치를 맡았으며,[79] 1985년에는 약 15년동안 구단에서 선수 및 코치 생활을 했던 것을 정리하고 사임하였다.[80]
이후 1986년부터 1991년까지 숭실대학교 감독을 맡았으며,[81] 1992년 한국대학축구연맹의 이사로 선임되었다.[82] 또한 1988년 대한민국 국가대표 B팀의 감독으로 임명되어 같은 해 개최된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에 참가했으나,[83][84] 팀은 3패를 기록하며 토너먼트 진출에 실패하였다.[85]
그 뒤 한국초교축구연맹 부회장을 역임했으며,[86] 2002년까지 포항 스틸러스의 스카우트로 활동하며 옐라를 영입하기도 했다.[87][88] 그리고 2003년부터 대한축구협회 이사 및 상벌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으며,[89][90] 2005년 한국고교축구연맹 회장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하였다.[91][92]
2005년 포항시에서 서울특별시로 거주지를 옮겼으며,[93] 2008년 1월 10일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94]
금성방직 축구단에서 활약하던 시절 국민대학교에 진학해 학업 활동을 병행하였다.[95]
딸인 박지아는 배우로 활동했으나 2024년 9월 30일 세상을 떠났다..[96]
1988년 전국축구선수권대회 결승전을 앞두고 진행된 40대 올스타전에 나섰으며,[97] 2006년 '한국 OB 지회 축구대회'에 참가하였다.[98] 그리고 다수의 '경평 OB 대항축구전'에 '서울 OB팀'의 일원으로 참여하기도 했다.[99][100][101][102]
2000년에 금성방직 축구단의 다른 선수들과 함께 '쌍용 OB회'의 일원으로 김용식을 추모하기 위한 사업 및 행사를 추진하였다.[103]
2003년 베스트일레븐 창간 33주년을 기념해 선정한 '한국축구 100년을 빛낸 55인' 중 '60년대 베스트11'에 포함되었다.[104]
2005년 개최된 한국중등축구연맹전 춘계 대회가 포항시에서 개최되도록 축구계 관계자들을 설득하였고, 한국중등축구연맹의 승인으로 포항시에서 치러지게 되었다.[105]
2006년 문화방송에서 2006년 FIFA 월드컵을 앞두고 방영한 영상실록 '한국 축구가 간다'에 출연하였다.[106]
2007년에 양지 축구단의 다른 선수들과 함께 국가정보원을 방문해 2007년 FIFA U-17 월드컵 참가 목적으로 서울특별시에 체류하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U-17 국가대표팀과의 만남에 대한 주선을 요청하기도 했다.[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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