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 천황(일본어: 明治天皇 메이지 텐노[*], 1852년 11월 3일 ~ 1912년 7월 30일)은 일본 제국의 제122대 천황(재위: 1867년 2월 13일 ~ 1912년 7월 30일)이다. 무쓰히토(睦仁 (むつひと))이며 유소년기의 궁호(宮號)는 사치노미야(祐宮 (さちのみや))이다. 쇄국령을 실시하는 에도 막부(도쿠가와 막부)와 에조 공화국을 2년간(1868년~1869년)의 보신 전쟁에서의 승리로 타파하고 1871년에 산발탈도령을 발표하고 1876년에 폐도령을 발표하고 정부한테 항거하는 사쓰마번1877년세이난 전쟁(현재까지의 일본 마지막 대규모 내란 전쟁)에서의 승리로 타파하고 1879년류큐국을 병합하고 1881년에 10년 후의 국회 개설을 약속했고 1889년(메이지 22년)에 이토 히로부미 등에게 명하여 일본 최초의 근대적 헌법인 ‘대일본제국 헌법’을 제정하였다. 그의 개혁 정책을 연호를 따 메이지 유신이라 부르며 일본의 근대화를 확립하고 부국강병을 달성한 군주로 평가된다. 1868년 9월 연호를 메이지(明治)로 고치고 일세일원제(一世一元制[1])를 택하였다. 이에 따라, 그의 재위 기간을 메이지 시대라고 부른다. 일본에서는 그를 높이 평가하여 메이지 대제(明治大帝), 메이지 성제(明治聖帝), 무쓰히토 대제(睦仁大帝) 등으로도 부른다. 일본에서는 그의 탄생일인 11월 3일문화의 날로 제정하여 기념하고 있다.

간략 정보 메이지 천황明治 天皇, 재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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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생애 초반

고메이 천황서자이자 제2황자로 출생하였으며 궁호는 사치노미야(祐宮)이고, 어머니는 곤다이나곤(權大納言) 나카야마 다다야스의 딸인 나카야마 요시코(中山慶子) 후궁(後宮)이다. 1852년 11월 3일 교토에서 출생, 사치노미야라는 궁호를 받았다. 유년 시절 그는 체구도 왜소하였고 병약하였으나 그를 극진히 간호한 어의 덕에 잔병치레를 떼었다. 1860년에 황태자가 되면서 무쓰히토로 개명했으며, 1866년(게이오 2년) 12월 25일에 아버지 고메이 천황이 사망하면서 16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1868년 2월 8일에 탈상하고, 같은 해 10월 6일 즉위 의식을 비롯한 여러 제사 의식을 수행한 뒤 10월 12일 교토 고쇼에서 아마테라스 대신 등에게 공개적으로 대제전을 드림과 동시에, 즉위 교서를 내외에 선언하였다. 즉위 초반 그를 추대한 일부 훈신들이 선황을 독살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으나 곧 묻혀졌다. 막부의 전횡에 의분을 느낀 일부 개화무사와 개화사상가는 즉위 초반의 그에게 친정을 청하는 상소문을 올리기도 했고, 천황의 권위를 무시한다고 판단한 그는 에도 막부(도쿠가와 막부) 세력을 제압하고 친정을 할 계획을 세운다.

즉위 초반 그의 왜소하고 병약한 체구를 조절해야 된다는 양의들의 권고에 따라 꾸준히 운동을 하고 육류를 섭식하여 체구와 체력을 단련해 나갔다.

막부 말기의 혼란

안정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던 19세기 후반의 에도 막부는 도시에서 진행된 상업 자본주의의 발전과 함께,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쇄국령에 맞서기 위해 페리 제독의 흑선 내항을 수용하는 가나가와 조약으로 개국을 펼치다가 이이 나오스케가 조정 칙허없이 실행하고 마는 안세이 5개국 조약으로의 문제에 의해 조정과 막부는 혼란에 접어들었다. 조정은 특히 존황양이를 내세운 조슈번 등의 움직임을 기반 삼아 정치적 발언권을 키워나갔고, 막부는 점차 조정의 눈치를 보게 됐다. 이 때문에 막부 안에서는 여러 세력간의 대립이 일어났고 그 기반이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고메이 천황 사망 직후) 1867년(게이오 3년) 도사번(고치현) 출신이던 사카모토 료마나카오카 신타로의 중재에 의해 사쓰마번(가고시마현)과 조슈번(야마구치현)이 도막(막부 토벌) 동맹을 맺기에 이르자 약체화된 막부의 고민은 커졌고, 결국 막부가 붕괴하기 전에 정치권력을 조정에 돌려주겠다(봉환)고 조정에 제의했다. 조정이 이 제의를 받아들이면서 약 300여 년에 걸친 에도 막부는 종언을 고했다. 이후 정권을 넘겨받은 조정에 저항하던 세력들은 1868년(게이오 4년)부터 1869년(메이지 2년)에 걸쳐 대규모 내란을 일으켰지만 사쓰마번조슈번, 도사번을 주축으로 한 조정군에 의해 토벌됐고, 새 시대가 개막했다.

메이지 시대의 개막과 일본의 근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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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례복 소쿠타이를 입은 메이지(1872년).

메이지 천황은 1868년 9월부터 일세일원(一世一元)을 결정하고, 연호를 메이지(明治)로 정했다. 이어 1869년(메이지 2년)에는 에도(江戶)를 도쿄(東京)로 고치고 도쿄로 옮겨(이어)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의 소유였던 도쿄 성(구 에도 성(江戶城))을 궁성으로 정하고, 판적봉환을 허락했다. 1871년(메이지 4년)에는 폐번치현을 단행해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해 나갔다. 다른 한편 1870년(메이지 3년)에는 신도를 국교로 정하고, 제정일치를 선포하는 조서를 발표하고 신도의 국교화와 천황의 '신격화'를 추진해 나갔다.

영국미국 등의 서구 사절단의 화려한 외모에 매료된 그는 신문물 개방의 뜻을 펼친다. 이때 막부(幕府) 세력이 독단적으로 개항을 추진하여 반막부세력(反幕府勢力)의 반발을 샀으나, 그는 부국강병의 기치하에 구미(歐美) 근대국가를 모델로 하는 관주도(官主導)의 개발, 자본력 육성과 정치력, 군사력 강화에 치중하였다.

1871년 폐번치현(廢藩置縣)을 실시하여 각 번주가 다스리던 지역을 천황이 직할하도록 바꾸었고, 1872년 서구식으로 학제를 공포하였다. 1873년(메이지 6년)쯤 사이고 다카모리를 중심으로 신 정부에 널리 퍼진 정한론을 둘러싸고, 사이고 다카모리 일파와 귀국한 이와쿠라 사절단 사이에 대립이 벌어지자 메이지 천황은 칙서를 내려 사이고의 조선 파견을 중지해 대립이 퍼지는 걸 막았다. 이에 정한론을 주장하던 사이고를 포함한 일부 인사가 사직하면서 유력 인사를 잃긴 했지만, 신 정부는 이후 국내 개혁에 힘을 기울여 근대화의 길로 나아갔다. 또한 1874년(메이지 7년)부터 이어진 자유민권운동에 맞닥뜨리자 1881년(메이지 14년)에 국회 개설의 칙유를 내려 의회 창설 시기를 명시하는 등 노력으로 운동이 격화하는 걸 막았다.

체제 정비

1882년(메이지 15년)에는 군대를 천황의 군대로 규정한 군인칙유(軍人勅諭)를 내리고, 발표하였으며 군비의 증강에 노력했다. 1884년(메이지 17년) 이후에는 머지않은 의회 창설에 대비해 입헌군주국가로 나아가는 발판을 마련했다. 내각제도, 시정촌(市町村)제, 부현제, 군제 등의 제정과 함께 전국에 걸친 관료지배체제를 정비하고 막대한 황실 재산도 마련했다. 1885년에는 내각제를 채택하였다.

1889년(메이지 22년)에는 이토 히로부미 등에게 명하여 흠정헌법의 성격을 가진 대일본제국 헌법을 마련해 입헌군주국으로 한걸음을 더 내디뎠다. 황족의 예를 서술한 《황실전범》(皇室典範)을 서술, 편찬하였으며 1890년(메이지 23년) 교육칙어를 내려 천황제 국가를 지탱하는 신민의 배양을 도모했다. '제국헌법'에서 그는 왕의 국가통치의 정치적 대권과 일본 제국육군·해군 군 통수권을 명기하였고, 교육칙어에서는 천황이 국민도덕의 중심임을 밝힘으로써 천황제국가를 유지하는 2대 이념으로 확립시켰다.

그해 일본 제국 귀족원 의원을 개설하고, 귀족원 의원의 대표를 선출하게 했다. 최초의 의회인 귀족원의 초대 의장은 이토 히로부미였다. 그는 귀족원 의회에 참석하여 수시로 의회 내용을 참관하였다.

전쟁 승리와 황권 확립

메이지 천황은 대본영에서 동학 농민 운동, 청일 전쟁(일본이 처음으로 맞닥뜨린 근대 전쟁)과 러일 전쟁에 대한 직접 전쟁을 살폈다. 또한 외교적으로는 영일 동맹을 체결하고, 군사적·경제적인 성장을 도모하였다. 러일 전쟁 이후 1905년 대한제국을사 조약을 체결하여 사실상의 속국으로 전락시켰고 1910년(메이지 43년) 8월 대한제국을 병합하였고, 만주로 진출하는 등 일본을 제국주의적 식민국가로 팽창시키는 정책을 채용했다[2]. 1911년(메이지 44년) 개항 이래의 목표였던 불평등조약 개정으로 명실공히 열강의 하나로 성장해 나갔다. 동학 농민 운동(우금치 전투를 끝으로 일본 제국·조선 연합군의 승리),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의 연이은 일본군의 승리는 천황에 대한 국민적 숭앙(崇仰)과 존경심을 더욱 절대적인 것으로 공고히 하였다.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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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경 그려진 노년기의 초상화

메이지 천황은 1912년(메이지 45년) 7월 30일에 지병이던 당뇨병의 악화로 향년 59세로 사망하였다. 공식적으로는 7월 30일 오전 0시 43분이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2시간 3분 전인 7월 29일 오후 10시 40분 경에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는 후임 천황의 즉위식을 전임 천황이 세상을 떠난 날에 올리는 관습을 고려했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같은 해(다이쇼 원년) 9월 13일, 도쿄 아오야마의 제국육군연병장(현재의 메이지 신궁 외원)에서 대상례를 올렸다. 대상 이후 메이지 천황의 관은 영구 열차로 옮겨져, 도카이도 본선을 경유하여 교토시 남쪽의 후시미모모야마 능으로 옮겨져 9월 14일에 묻혔다. 전통적인 일본 시가(詩歌) 양식으로 쓴 10만 여 수의 시조를 남겼다.

성격과 영향

  • 메이지 천황은 근대 격변기의 천황으로, 에도 막부(도쿠가와 막부)의 조슈 정벌을 막아내기 위한 천황제의 확립과 일본의 근대화에 큰 영향을 줬다. 젊은 나이에 즉위한 뒤 대정봉환왕정복고, 보신 전쟁, 메이지 유신, 세이난 전쟁, 동학 농민 운동, 청일 전쟁, 러일 전쟁 등 격동의 에도 시대 말기부터 메이지 시대에 걸쳐 정부의 최고 권력자로 있으면서 국민의 외경을 받았다.
  • 승마와카를 즐겼다.
  • 청년 시절에는 한학자 모토다 나가자네사사키 다카유키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서양 문물에 회의적인 뜻을 표했다. 특히 교육에서는 유학을 기본으로 해야 한다는 모토다의 가장 큰 지지자였으며, 교육 행정을 서양 교육론자가 지도하는 데 대해 불쾌감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1884년(메이지 17년)에 모리 아리노리문부성의 고문에 임명되는 것을 알고는 병을 핑계로 정부 고관과 면회를 일체 거절하고, 2개월 가까이 공무를 방치하면서까지 승인을 미루기도 했다. 이러한 사태를 우려한 이토 히로부미 초대 내각총리대신궁내대신을 겸임하면서 천황의 의향을 내각에 전달하는 등 천황의 내각 불신을 해소하려고 했고, 이토가 목표로 한 입헌군주국 건설을 이해시키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 1886년 메이지 천황도 황후 이하의 부인이 궁중에서 양장 차림을 하는 것을 허가하는 등 서양 문물에 대한 반감이 약간이나마 감소하게 됐다.
  • 메이지 천황은 메이지 시대의 일본 자체로 여겨졌고, 메이지 천황의 죽음은 메이지 일본의 종언으로 인식됐다. 이런 영향으로 대상례를 전후해 육군 대장 노기 마레스케 부처를 비롯한 많은 사람이 자결(천황의 명령이라 하면서 죽음을 맞이)하는 일도 많이 있었다.

평가

메이지 유신을 통해 부국강병을 달성한 메이지 천황은 일본 내에서 완벽하고 위대한 군주상으로 추대받고 있으며, 강력한 황권을 통해 일본 제국으로 성장시키고 강대국의 열강에 편입시켜 정치 책임이 없는 다른 나라를 견제하며 강제 영토 점령으로 점거하는 등 기초·기반을 다져 놓은 천황으로 평가된다.

가족 관계

메이지 천황의 아버지는 고메이 천황(孝明天皇)이며, 어머니는 후궁 나카야마 요시코(中山慶子)이다.

1867년 이치조 하루코(一条勝子)와 결혼했지만 아이를 갖지 못했다. 그러나 후궁 야나기와라 나루코(柳原愛子)가 요시히토(嘉仁, 다이쇼 천황) 황자를 낳았고, 후궁 소노 사치코마사코후사코, 노부코, 도시코 등 2남 6녀를 낳았으며, 그 밖에 요절한 황자녀를 포함하여 총 5남 10녀를 두었다.

그의 4명의 손자들은 모두 그의 서자이자 넷째아들인 다이쇼 천황(大正天皇)이 낳은 아들들이다. 장손은 미치노미야 히로히토 친왕(裕仁, 쇼와 천황), 작은 손자는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秩父宮雍仁), 셋째 손자는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 친왕(高松宮宣仁), 막내손자는 그가 사망한 후인 1915년에 출생한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三笠宮崇仁)이다.

각주

참고 문헌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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