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타 제국
18세기 인도 아대륙의 상당 부분을 다스렸던 국가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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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타 제국(마라티어: मराठा साम्राज्य 마라타 삼라저) 또는 마라타 연맹은 18세기 인도 아대륙의 상당 부분을 다스렸던 국가이다. 1674년에 시바지 보살레가 차트라파티, 즉 황제로 즉위하며 공식적으로 건국되었으며, 1818년에 페슈와(대재상) 바지라오 2세가 영국 동인도 회사 군대에게 패배하며 멸망하고 말았다. 마라타 제국을 세운 마라타인들은 인도에서 무굴 제국의 통치를 끝내는 데에 큰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1][2]
마라타 제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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मराठा साम्राज्य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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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어 | हर हर महादेव (주 시바를 찬양하라) | |||
수도 | 라이가드 | |||
정치 | ||||
정치체제 | 군주제 | |||
차트라파티(황제) 1674년 ~ 1680년 1808년 ~ 1818년 | 시바지(초대) 프라탑 싱(말대) | |||
페슈와(총리) 1674년 ~ 1683년 1795년 ~ 1818년 | 모로판트(초대) 바지라오 2세(말대) | |||
입법부 | 아슈타 프라단 | |||
역사 | ||||
• 건국 | 1674년 | |||
• 멸망 | 1818년 | |||
지리 | ||||
위치 | 마하라슈트라 | |||
면적 | 2,800,000 km2 | |||
인문 | ||||
공용어 | 마라타어, 산스크리트어 | |||
데모님 | 마라타인 | |||
인구 | ||||
1700년 어림 | 150,000,000명 | |||
경제 | ||||
통화 | 루피 파이사 모호르 시브라이 혼 | |||
종교 | ||||
종교 | 힌두교 | |||
기타 | ||||
현재 국가 | 인도 |
마라타인들은 현재의 마하라슈트라 지방의 서부 데칸 고원에서 발원한 전사 부족들로, 17세기에 '인도에서 외세를 몰아내자'라는 뜻의 '힌다비 스와라지야(Hindavi Swarajya)'를 주장하며 크게 세력을 불렸다.[3] 마라타인들은 탁월한 지도자 시바지 보살레의 영도 하에 비자푸르 술탄국에 반란을 일으키며 급성장하였으며, 시바지 보살레는 라이가드를 수도로 삼아 왕국의 기틀을 다졌다. 시바지 보살레의 아버지였던 사하지 보살레는 일찍이 탄자부르를 점령하였는데, 이 영토는 시바지 보살레의 형제였던 에코지 본슬레가 상속받아 이 곳에 탄자바르 마라타 왕국을 세웠다. 마라타인들은 그들의 강점이었던 기동성을 잘 활용하여 이후 무굴 제국과의 전쟁에서 우세를 점했고, 결국에는 인도 아대륙 대부분을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이다.
1707년에 무굴 제국의 아우랑제브 황제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시바지 보살레의 손자인 샤후 보살레 1세가 무굴 제국에게서 풀려나 마라타로 돌아왔고,[4] 그의 이모였던 타라바이 보살레와의 권력 투쟁 끝에 마라타의 권력을 틀어쥐었다. 이 때 샤후 보살레는 발라즈 비슈와나트와 다나즈 자드하브의 도움을 받았는데, 이후 그들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하여 발라즈 비슈와나트와 그의 후손들은 페슈와, 즉 왕국의 대재상으로 임명하여 대대손손 이어갈 수 있도록 하였다. 이후 발라즈와 그의 후손들은 마라타 제국의 확장에 크나큰 역할을 하게 된다. 마라타 제국의 최전성기에는 남쪽으로는 타밀나두, 북쪽으로는 파키스탄에까지 이르렀다. 마라타인들은 이 때에 델리에 잔존하던 무굴 제국의 황실을 없애 버리고 그 자리에 페슈와들을 임명하는 방안을 고려하였을 정도였다.[5] 1761년에는 마라타 제국의 군대가 제 3차 파니파트 전투에서 아프가니스탄의 두라니 제국에게 패배하자 마라타 제국의 동부 확장은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 파니파트 전투 약 10년 후, 페슈와 마다브라오 1세가 대대적인 개혁 정책을 폈고, 마라타 제국은 북인도 지방에 대한 영유권을 다시 확립하였다.
마라타 제국은 광대한 영토를 다스리기 위하여 지방의 기사들에게 반쯤 자율성을 부여하였고, 이들을 모아 연맹을 만들었다. 1775년에 영국 동인도 회사는 페슈와 계승 다툼에 간섭하였고, 이로 인하여 제1차 영국-마라타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마라타 제국은 이 전쟁에서 승리하였다.[6] 마라타 제국은 1805년과 1818년 사이에 일어난 2차와 3차 전쟁에서는 영국에게 패배하였고, 결국 이로 인하여 대영제국이 인도 아대륙 대부분을 점거하게 되었다.
마라타 제국의 영토 상당수는 해안에 접하고 있었기에, 마라타 제국은 막강한 해군을 육성하여 이를 보호하려 하였다. 마라타 해군은 무역을 하는 상선들을 보호하였으며, 외국의 군함들과 상선, 그들 중에서도 특히 영국과 포르투갈의 배들이 오직 허가받은 항구에만 입항하여 있도록 하는 데에 성공적이었다.[7] 마라타 제국은 해안에 강력한 요새들을 세워 항시 감시하였으며, 강력한 군대를 주둔시켜 국경을 보호하였다.
마라타 제국은 대개 마라타 연맹이라고도 불린다. 저명한 역사학자 바바라 라무삭이 말하기를, '마라타 제국'이라는 이름은 주로 힌두 민족주의자들에 의하여 사용되며, '마라타 연맹'은 주로 영국인 역사학자들에 의하여 사용된다고 한다. 다만 그녀는 두 단어가 모두 부정확하다고 말하는데,[8] 이는 '제국'이라는 단어는 지나치게 중앙집권화된 체제를 의미하고 '연맹'이라는 단어는 느슨하게 묶여 있는 주권국들을 의미하는데, 둘다 마라타 제국의 정치 체제를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현재 '마라타'라는 단어는 특히 특정한 전사와 연맹 계급을 뜻하는 데에 사용되지만, 과거에는 모든 마라타인들을 의미하는 단어였다.[9]
마라타인들은 서부 데칸 고원에서 살아가는 민족들이었다. 17세기 중반 무굴 제국에 열렬한 무슬림 황제 아우랑제브가 즉위함에 따라, 인도를 엄격한 이슬람법 지배체제 아래에 두고 비이슬람교도들을 법으로 혹독하게 다스리게 된다. 이에 힌두교도들이 다수인 마라타족은 무굴 제국에 반기를 들기 시작한다. 마라타인들은 '힌다비 스와라자야', 즉 힌두인들에 의하여 지배되는 인도를 주장하며 세를 불려나갔다. 이후 귀족 출신 시바지 보살레가 마라타의 지도자로 떠올랐고, 라이가드를 수도로 하여 마라타 제국을 세웠다. 1674년에는 차트라파티, 즉 황제로도 즉위하였다.
당시 마라타 제국은 인도 대륙의 4.1% 정도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곧 빠르게 확장하여 그가 죽을 즈음에는 300여 개의 요새, 40,000여 명의 기병, 50,000여 명의 보병들을 거느린 상당한 크기의 왕국이 되었다. 이때 무굴 제국은 라지푸트족들과도 분쟁이 있었는데 이와 함께 마라타의 반기로 남북 양면의 협공을 받게 된다. 다만 아우랑제브의 치세 전반기는 주로 북쪽 지역에 관심을 두었기에, 남쪽 데칸 지역의 업무는 총독을 두어 처리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러는 사이 마하라슈트라 지역의 마라타인들이 시바지 보살레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게 되고 점차 독립적인 성향을 띠게 되며 데칸의 정치적 상황은 갈수록 복잡하게 되었다.
황제 아우랑제브는 처음에 마라타인들의 세력에 대해서 그렇게 심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시바지 보살레가 점차 세력을 확대해 나가자 군대를 보내 제압하려 했지만, 도리어 패배하고 마라타 세력은 오히려 이전보다 강성해졌다. 시바지는 1663년 푸나 지역 근처를 점령했고 1664년 무굴 제국의 중요한 항구도시 수라트를 차지하며 점차 힘을 키워나갔다.
시바지 보살레에게는 삼바지 보살레와 라자람 보살레, 이 두 명의 후계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서로 이복형제였으며, 그들 중 더 나이가 많은 삼바지 보살레가 더 국민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1681년에 시바지 보슬레가 사망한 후에 삼바지 보살레 1세가 제위에 올랐고, 확장 정책을 펴나가기 시작하였다. 삼바지 보살레는 와디야르 왕조와 포르투갈 군대를 무찔렀으며, 아우랑제브 황제에게 반란을 일으킨 황제의 아들 악바르와 동맹을 맺었다. 아우랑제브는 이 동맹을 깨고 아들을 무릎꿀리기 위하여 1681년에 50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남진하였고, 비자푸르 술탄국 등을 정복하며 제국의 영토를 확장하고자 하였다. 이후 삼바지 보살레는 8년 동안이나 아우랑제브의 무굴 군대와 맞서싸웠는데, 탁월한 용병술로 인하여 단 한번도 지지 않았다고 전한다.
1689년 초, 삼바지 보살레는 군사 회의를 열어 무굴 군대를 어떻게 부술 지에 대하여 논의하고자 하였다. 허나 무굴 제국의 군대가 이 계획을 사전에 탐지하고 회의장을 급습, 몇 명의 호위군만 데리고 있던 삼바지 보살레를 생포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결국 1689년 2월 1일에 삼바지 보살레와 그의 조언자인 카비 칼라시가 생포되었으며, 반역죄로 1689년 3월 21일에 무굴 제국에 의하여 처형당했다.
삼바지 보살레가 죽은 이후, 그의 이복형제였던 라자람 보살레가 왕위를 승계하였다. 허나 그가 왕위에 오른 직후에도 무굴 제국은 여세를 몰아 수도인 라이가드를 맹공하였고, 라자람 보살레는 결국 피난을 가야만 하였다. 이후 마라타 군대는 대대적인 반격을 시작하였고, 빼앗긴 요새들을 무굴 제국군대의 손아귀에서 다시 탈환하였다. 1697년에는 아우랑제브 황제에게 화친을 요청하기도 하였으나, 황제의 강경자세 때문에 거절당했다. 라자람은 1700년에 신하가드에서 사망하였으며, 그의 사후에 그의 아내였던 타라바이가 아들인 시바지 2세의 이름을 빌어 대신 통치하였다. 타라바이는 남편의 적대 정책을 이어 받았으며, 나중에는 나르마다 강을 건너 무굴 제국의 영토로 진입하기도 하였다.
1707년에 아우랑제브 황제가 서거한 이후, 삼바지 보살레의 아들이었던 샤후 보살레 1세가 새롭게 무굴의 황위에 오른 바하두르 샤 1세로부터 풀려나는 데에 성공했다. 다만 샤후 보살레 1세가 고향으로 돌아가 무굴 제국에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막기 위하여 그의 모친은 여전히 잡아두었다. 한편 샤후 보살레 1세는 풀려난 직후 고국으로 귀환하여 황위를 요구하였고, 타라바이와 시바지 2세에게 도전하였다. 이후 내전이 발발하였는데, 이 내전에서 샤후는 명신인 발라즈 비슈와나트를 재상격 관직이었던 '페슈와'에 임명하였다. 이후 발라즈는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무굴 제국에게서 샤후가 유일한 마라타 제국의 황제라는 인정을 받아내었고, 나중에는 무굴 제국에 포로로 잡혀있었던 샤후의 어머니 예수바이도 돌아오게 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이후 샤후 보살레 1세는 타라바이와 그 아들을 물리치고 유일한 왕으로 옹립되었다. 그의 치세기에 라그호지 본살레 장군이 국경을 동쪽으로 크게 확장하였으며 현재의 벵갈 지역까지 이르렀다. 또한 나중에는 힘을 키워 국경을 구자라트 지방까지 넓히기도 하였다.
"페슈와"라는 단어는 페르시아어 "پیشوا(pēshwā 페슈워, '지도자, 통솔자')"에서 유래하였다. 1674년 시바지 1세가 차트라파티가 된 후 공적이 많은 장군 모로판트 트림바크 핑갈레에게 이 칭호를 내린 것이 페슈와직의 시초이다. 원래는 세습이 가능한 비세습직이었으나, 바트 가문의 발라지 비슈와나트 이후 바트 가문이 세습하게 되었다. 나중에는 이들의 권한이 워낙 강력해져 제국의 사실상 지배자가 되었으며, 1772년까지 군권을 장악하고 국정을 좌지우지하였다. 이들의 통치기에 마라타 제국은 워낙 번성하여 인도 아대륙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통치하였다.
샤후 보살레 1세는 그의 즉위에 공로가 컸던 발라지 비슈와나트에게 1713년에 페슈와직을 내렸다. 이 시기부터 페슈와는 황제 다음가는 최고위직이 된 것이다. 발라지 비슈와나트의 가장 큰 업적들 중 하나는 1714년에 당시 서부 해안에서 가장 강력한 해군력을 보유하고 있던 해적 칸호지 앙그리아와 로나발라 협약을 맺어 안정을 도모한 것이다. 나중에 칸호지 앙그리아는 샤후 1세를 황제로 인정하기도 하였다. 1719년에는 무굴 제국의 수도인 델리로 진군하여 황제를 쫓아내고 꼭두각시를 세워 자신들의 마음대로 하기도 하였다. 무굴 제국은 이 시점을 기준으로 하여 과거의 영광을 잃어버리고 마라타 제국의 봉신국 비슷하게 전락하게 된다.
1720년 4월에 발라지 비슈와나트가 죽은 이후, 샤후 1세는 그의 뒤를 이어 바지라오 1세를 새로운 페슈와로 세웠다. 그는 마라타 제국의 영토를 현대 인도의 3%에서 30%로 늘리는 등 엄청난 군사적 공로를 세우며 제국의 세를 크게 늘렸다. 그는 1740년 4월에 죽을 때까지 41번이 넘는 전투를 치렀으며, 그 전투들 가운데에서 단 한번도 패배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였다. 1728년 2월 28일에는 팔케드 전투가 일어났다. 이 전투에서 바지라오 1세는 아사프 자흐 1세를 꺾었으며, 하이데바라드의 니잠을 무릎꿇리는 데에 성공하였다. 1737년에는 델리 전투를 벌여 무굴의 수도인 델리 인근을 약탈하였는데, 무굴 제국의 봉신들이 제국을 구하기 위하여 군대를 이끌고 출정하였으나 보팔 전투에서 결국 패배하였다. 마라타 제국은 이후 무굴 제국에게 막대한 양의 조공을 요구하였으며,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여 말와 지역을 할양받았다. 바지라오 1세의 시대에는 뭄바이 북쪽 50km 부근에 있는 해안 마을 바사이에서 포르투갈 지배자들과 전쟁을 벌여 승리하기도 하였다. 이 전투는 바지라오 1세의 형이 직접 이끌었으며, 바지라오 1세 시대의 주요 군사적 업적이기도 하다.
바지라오 1세가 죽은 이후에는 그의 아들인 발라즈 바지라오가 다른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황제의 승인을 얻어 페슈와가 되었다. 이후 발라즈 바지라오도 그의 아버지의 전철을 밟아 수많은 군사 원정을 벌였으며, 사람들을 무참히 학살하며 국력을 신장하였다.마라타는 본슬레 가문의 라구지 본슬레의 지휘 하에 남부와 동부로 세력 확장을 계속하는데, 라구지 본슬레는 1741년의 티루치라팔리 전투에서 일단 카르나타카 나와브를 제압한 다음, 1741 ~ 1751년간 벵골 나와브의 영토를 6차례에 걸쳐 침공하여 오디샤를 점령, 합병하고 벵골을 봉신국으로 만든다. 이 때 마라타 제국은 벵골을 무자비하게 통치하며 한때 풍요로웠던 벵골 지역을 완전히 망쳐놓는데, 사람들에게 돈을 바치게 한 다음 내지 못하거나 미납한 자가 있으면 죽여버리는 등 포악한 공포정치를 펼쳤던 것이다. 네덜란드의 기록에 의하면 최소한 40만 명의 벵골인들이 이 때 마라타에 의하여 학살되었다고 전한다. 이 때문에 벵골 현지에서는 마라타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했으며, 토착 지도자들인 나바브들에 대한 지지가 갈수록 높아졌다.
발라즈 바지라오는 농업을 장려하였으며, 국가의 안정화를 추진하여 마라타 제국의 내치를 잘 다스렸다. 이제 마라타 제국과 무굴 제국의 권력관계는 완전히 역전되어, 1752년에는 마라타가 아프샤르 왕조의 후신인 두라니 왕조에 위협받는 무굴과 무굴의 수도 델리를 보호해준다는 조약을 맺기에 이른다. 그런데 1757년 초 두라니의 아흐마드 샤 두라니가 북인도를 침공하고 델리를 점령한 후, 델리 침공 과정에서 무굴을 배신하고 두라니에 붙은 로힐라족의 장군이자 웃드의 나바브(웃드 지역의 통치자를 의미)를 델리의 통치자로 남겨두고 물러가는 사건이 발생한다. 마라타는 마침 1757년 초부터 전투를 벌이는 등 두라니와 적대 관계에 있었고, 이에 대응하여 동년 웃드의 나바브 공격해 물리치고 마침내 델리 및 근교를 점령하게 된다. 이를 기점으로 1750년대 후반 마라타가 두라니 지배하의 인도 북서부 펀자브와 카슈미르를 공격해 점령한다. 바야흐로 마라타가 인도 아대륙의 절반가량을 지배하기에 이른 것으로, 그 옛적의 사타바하나 왕조 및 라슈트라쿠타 왕조에 필적하는 데칸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왕조로 떠올랐던 것이다. 이후 마라타 제국은 인도 북서부에 대한 군사적 원정을 시작하였고, 1758년의 아톡 전투에서 승리하고 그해 5월 8일에는 페샤와르 전투에서 승리하며 페샤와르를 손에 넣는 데에 성공했다. 제3차 파니파트 전투가 일어나기 바로 직전인 1759년, 마라타 제국군은 무굴 제국의 수도 델리에 있는 붉은 요새를 약탈하기도 하였다.
1759년, 바지라오 1세의 조카인 사다시브라우 바우는 아프가니스탄의 두라니 왕조가 다시 군대를 이끌고 인도 북부로 다시 침입하였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사다시브라우 바우 지휘 하의 마라타 제국은 즉시 대항군을 편성하였고, 10만 명에 달하는 대군을 데리고 진군하여 1760년 8월에 다시 델리를 되찾았다. 이 때 이미 델리는 수많은 전쟁을 거치며 거의 잿더미로 변해버린 상태였는데, 마라타 군대는 부족한 보급품을 채우기 위하여 이미 쇠락한 델리를 또다시 약탈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델리를 수복한 마라타 군의 사령관 사다시브라우 바우는 아예 이번 기회에 무굴 제국의 황계를 자신의 조카이자 페슈와의 아들이었던 비스와스라오로 대체할 생각도 하였다. 1760년에는 하이데라바드의 군대를 데칸에서 무찌르며, 마라타 제국의 권세는 그 하늘을 찌르며 최고조에 다다랐다.
그러나 마라타의 기세는 전열을 가다듬은 두라니와의 제3차 파니파트 전투(1761)에서 잠시 꺾였다. 두라니측 지휘관으로는 아흐마드 샤 두라니, 웃드의 나바브가, 마라타 측 총지휘관으로는 사다시브라오 바우가 참가하였으며, 두라니 측 병력 약 10만, 마라타 측 병력 약 5만이 뒤섞여 싸운 대전투가 마라타의 대패로 끝난 것이다. 마라타의 패배에는 여러 원인이 있지만, 그중 아와드 나바브 슈자 웃다울라가 아와드의 이권을 잠식한 마라타에 앙심을 품고 두라니 측에 물자 보급을 지원하는 한편 마라타의 보급을 방해했던 것도 크게 작용했다. 마라타 제국이 워낙 같은 힌두교를 믿는 나라들에게까지 혹독한 대우를 하였기에, 이에 앙심을 품고 이 전투에서 마라타를 지원하지 않았던 반면 이슬람교측 세력은 두라니 왕조를 중심으로 뭉쳐 있었던 것이다. 마라타는 패배의 결과로 수틀레지 강 이북 펀자브 지역의 종주권을 두라니에 넘기고 더 이상의 북인도 확장을 중지하게 된다. 하지만 이 전쟁은 마라타 측뿐 아니라 두라니 측에도 엄청난 국력 소모를 강요했으므로 두라니는 마라타의 팽창을 억제하는 선에서 더 이상 마라타와의 적대 행위를 중단하고, 델리를 비우고 떠난다. 이후 마라타 제국은 전투 때 자신들을 돕지 않았던 민족들에게 막대한 세금을 물리는 것으로 보복하였다.
제 3차 파니파트 전투에서 잠시 기가 꺾인 이후, 마라타 제국은 4번째 페슈와인 마다브라오 1세의 재위기에 다시 중흥기를 맞았다. 그는 분열된 마라타를 다시 하나로 묶으려 노력하였으며, 마라타 제국의 중심으로 상대적으로 남부 지방으로 옮겨 마이소르와 하이데라바드 등을 쳐 국경을 안정시키려 하였다. 그는 북부 국경도 신경을 썼기에, 장군들을 보내 국경을 확립하려 하였고 1770년대 초에 다시 다시 마라타 제국의 권위를 북부에서도 확고히 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허나 마다브라오 1세는 1772년에 27세의 젊은 나이로 별세하였고, 이 시점을 기준으로 하여 마라타 제국은 점차 쇠퇴하기 시작한 것으로 본다.
8세기 중반까지 인도 내에서 강력한 세력을 구축한 마라타 제국이었지만, 그 시기는 서양의 강력한 영국의 세력이 인도로 뻗어오던 시기였다. 인도 반도의 관점에서 영국(영국 동인도회사)은 원래 17세기 중반부터 남동인도의 첸나이(마드라스, 1639년부터 점유, 비자야나가르 제국 지방관의 승인으로 획득)와 남서인도의 뭄바이(봄베이, 1661년부터 점유, 포르투갈로부터 찰스 2세와 카타리나 디 브라간사의 결혼 지참금으로 넘겨받음)를 거점으로 삼고 무역을 하던 세력이었으나, 18세기 중반 벵골 지역의 지방정권을 굴복시키고 사실상 벵골을 점령하게 된 것을 시작으로 마이소르 왕국과 전쟁을 하고 하이데라바드 및 카르나타카에도 개입하는 등 이제는 남인도, 동인도에 광범위하게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마라타는 18세기 중반의 확장기까지는 영국과 별다른 정치적 대립이 없었지만(벵골과 오디샤에 대해 간접적인 알력이 있기는 했다), 이때부터는 영국과의 관계가 마라타의 흥망에 주요 변수로 떠오르게 된다.
1772년 마라타 제국 내부에서는 페슈와 마다브라오 1세가 사망하고, 바지라오의 손자 나라얀라오가 페슈와가 되었으나, 나라얀라오와 라구나트라오가 페슈와직을 놓고 치열한 권력 투쟁을 전개한다. 처음에는 라구나트라오가 나라얀라오를 암살하고 페슈와 자리를 차지하는가 싶더니(1773), 부정한 방법으로 자리를 차지한 라구나트라오에 대한 반발로 라구나트라오는 마라타의 조신들에 의해 1년 만에 자리에서 쫓겨나고 나라얀라오의 젖먹이 아들 마다브라오 2세(1774 ~ 1795)가 명목상의 페슈와로 옹립된다. 이때를 기점으로, 마라타 제국은 페슈와 중심의 체제에서 마다브라오 1세가 임명한 지방관들의 독립성이 강해져 지방분권적인 연맹체(마라타 연합, 마라타 동맹)로 변하게 된다. 그런데 이때 권력 중심에서 밀려난 라구나트라오의 일파가 봄베이에 있던 영국에게 도움을 요청하니, 기회다 싶었던 영국은 이에 응하고 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이것이 바로 제1차 영국-마라타 전쟁(1775 ~ 1782)이다. 그런데 이 전쟁에서는 프랑스가 외교적으로 끼어들어 영국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게 된다. 잠시 권력 투쟁으로 혼란에 빠져 있었다고는 해도, 다시금 강성해져 있던 마라타 동맹은 출중한 장군 마하다지 신데의 지휘 하에 일사불란하게 영국과 맞섰다. 한편 영국은 프랑스의 방해도 있는데다 제2차 영국-마이소르 전쟁과도 맞물려 있던 관계로 힘겨운 상태였고, 결국 1782년 당시 영국의 초대 인도 총독 워런 헤이스팅스는 마라타와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살바이에서 마라타와 평화조약을 체결하고 야무나 강을 경계로 하였다. 동인도 회사는 점령한 영토를 마라타에 반환했고, 대신 마라타는 영토 내에 프랑스의 항구 설치를 허가하지 않기로 약조하였다. 영국과의 영토 문제에서 합의를 본 마라타의 마하다지 신데는 무굴 제국 황제의 섭정이자 총사령관직을 수행하며 라지푸트와 펀자브를 영향권에 두는 등 북인도에서의 세력을 넓혀나갔다. 그러나 힌두교도가 무굴 제국의 최고위직을 겸하는 상황에 무굴 궁정의 이슬람교도가 반발했고, 1787년 랄소트 전투에서 라지푸트족의 암베르-마르와르 연합군에 마하다지 신데가 패배하자 마하다지는 무굴 궁정에서 일시적으로 실각한다. 1788년에는 과거의 로힐라족 세력과 연합한 무굴 제국의 독립파 장군 이스마일 벡의 항쟁이 일어났는데, 로힐라족의 굴람 카디르는 일시적으로 델리를 점령하고 마라타에 순종적인 샤 알람 2세를 폐위한 후 눈멀게 한다. 이에 무굴 궁정에서는 일시적 실각 상태였던 마라타의 마하다지 신데가 개입하여 이스마일 벡과 로힐라족을 분쇄하고, 델리 재점령 후 샤 알람 2세를 무굴 황제로 복위시킨다. 이에 따라 마하다지 신데는 다시 무굴 궁정에서의 영향력을 회복하고 1790년에는 샤 알람 2세에게 페슈와 마다브라오 2세를 무굴 황제의 대리인으로 임명하도록 한다.
한편 마라타는 인도 남부에서 새롭게 떠오르는 마이소르 술탄국의 세력과 대립에 들어가, 1770년대부터 간헐적인 전투를 벌였다. 초기의 국지전은 마이소르의 하이데르 알리가 마라타가 점령한 지역으로 공격해 들어가 발생한 1777년의 사운시 전투에서 꽤 큰 규모의 전투로 발전했는데, 하이데르 알리는 뛰어난 전술적 판단으로 마라타의 지휘관 콘헤르 라오(Konher Rao)를 죽이고 다른 지휘관 파두랑 라오(Padurang Rao)를 포로로 붙잡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 마라타와 마이소르 간에는 한동안 소강 상태가 지속되었으나, 1780년대에 마라타가 하이데라바드와 마이소르에 대항한 군사 동맹을 맺고 마이소르에 대항한 경계를 강화하자 마이소르의 티푸 술탄이 1785년 마라타를 침공하여 본격적인 마라타-마이소르 전쟁이 시작되었다. 1787년까지 2년간 지속된 이 전쟁에서 티푸 술탄은 놀라운 지휘를 펼쳐 연전연승하였고, 마라타는 전체적으로 전투에서는 패배하고 있었으나 마이소르의 국력 및 마이소르와 영국 세력 간의 적대 관계를 감안할 때 전쟁이 계속되면 최종적으로는 마라타에 유리할 것으로 판단하였다. 결국 티푸 술탄은 1787년 1월의 바하두르벤다 포위전에서 마지막 승리를 거둔 뒤 1787년 4월 가젠드라가드 조약을 맺어 마이소르가 마라타에 약간의 공물을 바치고 선대 하이데르 알리가 마라타로부터 빼앗은 영토를 반환하는 조건으로 전쟁을 끝냈다. 확실한 승리 없이 시간을 끌던 마라타는 예상한 것보다 적은 이득을 거둔 상황이었고, 결국 몇 년 후 제3차 영국-마이소르 전쟁(1790 ~ 1792) 때 영국 동인도회사, 하이데라바드 니잠 정권과 동맹하여 마이소르를 협공해 일부 영토를 점령해온다. 그러나 제3차 영국-마이소르 전쟁이 영국의 승리로 끝남에 따라 마이소르는 결정적으로 약화되고, 동인도회사의 세력만 강성해져 결과적으로 이는 마라타에 실책이 되었다.
1795년에는 마라타가 하이데라바드와 다시 대립하여 전쟁에서 카르다 전투의 대규모 회전을 승리하고 하이데라바드의 영토를 빼앗았는데, 하이데라바드는 지속적으로 친영 정책을 고수했기 때문에 이를 계기로 영국과 마라타의 관계는 다시 벌어지게 된다. 18세기가 끝나고 19세기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마라타의 전체적인 세력은 절정에 달하고 있었으나, 코친, 하이데라바드, 트라방코르, 아와드, 카르나타카 나와브를 길들이고 제4차 영국-마이소르 전쟁에서 승리(1799)해 남인도, 동인도를 평정한 영국의 앞을 막아서는 중부 인도의 대세력은 이제 마라타가 유일했다.
19세기 초 마라타 동맹은 페슈와, 가에크와드, 신데, 홀카르, 본슬레 등 다섯 세력들로 나뉘어 서로 간에 치열한 세력 다툼을 벌이게 된다. 이 기회를 놓칠 리 없는 영국은 페슈와 및 신데 가문과 군사동맹을 맺은 후 마라타 연합 세력을 분열시키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는 실패하고 만다. 그런데 1802년 10월 디왈리 축제 기간 중에 홀카르가 페슈와, 신데 연합군과 전쟁을 벌여 승리하게 된다. 이에 당황한 페슈와 바지라오 2세가 영국군과 군사 조약을 체결하여 그들의 보호 아래에 들어가게 된다. 곧이어 신데와 본슬레가 영국과 전쟁을 벌이는데(제2차 영국-마라타 전쟁, 1803 ~ 1805), 전쟁 초기 1803년의 아사예 전투와 라스와리 전투 등에서 신데-본슬레 연합군이 영국에 패배하고, 동년 12월 본슬레와 신데는 차례로 영국과 강화를 맺고 전선을 이탈한다. 전쟁 도중 신데 가문의 세력권에 있던 델리가 영국에 점령당하였으며(1803년의 델리 전투), 무굴 제국은 1803년부터 영국의 보호국이 되었다.
이를 지켜보던 홀카르 세력의 지도자 야슈완트라오 홀카르는 1804년 초 영국과의 협상을 시도하나 실패하고 전쟁에 들어갔다. 7월 무쿤드와라 고개의 전투에서 야슈완트라오는 영국군에 승리를 거두었고, 계속해서 9월까지는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었다. 마침내 10월 8일, 홀카르군은 영국 지배하의 무굴 황제를 보위하기 위해 델리를 포위공격하나, 영국군의 기습에 당해 큰 타격을 입고 패배한다. 이를 기점으로 전황은 홀카르에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하였고, 야슈완트라오는 홀카르의 동맹 바랏푸르 왕국의 영토로 피신하기에 이른다. 이를 추격한 영국군은 1805년 1월 바랏푸르 왕국의 수도 바랏푸르를 포위하였지만, 홀카르-바랏푸르 연합군의 호수비로 패배한다.
부담을 느낀 바랏푸르 왕국은 동년 4월 영국과 강화 조약을 맺고 전선을 이탈하였으나, 야슈완트라오의 선전은 북중부 인도 전역에서 추종자를 낳았고 신데와 본슬레는 재참전 채비를 하였으며, 자이푸르 왕국과 마르와르 왕국도 홀카르를 지원하였다. 바랏푸르에서 철퇴한 야슈완트라오는 시크 왕국으로 가서 시크의 란지트 싱을 끌어들여 영국에 대항하기를 시도하였다. 그렇지만 처음에는 지원을 약조하였던 란지트 싱은 곧 배반하고 영국 측으로 돌아서게 된다(1805년 12월). 군사적으로는 이처럼 홀카르가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었으나, 야슈완트라오의 분전으로 장기화된 전쟁이 유럽에서 나폴레옹 전쟁의 한복판에 있던 영국에 엄청난 전비 부담을 안겼으므로, 영국 총독 리처드 웰즐리가 본국으로 강제 소환되고, 영국 측은 야슈완트라오에게 강화를 요청한다. 이에 야슈완트라오가 응하여, 1805년 12월 24일 펀자브의 라지가트에서 라지가트 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전쟁은 홀카르-영국의 무승부 형태로 마무리된다. 1806년 초에는 라지가트 조약이 개정되어 홀카르 피점령지가 반환됨으로써 홀카르는 군사적, 외교적 명예를 얻었으나, 전 마라타의 입장에서는 패배였고, 이후 마라타는 라자스탄 일대의 라지푸트족에 대한 지배권을 대부분 상실했다.
페슈와 바지라오 2세와 장군 바푸 고칼레는 끝까지 항쟁하였으나, 1818년 1월 1일의 코레가온 전투 등에서 패배하고, 이어진 2월의 전투에서 바푸 고칼레는 페슈와를 지키다가 사망한다. 페슈와는 4개월가량 더 추격전을 벌이다 결국 힘이 다함을 자각하고 영국에 항복한다. 바지라오 2세가 이 항복 문서에 조인함으로써 마라타 동맹은 공식적으로 소멸하게 된다. 바지라오 2세는 페슈와 직할령을 몰수당하고 비투르(현재의 칸푸르 주변 칸푸르 현에 속함)에서 연금 수급자로 생활하게 되었으며, 과거 신데-홀카르의 지배 하에 있던 라지푸트 왕국도 1818년 말까지 번왕국화됨으로써 마라타의 구 영토는 전부 영국의 손 안에 들어간다. 명목상의 왕이었던 차트라파티 프라타프 싱 세력은 전쟁 와중에 영국의 보호 하에 들어가, 영국 지도 하에 구 차트라파티를 왕으로 하는 사타라 번왕국이 수립되었으나, 프라타프 싱의 아들(정확히는 양자) 샤하지가 아들 없이 1848년 사망함으로써 1849년 사타라 번왕국의 영토는 영국 직할령으로 흡수된다.
나나 사힙(1824 ~ 1859?)은 바지라오 2세의 처조카로 1827년 비투르에 살던 바지라오 2세의 양자가 되었다. 1851년 바지라오 2세가 사망하였으나 영국이 입양에 의한 상속권을 인정하지 않아 바지라오 2세의 여러 작위와 연금을 상속받지 못했다. 1853년 이 문제를 탄원하기 위해 잉글랜드로 사절을 보내나 거부당하고 1855년 사절이 빈손으로 돌아오자, 사힙은 자신의 명예를 실추당한 것으로 여기고 영국에 반발심을 품게 되었다. 1857년 사힙은 마라타 제국의 부활을 꿈꾸며 세포이 항쟁 시기 군사를 일으켜, 세포이 반란군과 합세해 6월 칸푸르를 점령하고 자신을 정당한 페슈와로 선언하였다. 그러나 이는 오래 가지 못했고, 같은 해 말 다시 영국군이 칸푸르를 점령한 후 도피하였는데 이후 사힙의 행방에 대해서는 다양한 추측(네팔 도피설, 시호르 도피설 등)만 무성할 뿐이다. 1858년 6월, 다른 많은 항쟁 지도자들도 나나 사힙을 페슈와로 인정하였다. 푸네에 있는 페슈와 기념물에 간혹 나나 사힙이 끼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후 이 덕분에 마라타 동맹은 인도 힌두교도의 자부심의 상징이 되었다.[10]
아슈타 프라단(8인 위원회)는 8명으로 이루어진 회의기구로, 마라타 제국의 최고 행정 기구였다. 이 기구는 제국의 시조인 시바지 보살레가 직접 고안한 것으로, 이 곳에서 나오는 문서와 행정명령들은 모두 산스크리트어로 쓰여졌다. 이 곳의 구성원의 목록은 아래와 같다.
종교 문제를 다루는 판디트라오와 법적인 사안을 다루는 나야드햐크스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위원들은 모두 강력한 군사적 권한을 가지고 있었으며 동시에 행정적으로도 상당한 권력을 누렸다. 마라타 제국 후기에는 갈수록 황권이 약화되고 신권이 강력해짐에 따라 봉건적인 구도가 형성되며 페슈와를 중심으로 한 관료제적인 성격을 띠기 시작하였다. 페슈와는 현재의 총리와 비슷한 직위로, 제국의 창건자 시바지 보살레가 마라타 제국의 성장기 동안에 더 효과적인 정책 발효가 가능하도록 일부러 막대한 권한을 부여하였다. 1749년 이전가지 보통 한 명이 8년에서 9년 정도 임기를 맡았으며, 마라타 군대의 최고 통수권자로 활동하였다. 1749년부터 1818년까지는 심지어 황제들보다도 힘이 강력해져 제국의 사실상 지배자로 떠올랐다.
마라타 제국은 유능한 페슈와들과 실무진들, 외교관들의 보좌 하에 인도 대륙 대부분을 통치하는 거대한 제국이었는데, 나중에 1818년에 영국 동인도 회사에 의하여 멸망당할 때까지도 페슈와들에 의하여 다스려지고 있었다. 페슈와들은 거의 대부분 종교의 자유를 허가하였으며, 세속적인 방법으로 제국을 통치하였다. 마라타 제국은 막강한 해군력을 사용하여 무굴 제국의 상선이나 서양의 배들을 약탈하는 경우가 잦았는데, 유럽인들이 이같은 조치에 항의하였을 때에도 마라타 제국 측에서는 이들이 제국의 적인 무굴과 이슬람 국가들과 거래하고 있다는 이유로 합법적인 공격 대상이라고 일변하였다. 나중에 유럽이 마라타 제국과 협약을 맺고 나서야 이같은 습격이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이하는 모두 바트 가문의 페슈와들이다. 푸네는 바트 가문의 세력권에서 페슈와의 본거지로 기능하며 제 2의 수도 기능을 하였으며, 본격적으로 페슈와가 황제를 대신하여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한 바지라오 1세 시대부터는 한동안 마라타의 수도 기능을 하였다. 바지라오 1세는 1732년 푸네에 재상궁 샤니와르 와다를 짓고 사실상 마라타의 통치자로서 군림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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