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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8년에 미국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통상 조약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미일 수호 통상 조약(美日修好通商條約, 영어: Treaty of Amity and Commerce between Japan and the United States , 일본어: 日米修好通商条約)은 막말인 1858년 7월 29일에 일본과 미국 사이에 연결된 통상조약으로 에도 막부 말기의 혼란기부터 메이지 초기에 걸쳐 일본이 열강과 조인하게 된 피할 수 없었던 불평등 조약의 하나이다. 일본의 막부 측에서 이노우에 기요나오와 이와세 다카노부가 미국측의 전권은 주일 총영사 타운젠드 해리스와 가나가와현 앞 바다의 선상에서 조인했다.
페리 제독의 중재로 체결된 미일 화친 조약은 일본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강제로 확장되는 첫 단계였다. 그러나 도쿠가와 막부가 직면한 주요 문제는 즉각적인 서구 개방을 지지하는 세력과 일본 문화와 독립성을 유지하며 서구의 군사적 위협에 대처할 준비가 될 때까지 개항을 미루자는 양이파 세력 간의 국내 분열에서 비롯되었다.[3] 일본인 대부분은 제1차 아편전쟁에서 중국이 당한 굴욕적인 패배를 알고 있었지만, 일본이 언제 어떻게 개항하게 될지에 대해 의견이 엇갈렸다. 두 세력 모두 무역은 외국인이 일본으로 들어와 쇄국법을 위반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인이 해외로 나가서 주도해야 한다는 데는 동의했다. 도쿠가와 막부 관리 중 일부는 미국과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가나가와에서 맺은 미일 화친 조약에 동의했는데, 그들은 미국의 군사력이 일본을 훨씬 상회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4] 그 결과, 1858년 이후 막부는 미국의 요구와 강력한 국내 반대 세력 사이에서 진퇴양난에 빠지게 되었다.[5]
그러나 타운젠드 해리스가 제시한 조약 조건은 페리의 요구보다 훨씬 가혹했다. 해리스는 일본의 법률이 "매우 특이하다"며, 외국인이 그러한 법률 아래에서 생활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6] 조약 제3조는 미국인들에게 에도와 오사카에서 일본 정부의 간섭 없이 무역과 거주할 권리를 부여했다. 또한 조약은 미국의 통상 항구에 영사 관할권을 허용하고, 일본의 금과 은의 자유로운 수출 및 관세 협정을 포함했다. 특히 에도 항구, 즉 막부의 수도에 외국인이 진입하고 외국 정부 관리가 천황 가까이 배치된다는 점은 공개적으로 개항을 지지했던 세력에게도 위협적인 일이었다.[7] 이러한 요구는 미국이 일본에 대해 계획했던 역할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미국은 자유무역과 미국인의 유입을 허용하되 일본인의 유입은 신경쓰지 않았고, 일본의 군사력에 대한 관심도 없었다. 미국에게 일본은 단지 북아메리카와 중국을 잇는 상업적 연결 고리의 일부에 불과했다.[8]
해리스와의 교섭에 앞서, 막부는 네덜란드와의 일란추가조약을 체결하여 무역 규제 완화를 인정하였으며, 러시아와도 유사한 추가조약을 맺었다. 막부는 미국과의 교섭 역시 이를 기반으로 진행하려 했지만, 해리스의 목적은 자유무역에 있었고 일본 측에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조약 초안을 작성하여 제출하였다.[9] 해리스는 유럽 열강에 의해 일본이 필연적으로 패배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협박했는데, 이는 조약 체결에 주저하던 일본에게 강력한 압박으로 작용했다. 이 초안을 토대로 15회의 교섭이 이루어졌고, 그 결과로 조약 내용이 합의되었다.[10] 한편, 미국만의 이익이 아니라 영불 함대의 내항 가능성과 아편의 위험성에 대한 논의도 이루어졌다.[11] 그 결과, 도쿠가와 막부 내 개국파들은 미국의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조약 체결을 수용하게 되었다.[12]
해리스 조약을 마지못해 수용한 후, 일본은 러시아,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와도 유사한 조약들을 빠르게 체결하였다. 이 조약들은 "안세이 5개국 조약"으로 불리며, 1858년 애로호 사건에서 중국이 다시 한 번 유럽 원정군에 철저히 패배한 결과에 영향을 받아 체결 과정이 가속화되었다.[13] 해리스는 일본이 유럽 열강이 일본으로 항해해 와서 "불평등 조약"을 강요하기 전에 "명예로운 조약"을 체결해야 한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과 미국 간에 체결된 조약의 내용은 본질적인 점에서 중국과 서구 열강 사이에 체결된 불평등 조약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14]
1858년에 체결된 미일 수호 통상 조약은 1860년 첫 일본 사절단이 미국을 방문하면서 비준되었다. 이 과정에서 일본 사절단은 백악관에서 열린 갈라 행사에 참석해 제임스 뷰캐넌 대통령의 환대를 받았다. 이러한 미국과의 새로운 관계는 당시 일본의 대로(大老) 이이 나오스케의 암살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기도 했다.[15] 이후 이 조약은 1894년 11월 22일 체결된 조약을 통해 관세 규정이 설정되면서 1899년 7월 17일에 대체되었다.[16]
미일 수호 통상 조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17]
2017년 연구에 따르면, 일본과 서구 열강 간의 무역 장벽을 완화한 조약들은 일본 GDP를 단기간에 약 7% 증가시키는 효과를 가져온 것으로 나타났다.[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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