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보아트홀
을지로에 위치한 복합문화공간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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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보아트홀(明寶 Art Hall)은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동 마른내로 47에 위치한 복합문화공간이다. 1957년 개관한 명보극장(明寶劇場)이 있었으나 극장이 문을 닫은 후 2009년 복합문화공간으로 재단장하여 오늘에 이른다.[1]
1957년 8월 26일 1,200석 규모의 한국 영화 전문 상영관으로 개관하였다.[2] 명보극장이 세워진 을지로와 충무로 일대는 일제강점기 황금정으로 불리던 시기부터 단성사, 훗날 스카라극장이 되는 약초좌 등 영화 상영 전용 극장이 있던 영화 중심지였다.[3] 황금정 일대는 한국 전쟁 시기 주요 건물들 상당수가 파괴되었고 50년대 재건기를 거치면서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섰다.[4] 이 시기 서울에는 1천 석 이상 규모의 초대형 단일 상영관들이 들어섰고, 명보극장 역시 이러한 흐름에 따라 지어진 극장이었다.[3]
명보극장은 함흥시 출신으로 한국 전쟁 중 남쪽으로 피란을 온 이지룡이 세웠다. 이지룡은 자신의 고향에 있던 명보극장의 이름을 그대로 가져와 극장의 이름으로 삼았으나 자금 부족으로 대림산업에게 극장의 운영권을 넘기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당시 영화계에도 영향력이 컸던 깡패 이기붕, 이화룡 등의 개입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5] 이지룡은 훗날 1960년대에 스스로 아세아영화사를 세워 영화제작자가 되었다.
명보극장은 주로 한국 영화를 상영하여 한국 영화 진흥에 앞장선다는 평을 받았다.[2] 한국 영화는 오랫동안 제작 전에 검열을 받아야 하였고, 1993년 영화에 대한 사전 검열이 위헌 심판을 받기까지 검열이 계속되었다.[6] 1967년 초 명보극장에서 개봉하였던 《기적》과 같은 영화는 이러한 검열 제도에 의해 제작과 상영이 차질을 빚기도 하였다.[7] 이런 배경 속에서 명보극장은 《성춘향》, 《폭군 연산군》,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상록수》 등의 영화를 개봉하였다.[8]
1977년 배우 출신의 정치인 신영균이 명보극장을 인수하였다.[8] 이후 1993년에 옛 극장 건물을 철거하고 명보프라자를 신축하여 멀티플렉스로 운영하였다. 2001년 내부 개보수를 하면서 다시 명보극장으로 운영하였으나, 경영 악화로 2008년 폐관하였다. 2009년 현재의 복합문화공간인 명보아트홀이 문을 열었다.[2] 2010년 신영균은 명보아트홀을 신영균예술문화재단의 소유로 기증하였다.[9]
명보극장은 한국인이 설계한 최초의 영화관이다. 1957년의 명보극장의 설계는 한국 전쟁 기간 동안 프랑스에서 유학하였던 김중업이 맡았다.[3] 김중업은 와우아파트 붕괴 참사 당시 정부의 건축 시책을 비판하였다가 해외 추방되었고 박정희의 사망 이후에야 귀국할 수 있었다.[10] 1980년대까지 옛 원형을 유지하던 명보극장은 1990년대 단일상영관의 쇠퇴와 멀티플렉스의 유행으로 1993년 결국 철거되었고[3] 옛 명보극장이 철거된 자리에 명보프라자가 세워졌다.[11] 명보극장 철거 과정의 진동으로 인근 건물이 피해를 입어 시공사인 한주흥산과 삼성중공업이 손해를 배상하기도 하였다.[12]
1993년 명보프라자의 설계는 김석철이 맡았고 1994년 완공하였다.[8] 명보프라자는 1995년 한국건축가협회상 본상을 수상하였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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